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순간의 엄청난 나비효과: 동북아 역사의 물줄기를 튼, 1936 서안(西安) 사태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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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서안(西安)사태 직전, 부사령관 장학량(좌)과 총사령관 장개석(우)>



<영화 "명장" ost, 들으시면서 보시기에 제격입니다.>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대만/중국편의 번외편이나 완전히 별개의 내용입니다.
이 글 보시고 아래 글들을 보시면 이해에는 분명 더 좋습니다.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3: 작사자도 결국 숙청당한 『중국 국가』 & 모택동의 망언들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4: 한국과도 인연 깊은, 비운의 『대만(=중화민국) 국가』

책 한권의 엄청난 나비효과: 태평천국의 난 (19세기 최대 군사분쟁)

<일반인의 개인적 정리글일 뿐이니, 맥락 위주로 보시는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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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사태(사건)의 Intro


※ 서안 사태(사건)란 1936년 12월 12일 새벽, 당시 중화민국 리더이자 국민당 혁명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장개석(=장제스)"을, 부사령관 "장학량" 등이 서안에서 납치한 뒤, 공산당과의 내전을 종료할 것과 항일투쟁에 올인할 것을 종용하다가, 약 2주 뒤인 12월 25일에 "장개석"을 풀어 준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로 인한 시간적/정치적 빌미와 실제 정세 변화가 겹치면서, 소멸 직전 공산당이 살아나, 결국은 당시 "공화국"을 기치로 했던 중화민국 대신 현재의 "공산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을 탄생하게 하는 데 큰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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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당시 공산당은 잘봐줘도 위쪽 연두색 네모 정도로 축소되어 소멸 직전에 있었습니다.(중국 측 자료이므로 느낌만 파악하세요)

이 부분 때문에 공산당 체제인 現 중국에서는 "장학량"의 당시 결단을 구국의 영웅으로 치켜세우거나, 그의 여성편력마저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로 그려내는 드라마를 제작하는 등 미화에 한창입니다. (유튜브마저도 중국계 사람들이 한글로 올려 놓은 자료들이 많으니 유의해야 합니다.)

現 중국 및 친중성향 학자들을 제외하면, 동서양의 "장학량"에 대한 평가는 박합니다. 기회주의로 일군 동북부 군벌 집안에서 아편중독과 여성편력을 즐기며 자라다가, 불과 28세에 대를 잇게 된, 철없는 어린 아들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신념 같은 것은 사실상 없었고, 잘봐줘도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부하 및 지역민들을 조금 챙기는 정도였으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 집단의 수장이었습니다. "장개석"에게 사실상 투항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어쩔 수 없어서 기회주의적으로 움직였던 것이었고, 서안 사태도 그 연장선 상에서 벌인 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북아 역사의 물줄기를 튼, 이 짧은 2주간의 사태로 인한 나비효과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어쩌면 6.25전쟁이나 분단의 현실이 없었을 일말의 가능성을 없앤 사건이기에 한국 입장에서는 아쉬운 측면이 강한, 1936년 서안 사태(사건)에 대해 알아볼께요.

사태를 일으킨 "장학량"이라는 인물, 약 2주간의 서안 사태 당시 상황 및 서안 사태 전후의 동북아 정세에 대한 종합적 이해와 판단이 필요합니다.


1) 신념 대신 권력욕만 있었던, 동북 군벌의 아들 "장학량"


① 가난한 마적 출신, 기회주의로 동북 최대 군벌이 된 그의 아버지 "장작림"

"장학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부터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 "장작림(=장쭤린)"은 20살까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도박을 즐기며 별볼일 없이 살다가, 청일전쟁이 터지자 청군에 말단병으로 입대, 말 다루는 기술이 좋았던 그는 인정을 받았지만 전쟁에서 청은 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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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림(=장쭤린)>

청의 몰락, 일본의 약한 지배로 통치/치안체계가 무너진 동북지역 및 만주는, 원래도 먹고 살기 힘든 지역이었지만, 완전히 무주공산이 되어 가난과 치안의 부재에 시달리게 됩니다. 약탈을 일삼는 마적(馬賊)단들이 횡횡하게 되는데, 말 다루는 기술을 익혔던 "장작림"은 20여명 정도를 고용해 마을의 치안을 지키는 착한 마적이 됩니다.

인기를 얻은 덕에 연줄을 타고 조정 관료와 만나게 된 "장작림"의 마적단은 청의 정식 관군을 대체하게 되어 물자 지원 속에 규모를 키우게 됩니다. 그는 러일전쟁에서는 러시아제국을 지원했으나 러시아도 패배했습니다. 그가 지원한 국가는 전쟁에서 모두 패배한 것이죠. 그러나 지원한 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충성한 덕에, 그의 세력은 계속 확장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만주 등 동북지역은 남부 대비 개방이 훨씬 늦어 서양문화 이해가 늦었던데다, 청나라의 유래가 된 지역인만큼 그 기득권을 지녔던 지배계층에게는 청의 멸망과 일본의 진입은 기득권을 뺏기는 매우 분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대다수는 역설적으로 결국 일본의 편에 서서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요.일본의 지원을 받은 과거 청의 기득권 세력들, 마적단, 현지군벌들까지 모두 현지인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일반인들도 일본에 대해 반일감정이 점점 높아져 갔습니다. 또한 현지 일반인들은 피폐한 삶 속에서 그런 현지군벌, 마적단, 청의 구 기득권세력들도 모두 싫었기 때문에 똑같이 먹고 살자는 공산 성향이 강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장작림"은 이런 지역 분위기로 인해 많은 군대를 모집할 수 있었지만, 당시 이길것으로 생각한 청나라, 러시아 쪽에 붙었는데 일본한테 모두 졌습니다. 국제 정세를 판단할 능력은 모자랐지만, 고용인에 대한 충성, 아부 및 자신이 통제하는 조직에 대한 의리있는 관리를 통해 계속 성장했습니다.

일본 군력의 막강함을 알게된 그는 결국 중국 동북부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주변국들을 견제하려는 일본의 지원을 받으며 친일 하에서 제대로 성장하게 됩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만들어 낸 사실상 괴뢰(=허수아비) 군벌이라고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해혁명을 주도했던 중화민국 초대 총통 "쑨원"은 이들 군벌들의 여러 문제점을 알고 있었지만, 청나라를 멸하는 것이 우선이라 보고 일단 손을 잡았기에 군벌들도 중화민국 건국(1912)에 큰 지분을 가지게 되었으며, 동북 최대 군벌이 된 "장작림"은 중화민국의 군 대원수 직에 오르게 됩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자 (착한) 마적 출신의 별볼일 없던 그는 드넓은 중국 동북부(북경~만주) 지역의 핵심이 된 것입니다. 온갖 기회주의와 아부로 살아온 그가 소원을 이룬 순간이었습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이쯤 되자, 계속 지원을 받아왔던 일본과도 약간의 거리를 두게 되는데요.(사람 마음이 들어갈 때 나올 때 다른 법이라지요)

그가 (착한) 마적 초기에 낳은 아들이 후일 서안 사태를 일으킨 "장학량"입니다. 이 아들은 부모와 달리 어느 정도 성장한 군벌집에서 자라왔기에 철이 없었고 15세 정도부터 아편에 중독되고(30대까지도 지속한 기록이 있음), 여성 편력이 심해 파티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런 "장학량"에게 "장작림"은 "첫 부인은 꼭 내가 지정한 사람과 해라. 그 후에는 어찌해도 상관없다."고 조언했다고 하네요.

만주 지역의 일본군(=관동군)의 입장에서는 머리가 커도 너무 커버린 "장작림" 대신 철없어 보이는 "장학량"이 이용하기에 만만해 보인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마침 "장개석"의 중화민국 국민당 혁명군이 북부 군벌 토벌전투들에서 "장작림"이 패하자, 그는 책임을 지고 대원수 직에서 물러납니다. 다음 날 일본 관동군 장교들은 폭탄 사고를 위장해 "장작림"을 죽게 만듭니다.


② 28세 "장학량", 얼떨결에 등극, 신념없이 오가다 1차 폭망

1928년, 얼떨결에 불과 28세에 중국 동북부 최대 군벌의 대를 이어 실권자가 된, "장학량"은 부모 "장작림"이 그러했듯, 일본의 눈치를 많이 보고 지원을 받으면서도 그가 다스려야 하는 동북부 지역의 중국인 다수성향인 반일감정과 공산주의적 마인드를 감안 시 양쪽으로 휘둘리면서 신념없는 기회주의적 처신을 주로 하게 됩니다. 목표는 자신을 위시한 군벌세력 유지이죠. 부모가 일본에 의해 죽었어도, "국민당"에서 죽인 걸로 위장되어 있었던데다 증거도 부족했기에 어떤 항의도 하지 못했습니다. 반일감정은 있었겠지만, 부모를 따르던 수하들에게 휘둘리면서 세력 유지에 힘써야 했습니다.

다행히 몇몇 부하들이 우수해서 망정이지 아편과 파티를 즐겨왔을 뿐, 그 스스로 무얼 할만한 능력은 부족한 어린 상태였습니다. 일본 입장에서 "장학량"은 아버지때부터 말 잘 듣는 군벌이기에 그가 "국민당"과 손잡는 것을 막고, 잘 구슬러서 이용하면 중국 동북부 지역을(만주~북경) 손쉽게 관할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장작림"말기 때부터 자신들의 군벌 세력이 너무 커지자, 그것을 믿고 중국 편을 들거나, 스스로 더 큰 권력자를 노렸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장작림"은 결국 "국민당"이 벌인 것으로 위장된 사고사를 당하기도 했죠. 일본 입장에서는 머리가 너무 커버린 "장작림"은 포기하고, 철없는 아들 "장학량"은 일단 살려두고 관리하면서 보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부모처럼 자신의 군벌세력 성장만을 위해 일본 지원 속에서도 중화민국/중국공산당/러시아까지 다양하게 줄을 대면서 일본을 이용해 먹기만 한다면 버리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부모의 죽음 후 근신하면서 세력이 커진 "장학량"은 다수를 차지하던 동북 출신 부하들의 강경한 조언에 둘러쌓이게 됩니다. 이대로 가만 있다가는 일본은 일본대로, 국민당은 국민당대로, 공산당은 공산당대로 확장하면서 자신들은 옴짝달싹 못하고 만주에 갇힌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예전부터 이 집안은 국제정세 판단이 안되는 집이었습니다. 그냥 부하들을 잘 챙기고 위로는 충성하면서 힘을 키웠던 군벌일 뿐이죠. "장학량" 본인이라도 어릴때부터 고민을 많이 하면서 자랐다면 모를까, 수하들에 둘러쌓여 하자는 대로 움직이고 아편/파티를 즐긴 젊은이가 대단한 판단을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장학량"은 신념과 명분 없이, 동북 출신 부하들의 반일/공산주의 마인드에 둘러쌓여서 스스로 중국 최대 세력이 되고자 만주를 벗어나 베이징 쪽으로 대규모 정예병을 이동하고 맙니다.

그들이 만주를 비우자, 일본 관동군은 가뜩이나 "장작림" 말기 때부터 자신들의 지시를 잘 어겨서 불편해하고 있던 차에, 아예 만주를 직접 지배할 생각으로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이라는 일본제국의 괴뢰(=허수아비) 정부를 수립시켜 버립니다.

당시 일본제국은 군세가 워낙 강해서 마음만 먹으면 수배가 넘는 군사를 보유한 중국 군벌들도 토벌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타이밍을 재면서 "국민당", "공산당" 및 "러시아"를 견제해 줄 세력으로 동북 군벌들을 지원했을 뿐이었죠.

이런 와중에도 "장학량"은 일본이 과거처럼 "장작림" 군벌세력을 이용한 간접 지배 정책을 유지할 것인데, 자신들이 말 잘 듣게 하려고 겁을 주기 위한 움직임 정도로 치부하고, 일본 관동군의 공세에도 만주에 남은 자신의 군대에게 "대응하거나 싸우지 말라"는 "부저항" 명령을 내려버립니다.

인도의 간디도 아니고, 공격해오는 적에게 맞서리 말라는 이 "부저항" 명령은 "장학량"을 비난할 때 즐겨 쓰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 정도 남은 군대로 일본과 맞서 싸웠다가 훗날 어떤 일을 겪을지 몰라 두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여튼 멀티를 나섰다가, 그렇게 순식간에 본진을 털린 "장학량"은 일본의 만주국과 북벌을 외치는 "장개석"의 국민당 혁명군 사이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되고, 그의 반일감정도 높아져 갑니다.(자기 땅이라고 생각했던 곳을 뺐겼으니까요. 그 외 다른 신념은 없었습니다.)


③ "장개석"에게 사실상 투항, 처음으로 2인자의 삶을 살아보다

그제서야 "장학량"은 자신이 중화민국 전체의 실권자가 되는 것은 어렵다는 판단을 했는지, 아니면 또 기회주의적 처신인지, 부하 군인들에 대한 배려인지 어쩌면 복합적인 판단으로, "장개석"의 국민당 혁명군과 한 편을 선언해 버립니다. 게임으로 치면, GG를 친 것이죠.

청의 봉건적 왕정을 멸하고 1912년 건국된 중화민국마저 사실상 청나라 말기에 성장한 군벌들에게 장악되었던 상황에서, 이들 군벌 타도를 외치며 성장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와 그 혁명군이 사실상 중화민국을 통일하는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동북 최대 군벌이 사실상 항복을 선언하자, 잔챙이(?) 중소 군벌들도 국민당에 합류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의 광활한 영토 전체가 통일된 때는 드물었습니다. 그만큼 통일이 어렵고, 특히 동북 지역과 서남 지역 간에는 특유의 문화/음식/기후/민족 차이 등으로 인해서 이질적일 때가 많았습니다. 신기하게도 풍요로운 서남 지역보다, 척박하지만 동북 지역을 지배했던 세력들이 중국을 이끌 때가 많았었습니다. 동북지역의 리더가 "중원"을 지배하곤 했었지요. 넓고 풍요로운 서남 지역을 지배한다해도, 그만큼 동북지역까지 관리하는 것은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동북 지역의 리더가 항복해 온다고 해도 말이죠.

따라서 "장개석" 입장에서는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중화민국 통일에 꼭 필요한 "장학량"이었기에 편지도 쓰고 친해지려고 노력했고 결국 일단 한편은 되기로 한 것입니다. "장학량"은 이후 1년여간 유럽 유랑을 떠나게 됩니다. 이무렵, 서북 군벌인 "양호성(=양후청)"도 한때 공산당 가입을 타진했다가 거부된 인물인데, 그 역시 사실상 투항하면서 유랑을 떠나게 됩니다.

이렇게 본의 아니게 밀려서 "유랑"을 떠나게 된 그 둘은 후일 "서안 사태"의 주범이 되지요.

보통 전쟁 중에 항복한 상대방 우두머리는 제거 대상이 되는 법이지만, 워낙 큰 지역을 차지했었고 난징을 축으로 한 국민당 정부가 통제하기에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너무 먼 동북 및 서북 지역의 힘을 알았기에 "장개석"은 성장하는 다른 군벌들의 견제도 할 겸, "장학량"을 2인자로 쓰고, "양호성"도 복귀시키는 통 큰 결정을 합니다.

그의 호쾌한 투항 결정을 외견상으로나마 통일 명분을 주어서 높이 평가하여 굴욕스럽지 않게 해 놓았기에, 국민당 혁명군의 부사령관으로 쓸 수 있었습니다. 자신은 난징과 서남 지역 전투를 주로 관리하면서, "장학량"의 군대인 동북군과 "양호성"의 서북군에 지원을 하여 북쪽 공산당(=홍군)과의 전투를 이끌게 합니다.

결국, 풍운아 "장학량"은 최초로 1인자가 아닌, 2인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전투경험도 거의 없었고 지식도 부족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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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36년 서안 사태(사건)


① 신념 없던 "장학량", 불만이 쌓이며 기회주의를 다시 드러내다

어벤저스 레벨의 구성원들은 각자 한 편의 영화를 이끌지만, 모두 합친 영화에서는 그 비중이 크게 차이나게 되지요. "장학량"은 겉으로는 혁명군의 2인자지만, "국민당" 혁명군의 공화국 신념을 가진 이도 아니었고, 사실상 투항해 온 터라 입지도 약할 수 밖에 없으므로, 부사령관임에도 자연히 겉돌게 됩니다. 그냥 자신이 지휘하는 동북군 내 자신을 원래 따르던 수하들에게만 리더였던 것이죠. 훗날 그는 말하지요.

"나는 국민당도, 공산당도 아니다."

네. 국민당 혁명군은 공화국 건설 신념 하에서 지속적으로 승리하면서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지만, 그는 그냥 큰 세력의 대장이 되어 권력을 누리고 싶었을 뿐인, 청의 봉건 잔재를 가지고 기회주의로 성장한 동북 만주 군벌 집안의 생각 없는 아편중독/여성편력 강한 아들이었을 뿐입니다.

그에게는 일본이 세운 만주 괴뢰국과 점차 일본 지배하에 놓여가는 동북 지역은 사실 자신의 땅이고, 자기가 대장으로 군림해야 할 곳인데 일본에도 뺏기고, 국민당에게 거의 다 뺏기고 있었던 셈일지도 모르죠. 시대가 변했지만, 그는 화려했던 군벌 시절의 추억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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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렵 추정 지도(중국 측 자료이므로 느낌만 파악하세요.)에 의하면, 국민당과 일본이 기존에 "장학량"이 관리하던 동북 및 만주 지역을 휩쓸어 중화민국 통일이 되어도 그것은 국민당의 몫, 나머지는 이미 넘어간 일본의 몫일 뿐이었습니다. "장학량"이 다시 돌아가 관리할 터전이 없어진 셈이죠. 실권 약한 2인자이지만, 전쟁이 끝나면 더 묻힐 수도 있었던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장학량"은 난징의 "장개석"에게 공산당 토벌 명령을 받고, 전투경험이 적던 그는 공산당 잔당과의 전투에서 마저 수 차례 패퇴하고 입지를 잃어가게 됩니다. 심지어 그는 공산당과 대치하는 와중에 공산당과 만나 의견도 듣고 지도를 건네는 등 자신이 돌아갈 터전을 만들려는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공산당을 지원하는 이중 플레이까지도 하게 됩니다. 지도를 건네면서 했다는 말은 "향후 (당신들이 잘되었을 경우) 내 입당원서라고 생각하고 받아두게나" 정도로 추정된다고 하네요.

물론 이미 중국 전역에서 (특히 일본에 지배권을 내 준 동북 지역 위주로) 항일 분위기가 조금씩 고조되고 있던 터이긴 했습니다. "장학량"의 동북군도 그 추세에 따라 공산사상을 가진 장교들이 많이 입대해 있었습니다. 공산당 잔당 토벌 목적의 군대 내에 공산당을 신봉하는 세력들이 적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명확한 명분과 신념이 없다면, 그저 그때그때 이익에 따른 전략적 판단으로 행동하게 되는 법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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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워낙 길어 부득이 2부로 나누었으니, 이어 보시면 됩니다.

한 순간의 엄청난 나비효과: 동북아 역사의 물줄기를 튼, 1936 서안(西安) 사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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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어쩌면 세계 판도를 바꾼, 단 한 장의 문서: 「스페셜오더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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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 대한 포스팅 재밌네요.
서안사태가 결국 우리에게도 비극을 가져왔군요.
역사는 만약에 ㅇㅇ했더라면....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네. 저도 공부 겸한 포스팅이라 맥락 위주로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워낙 복잡한 내용들이라 말이죠. 감사합니다.

서안사태라는 것을 덕분에 처음 알게 됐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이런 글은 리스팀으로 널리 알려야죠👍

감사합니다. 자료가 부족한 반면 정세는 방대한 량이라 정리가 어렵더라구요.
중국에서는 이들을 띄우기 때문에 사변, 사태라는 표현 대신 서안사건이라는 표현을 쓰는 분위기 같습니다. 맥락 위주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편한 한 주 보내세요^^

자신의 처지는 생각하지 못한 체 나름 잘 나갔던 시절만 생각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행동이 인상적입니다. 너무 잘 보았습니다 2부도 기대됩니다^^

이쪽 역사는 아무래도 짧게 파악한 제 사견이 들어갈 수 있는 부분들입니다. 맥락 위주로 보시고 궁금하신 부분 있다면 직접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보고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And afteralll... you're my wonderwall.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었네요.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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