우리 역사상 최고로 황당했던(?) 전투, 고려와 후백제 간의 일리천(=구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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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상 가장 벙쪘던, 일리천 전투


국가의 모든 군력을 총동원하여 대등한 규모의 군대끼리 결사적으로 맞붙는다면, 보통은 장기간 혈투가 벌어지게 마련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등한 병력임에도 거의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것도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한쪽이 무너진 전투가 있으니, 바로 고려와 후백제 간의 일리천 전투(936년 9월)입니다. 일리천은 현재 구미(선산) 지역입니다.

후백제는 이 전투의 대패로 사실상 완전히 멸망하는 계기가 되는데요.

개인적으로 우리 역사상 가장 벙쪘던(?) 전투가 아닌가 싶기도 한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히스토리 조금 풀어봅니다.


1) 견훤의 유폐와 고려 망명


한 때는 공산(=현 대구 팔공산) 전투의 대승 등으로 고려의 왕건을 휘청거리게 하고, 당시 소멸 직전 신라를 급습하여 경애왕의 자결과 경순왕의 즉위를 만들기까지 한 후백제의 왕 견훤.

그는 누가 뭐라해도 후삼국 시대의 풍운아이자 실력있는 무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독선과 횡포가 심해지고, 과거 궁예처럼 자신만 옳다는 쪽으로 쏠리게 되면서 신하들의 불만은 커져가게 되는데요.

장남인 신검이 아니라 배다른 자식이었던 금강을 후계자로 올리려는 징후를 보이면서, 급기야는 장남 신검, 신검의 두 동생 및 능환 등 주요 대신들까지 합세하여 견훤을 몰아내는 쿠데타가 일어나고 맙니다.

이렇게 세 아들과 주요 대신들에 의해 금강은 살해되고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되어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이에 견훤의 분노는 하늘을 찌릅니다. 고령과 분노로 인해 등창이라는 병도 얻었습니다.

당시에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는데, 왕가이니 극도로 심했겠지요. 왕권을 위해서는 자식도 스스럼없이 죽이는 행태는 조선 시대까지도 자주 목격됩니다.

견훤은 왜 부모를 유폐시켰는가에 대한 반성보다는, 그 자식들에 대한 복수와 원망으로 지새게 됩니다.

그리고 고려의 도움으로 금산사를 탈출, 결국 고려로 망명하게 됩니다.

좀 황당하지요? 적국의 왕이 그 적국으로 망명을 한 것입니다.

견훤은 망명 후 고려에서 왕건의 "상부"라는 직위를 받고 별궁에 거주하면서 국정을 자문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공식적으로 "상부"의 지위는 고려 태자나 최고 대신보다도 높았습니다. 물론 패주이기에 실세는 없었겠지만 그 정도로 극진한 존중은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견훤과 왕건은 라이벌이면서 원수이기도 했지만, 과거 견훤이 왕건을 살려보내 준 적도 있었고 나름 한 시대를 풍미하는 왕들끼리의 호탕함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전부터 고구려와 백제는 대체로 크게보면 한핏줄(?) 의식도 있어서인지 친한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물론 왕건의 의도에는 견훤을 이용하려는 목적도 있었겠지요. 왕건의 대인관계의 확장으로 지역 호족들을 규합하면서, 결국 고려는 삼한을 통일할 수 있었다는 인식도 강하니까요.

사실 이 무렵 견훤의 항복 이후, 신라 경순왕도 고려에게 항복하였고, 발해 유민들 일부까지 고려로 흡수될 정도로 고려가 급격히 세를 확장하던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여튼 견훤은 자식과 신하들에 대한 분노, 평소 왕건에 대한 라이벌로서의 동지 의식 등이 겹치면서 고려로 망명하게 됩니다.


2) 견훤, 스스로 후백제를 닫는 결심을 하다


일리천 전투는 왕건과 견훤의 싸움이 아닙니다. 후백제와 고려라 하면 보통 아래 인물들을 떠오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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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천 전투는 왕건과 견훤의 장남 신검의 싸움이었습니다.

견훤조차 고려로 망명한 시점에서 후백제의 쿠데타를 일으킨 견훤의 장남 신검은 견훤을 대신해 후백제의 왕으로 즉위하고, 징발령을 내려 가능한 장정들을 모두 끌어모아 고려와 대등한 규모의 군력을 갖추고 고려의 군대를 일리천에서 기다립니다.

사실 이 무렵은 고려로 힘이 기울어지는 시기였기 때문에, 왕건은 전쟁 없이 신검이 항복해오기를 바라는 전략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견훤은 신검이 항복할리 없다며, 고려가 먼저 나가 싸울 것을 권합니다.

후백제는 충청/호남/경남 일부 지역 등 대체로 옥토가 비옥하여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지역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인구나 식량 면에서 여전히 나쁘지 않았기에 쉽게 항복을 선택할리 없었습니다.

이 때 전투에 나설 것을 권한 견훤의 마음에는 자식들과 대신들에 대한 분노가 여전했고, 삼한통일이라는 기치는 왕건도 자신과 같은데 왕건의 힘이 더 쎄고 왕건의 포용력이 높으니, 자신이 만든 후백제를 완전히 포기하고, 스스로 문도 닫아야겠다고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종의 결자해지 마인드였을까요?

대의명분이었든 분노심이었든 간에 아무리 그래도 부모가 자식이 죽을 수도 있는 전투를 청했다는 것은 좀 씁슬하지만, 당시 자식은 부모의 전유물 개념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입장에서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네요.


3) 역사상 최고 벙찐(?) 순간 탄생하다


결국 고려는 말갈족 부대까지 부르면서 군력을 총동원 약 9만~10만 정도의 대규모 병력을 모아 후백제군이 기다리는 일리천으로 진군합니다. 이 때 고려군의 기병이 최대 5만에 이르렀다 하니 숫자 이상으로 강력한 군대였던 것 같습니다.

급히 징발한 오합지졸이 많을 수 있지만 외견상 대등한 군력을 확보한 후백제군의 신검은 나가 싸울 것을 명합니다.

후백제의 선봉장 애술이 먼저 나서게 되는데, 이 때 역사상 최고로 벙찐(?) 순간이 탄생합니다.

대낮부터 공격을 명령해도 저녁까지도 병사들이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다들 공격하기를 주저하고 심지어 부장급 장수들도 머뭇머뭇합니다. 결국 한나절이 흘러 쭈뼛거리는 부장급 장수들을 일부 즉결 참수하고 나서야 간신히 공격을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왜 군사들은 싸우지 않았을까요?

바로 수십년 간 그들의 왕이자 주인이었던 견훤이 고려군의 선봉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견훤은 그가 견훤이라는 표식이 달린 큰 깃발을 세우고 직접 선봉에서 후백제군들에게 항복을 권했습니다.

선봉에 서 있기만 했다 혹은 직접 기병 1만을 통솔했다 등등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전투현장에 와서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견훤은 스스로 후백제 문을 닫는 방식으로 자식과 신하들에 대한 원한도 풀고, 왕건에게 삼한일통의 위업을 주기로 마음 먹은 듯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수십년 후백제 군주였던 자가 적군의 선봉에 서서 항복을 권하니, 가뜩이나 급조된 군대가 휘둘릴 수 밖에 없었겠지요. 징발된 군사들에는 전통적 백제의 기반 지역인 호남 뿐 아니라 경남 출신들도 많이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냥 끌려온 군사가 많았던 것이죠.

아무리 쿠데타를 일으킨 신검이라 할지라도 부모가 앞장서서 나와 있는 전투에서 자신 있게 싸울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 듭니다. 오랜 주군과 마주한 신하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구요.

이에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던 후백제 장수들은 바로 항복을 했고, 쿠데타에 가담했던 장수들이 남아서 고려군과 맞섰습니다.

수천 군사가 항복을 하는 와중에도, 중군의 장수들은 용맹히 싸웠고 나름 양군 간에 피해가 꽤 컸습니다만, 이미 사기가 꺾인 오합지졸 후백제군들에게 대등한 숫자의 군대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결국 상당한 피해를 입고, 신검은 수도인 전주 지역으로 도주하여 재정비를 노렸으나 이미 항복한 후백제 장수들이 이동예정경로를 누설한 것, 기병이 많은 고려군의 특성 등으로 도주 중 황산에서 포위되버리고 맙니다.

이에 신검은 더 이상 불필요한 희생은 막자며, 황산에서 왕건에게 최종 항복했습니다.

그러나 과거 고려에 귀순한 견훤, 경순왕 등을 포용한 것과 달리 왕건은 그들을 강하게 처벌했습니다.

견훤이 자식들을 죽일 것을 요청한 것도 있고, 신검은 쿠데타로 왕이된지 1년 밖에 안되어 실질적으로 후백제 주민들이게 인정받는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능환 등의 주요 대신들은 참형이 됐고, 신검의 두 동생들은 진주로 유배되었다가 추후 참수되었습니다. 이 때 신검은 관례상 직접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신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신검도 곧 참수되었을 것이라는게 중론이라고 하네요.

신검을 살려준 것에 대해 견훤이 크게 분노했다는 설도 있는데, 여튼 일리천 전투가 끝나자마자 견훤은 논산의 한 절에서 급사하고 맙니다.

등창병과 신검을 살려놓은 분노 등으로 추정되고는 있으나, 타살설 등 다른 소수설들도 조금 있다고 합니다.


자식들을 죽게하는 전투에 직접 선봉에 나선 부모 견훤, 그는 끝까지 스스로는 적국에 망명하여 사는 등 쿨했을지 몰라도, 자식들에게는 어쩌면 한없이 가혹했던 부모였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드네요.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 일반인이 잠시 살펴 본 것을 정리한 글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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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야욕이 부자간의 인연조차 버리게 만들 수 있군요.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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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특히 왕가는 당시 부인만 수십에 자식도 수십명인 경우도 많았기에 그리 애정섞인 자식들이 거의 없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왕건도 부인이 29명에 이르렀다고 들었습니다. 세종은 더 많았다지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왕건 재미 있게 봤었는데, 다시 생각나게 되네요^^

^^ 보클로 응원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ㅎㅎ 무려 200부작이더군요? 인기가 대단했지요
신기한 건 최수종씨는 왕건도 했고, 대조영도 했고, 심지어 무열왕 김춘추도 했었다는 것
그래서인지 세 명의 왕이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그 외에 또 역할 맡았던 것도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또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픽션과 팩트도 분리해서 봐야겠지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디클릭 하고 갑니다~!

네 시장 대응 잘하시고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저는 예전엔 당연히 견훤이 호남쪽 사람일거라 생각했는데 실제 태생은 경북이더라구요. 경북 문경 가은읍에는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의 이름을 딴 아자개장터가 지금도 있습니다. (저희 동네라 가끔 가보면 별로 볼건 없지만 ^^;;) 옛날 왕이나 장군 기록보면 화가나서 등창이 터져서 죽었다라고 되어있는 경우가 종종 있던데 견훤도 그렇게 되어있더라구요. 아버지가 스스로 아들을 치러가는 심정이 어땠을지 참 딱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네 저도 그리 들었어요. 생생한 정보 감사합니다.

통일 신라의 장수로써 지금의 전남 지역 쪽에서 근무하면서 그쪽으로 인연을 많이 맺고 백제의 부흥을 명분 삼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이 백제를 들먹인다고 다들 후백제의 왕으로 모시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하구요. 문경 지역도 백제와 신라가 자주 치고받으며 중첩되는 지역이기도 하고 지금의 지도 기준으로 따지기는 어렵지 않나 싶네요. 결국 아무런 연고 없이는 후백제 그것도 왕이 된다는 건 좀 어렵지 않았을까 싶기에 출신 지역 가지고 특별한 이슈가 제기되지는 않는 것 같네요.

저야 사실 문외한이라 ㅎㅎ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좋은 글 자주 써주세요^^

재밌는 역사 잘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단어들도 있네요.
뻥지다. 얼척없다^^
(디클릭 꾹~)

달리 그 상황을 강조할만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서 써봤습니다^^
말씀듣고 찾아보니 표준어가 아닌듯 해서 좀 순화했습니다.
황당한, 어처구니 없는 으로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So nice and excell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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