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지망생 히틀러를 집권자로 만든(?) 3가지 사건들

in #kr6 years ago (edited)

00.png

<1차 대전 발발을 알리는 연설에 기뻐하는 히틀러 추정 사진>



<"Supermarine", "놀란"감독의 덩케르크 OST 中, 글 내용과 어울리네요>

<일반인의 일시적 정리글일 뿐이므로, 맥락 위주로 보세요>

333.png

Intro


히틀러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나, 본래 화가가 꿈이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죠.
비록 명문 미대 진학은 실패했으나, 그의 그림들은 꽤 잘 팔리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55.png
<히틀러의 그림 중 하나, 그는 주로 건축설계에 가까운 그림이 많았다고 하네요>

그가 왜 극도의 인종차별주의/반유대주의자가 되었을까에 대한 연구는 그의 어린시절 때부터 거슬러가서 아직도 진행중에 있다고 하고, 여러 설도 많이 있지요. 보통은 당시 독일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20대 군복무 시절에 그런 경향이 강화되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행여, 그가 정말 어릴적부터 그런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다한들, 사실 평범한 화가 지망생이었던 그가 독일의 집권자가 된다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겠지요?

그가 집권자가 되는 데 있어, 개인적으로 중요했다고 보는 3가지 사건들 간단 정리해 봤습니다.
(그 외에도 많겠지요)

333.png

1) 신생 "독일 노동자당" 조사임무를 받은 히틀러


화가 지망생으로 별 볼일 없이 살던 그는 1차대전 발발소식을 듣고 탈출구를 얻은 걸로 보고 독일군에 자원입대합니다. 오스트리아 국적이었던 그가 독일군에 입대를 성공한 것 부터가 어쩌면 신기한데요.

나름 열심히 복무를 하여 잘 나갔지만, 독일의 패배로 뮌헨에 돌아와서는 국가방위군 정보국에서 근무를 하게 됩니다. 전쟁에 패한 독일은 대혼란이었습니다. 뮌헨 지역은 임시로 공산정부가 수립되었다가 바로 쫓겨나고 민족주의 계열의 우파정부가 수립된 상태였습니다. 이때 공산정부 사람들을 보면서 히틀러는 극도로 공산당을 혐오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무렵은 정부 외에도 수많은 군소정당이 난립되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는 상부로부터 신생정당인 "독일 노동자당" 조사임무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꾼 첫 시점으로 보이는데요.

"독일 노동자당"은 당시 불과 40명 남짓 당원을 보유한 시시한 곳이었습니다만, 임무이기에 가서 당수인 "안톤 드렉슬러"의 연설을 듣게 됩니다.

33.png
<"독일 노동자당" 설립자, "안톤 드렉슬러">

드렉슬러는 기계정비공, 자물쇠 제조공일을 해온 노동자로 연설 중간에 "바이에른(=당시 히틀러가 속한 군대가 있던 정부)"은 "오스트리와"와 합쳐 독립을 하고, "프로이센" 쪽과는 이제 관계를 끊는 것이 낫다는 이른 바 바이에른 분리주의를 설파하는데요.

이걸 본 히틀러는 조사하러 갔던 주제에, 연설에 끼어들어 그의 견해에 반대 토론을 하게 됩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좋아하던 인물은 아니었죠. 하지만 (속으로는) 그가 이야기한 다른 내용들에는 대체로 공감하게 됩니다.

그렇게 연설이 끝나자 자리를 뜨려는 히틀러에게 드렉슬러는 당의 성격을 알리는 소책자를 쥐어주며 다시 오라 합니다. 이때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네요.

"와, 40명 밖에 안되고 돈 한 푼 없는 당에서 나를 오라하다니"

그는 좀 허세끼가 있는 사람이었지요. 오랜 군복무로 자신을 대단한 사람인 양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한 그는 결국 "독일 노동자당"에 55번째 당원으로 가입하고 맙니다.

후일 히틀러는 "나의 투쟁"이라는 책에서 이때 드렉슬러의 견해가 자신의 정치적 사상에 대해 일깨워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적었다 합니다.

신생 정당을 조사하러 갔다가 감화되어 당원이 된 모양새이지요. 그가 이 임무를 부여받지 않았다면, 드렉슬러가 그에게 당원가입을 권유하지 않았다면 히틀러는 일찍부터 정치에 입문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독일 노동자당"은 점차 히틀러의 사당으로 키워져 결국 나치당의 전신이 됩니다. 정식명칭은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입니다. 괴벨스가 입당하면서 사실상 나치당으로 완전히 변모합니다.


2) "뮌헨 폭동"에서 불과 1년 3개월만에 출소한 히틀러


1919년 입당한 히틀러는 1923년에는 어느 덧 당원 1만명 이상, 돌격대까지 거느린 당으로 확장합니다. 이 무렵 민족주의 계열 우파정부는 시민들의 공감을 크게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차대전 패배 후 독일인들의 삶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지요. 때마침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로마로 진군하여 소위 "파시즘" 정권을 잡게 되었고, 독일의 전쟁배상금 지불이 지연되자 프랑스는 독일의 "루르"지역을 강제점거해버리기도 합니다.

1차대전 패배국들의 궁핍화는 전체주의를 낳고 있었고, 프랑스의 독일 일부 지역 강제점령은 베르사유 조약을 어긴것이기도 해서 독일인들이 분노가 커졌습니다.

자국 내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고, 의회민주주의보다는 강한 전체주의를 바탕으로 독일을 강하게 이끌어 갈 사람을 찾게 되는 형국이었지요.

11.png
<뮌헨 폭동 당시 "비어홀"을 포위한 나치대원들과 동조하는 지지자들>

이에 1922년 11월 8일 밤, 소위 "비어홀(beer hall)"이라 불리는 뮌헨의 여론중심지이자 대형연회공간에 모여 있던 바이에른 정부 주요 인사들을 히틀러의 당원들과 돌격대가 포위하고, 히틀러를 내각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한다고 선포하는 일종의 쿠데타를 시도합니다. 주요 공공기관들도 점거하였습니다.

얼떨결에 포위당한 정부인사들은 히틀러의 의견에 동조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히틀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주요인사들을 풀어주고 마는데요. 평소 정부인사들과 히틀러 조직이 가까웠다는 반증이 되겠죠. 협력하기로 하였으니 풀어준 것입니다.

그러나 풀려난 인사들은 아직 히틀러에게 넘어가지 않은 독일 국가방위군 등을 활용, 정부 전복을 막고 다음 날 다시 행진해 들어오는 나치당원들에게 발포하여 약 20여명의 사상자를 낸 후 해산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히틀러도 어깨 탈구가 된 채로 체포됩니다.(어깨를 서로 걸치고 행군 중 옆 보좌관이 전사하면서 같이 넘어진 것입니다)

체포된 히틀러는 바이에른 주정부 재판소의 자체재판에 회부됩니다. 여기서부터가 특이한데요. 사실 이런 폭동은 반란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독일 국가재판소로 넘겨지면 최소 15년형 이상에 처해지는 중범죄인데,

당시 바이에른 주정부 인사들도 히틀러의 조직이 쓰임새가 있다는 판단 하에, 평소 친했었는지는 몰라도 서로 간의 커넥션이 좀 있었는지 자체 재판소에 회부해서 졸속으로 가볍게 처리하려고 노력합니다.

당시 우파정부에게도 확장하는 공산당, 극좌파세력들을 견제하려면 히틀러의 당원들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계속 봐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죠.

쿠데타를 일으킨 히틀러는 그렇게 주정부 재판소에서 징역 5년을 받고 1년 3개월만에 사면되어 석방됩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맥주와 면회를 충분히 즐겼으며, 여유있게 "나의 투쟁"이라는 책까지 쓰고 나왔습니다. 이때가 히틀러가 정치에 대해 이론적으로 조금 공부를 한 유일한 시기가 아닌가 싶네요. (그는 이론적으로는 특별할 것이 전혀 없었죠. 그는 레닌에게 "선동"을 배웠다고 말한 적이 있을정도로 연설과 계략을 통한 선전선동에 집중했었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감화되었죠.)

심지어 뮌헨폭동에 같이 참여한 전쟁영웅 "루텐도르프"는 무죄를 선고받는데요. 그냥 불가피하게 참여했을 뿐이라는 이유였습니다.

44.png
<루덴도르프>

히틀러보다 훨씬 인지도가 높던 루텐도르프는 이때 무죄선고로 오히려 인기가 급락하고 사실상 은퇴하게 됩니다. 반면, 1차 대전 책임 때문에 대부분의 독일 지도자들이 오스트리아 등으로 망명을 떠난 상황에서 변변한 지도자가 없던 독일에 "히틀러"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어 훗날을 도모할 수 있게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어설픈 계획으로 쿠데타가 실패했음에도, 아주 가벼운 처벌만을 받아 금방 출소하게 된 히틀러, 만약 15년 이상의 반란죄로 다스려졌다면 그는 아마 재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 히틀러에게 5년형을 선고하고 1년 3개월만에 풀려나게 만든 판사는 결국 나치 독일 하에서 "대법원장"까지 지내게 되고, 훗날 그의 가족들은 전재산을 몰수 당하게 됩니다.

그 판사도 히틀러와 비슷한 성향을 가졌던 것이었죠. 재판 중에 그는 히틀러의 항변을 듣고 "이런 애국자가 있다니"라며, 무제한 항변권을 보장해 주었다고 하네요.

당시 히틀러 뿐 아니라 유사한 생각을 가졌던 이들이 꽤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히틀러를 지지한 이들이 다 무차별 학살까지 지지한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총통이 된 후 (선전선동을 통해) 나치당의 지지율은 44%선까지 나오고 연립가능한 정당지지율을 합치면 70%대를 넘어갔으니, 광기의 독재자 한 명 때문에 2차 대전이 일어났다고 보기에는 다소 어려울 것 같군요.


3) 국회 방화 사건을 틈타 전권을 얻게 된 히틀러


감옥에서 일찍 출소했으나, 1차대전 패배의 충격이 점차 줄어들면서 히틀러 당의 인기는 시들해져 갔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인기가 부활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1930년 "대공황"이었습니다.

살인적인 물가상승과 실업으로 서민들은 집을 팔아야 했고 거리로 나앉는 이가 속출하게 됩니다. 이때 소수의 유대인들이 금융을 장악하고 있던 독일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불만이 급속도로 커져 갑니다.

힘들 때 도와주기는 커녕, 더욱 돈장사를 하고 헐값에 부동산을 사 추후 회복시 되팔려 했던 것이죠. 유대인들은 "터전"이 없다보니, "돈"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돈"만 있으면 고위인사들을 구워삶아 자신들의 "터전"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죠.

이런 혼란 속에 "공산당"의 지지율이 무려 17%에 달하고, 히틀러 당도 최대 37%대의 지지율을 얻게 됩니다.

집권세력의 한덴베르크 대통령은 히틀러를 견제하다가, 정권의 안정을 위해 하는 수 없이 그를 총통(=총리)으로 임명합니다.

히틀러는 명망있었지만 80세 가까워 노쇠화된 한덴베르크 대통령을 내세워서 안정감과 무게를 유지하는 한편, 실질적 내각실권자로서 입지를 굳히며 숨겨왔던 독재 본능을 부활시키려 합니다.

당시 독일에는 비상 사태시, 총리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하는 "전권위임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의회민주주의의 느리고 복잡한 절차를 생략할 수 있는 법이 있었는데요. 물론, 의원 2/3의 찬성이 있어야 하기에 쉽지 않아, 살인적 물가를 잡을 때 한 번만 발현됐던 법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이 법을 성공시키기 위해 총선거를 공고하고 자신들을 지지해 줄 것을 계속 설파하게 되는데요. 1933년 3월 5일 총선거를 앞둔, 2월 27일 일이 터집니다.

22.png
<1933년 2월 27일, "루페"의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루페"라는 공산주의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국회 곳곳에 불을 지른 것이었죠.

이를 듣고 달려 온 히틀러와 괴링, 괴벨스 등은 "공산주의자"의 소행이라면서 언론에 발표한 뒤 공산당 지도부들을 긴급 체포했습니다. 이로 인해 공산당 의원들은 등원을 하기도 어려운 형국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선거를 치뤘음에도 지지율은 50~55%정도로 2/3에는 히틀러 세력이 모자랐습니다. 이에 히틀러는 지금 이 법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부활하고 있는 공산당이 활개를 쳐 소련처럼 노예화되게 된다는 것을 더욱 설파하여, "독일 중앙당", "독일 국가인민당" 등의 지지까지 얻어내면서 원하던 "전권위임법"을 결국 통과시키게 됩니다.

그 후에는 뭐 아시다시피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지요.

사실상 독일 공산당의 해체를 가져왔던 1933년 2월 27일의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은 독일의 공산화를 막은 장점은 있었지만, "전권위임법" 통과를 수월하게 만들어 히틀러가 나치 독일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부작용이 심각했습니다.

물론, 찬성표를 던지던 의원들이 단지 독일의 부활과 공산화 방지를 바랬던 것이지, 히틀러가 그렇게까지 극도의 학살자로 변모해 갈 줄은 몰랐을 수도 있겠죠.

시대 분위기상 어쩌면 위 방화사건이 없었더라도 "전권위임법"은 결국 통과될 여지도 있었을 겁니다만, 다소 지연되었을 것이고, 공산당을 해체시키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참고로 이 방화사건은 논란이 좀 있습니다. 과연 "루페"라는 공산주의자 혼자 방화가 가능했겠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여 실은 괴링/괴벨스 등이 기획한 것이라는 설까지 말입니다. 실제로 이 기획에 참여했던 10여명의 당원들이 이를 폭로하려는 과정에서 결국 숙청되었다는 소문도 있다고 하네요. 히틀러는 공산주의자를 극도로 싫어했지만, 그들에게 "선전선동"만큼은 철저하게 배워서 연설마다 온갖 제스처를 사용하며 활용했다고 합니다.


333.png

이렇게 3가지 사건이 없었다면, 특히 첫번째와 두번째 사건이 없었다면 과연 평범한 화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가, 비록 군대에 입대했다하더라도 집권자 나아가 독재자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드네요.

최근 아래 포스팅과 연관성은 크지 않습니다만, 같이 보시면 좋습니다.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6: 작곡자 만큼이나 콧대 높았던, 하지만 냉정히 볼 필요가 있는, 『독일인의 노래 』

감사합니다.


333.png

관련 연재 글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1: 의외로 잘 모르는 3가지 『애국가』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2: 백악관이 불타던 그 때 태어난 『미국 국가』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2-2 : 『미국 국가』의 자유 vs 『자유의 여신상』의 자유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3: 작사자도 결국 숙청당한 『중국 국가』 & 모택동의 망언들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4: 한국과도 인연 깊은, 비운의 『대만(=중화민국) 국가』

책 한권의 엄청난 나비효과: 태평천국의 난 (19세기 최대 군사분쟁)

한 순간의 엄청난 나비효과: 동북아 역사의 물줄기를 튼, 1936 서안(西安) 사태

한 순간의 엄청난 나비효과: 동북아 역사의 물줄기를 튼, 1936 서안(西安) 사태 (2)

미국을, 어쩌면 세계 판도를 바꾼, 단 한 장의 문서: 「스페셜오더 191」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5: 아직도 해가 지지 않은 『영국 국가 』

3.3운동을 3.1운동으로 바뀌게 한, 어쩌면 3.1운동을 못하게 만들 뻔한 한 장의 인쇄물 & 이를 두고 엇갈린 두 남자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6: 작곡자 만큼이나 콧대 높았던, 하지만 냉정히 볼 필요가 있는, 『독일인의 노래 』


Sort: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1차대전 패전이후 경제위기에 힘든 독일에서 탄생한 히틀러는 어쩌면 그당시에 꼭 필요할수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많은사람에게 피눈물나는 상처를 준 인물이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사람은 그런역사를 부끄러워할줄 아는 국민성을 가졌더라구요... 일본이 위안부를 부정하듯이 우리도 베트남전쟁 참전은 그냥 경제발전이라 생각하는 부끄러운 역사가 있듯이요.. ^^ 무지 늦게 주무시네요... 아님 벌써 일어나신거....^^

평일은 일찍 일어나는 편이에요. 미국 장마감 시황도 확인하고 ㅎㅎ 미리 대강 써놓은 것 올렸어요. 말씀하신 독일 국민성에 대한 부분은 이 글 링크에서 제가 사견 포스팅한 것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히틀러 관련 역사를 쉽게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해요
잘 읽고 갑니다

네 저도 뭐 공부 차원이니 가볍게 봐주세요.
감사합니다. 건강 잘 챙기세요^^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몰랐던 사실들이 제법 많네여

감사합니다^^

날이 너무 덥습니다......덥다 ㅠ

히틀러에 관한 글 굉장히 저도 관심있게 많이 봤는데 저는 주로 음모론 위주로 봤었거든요! ㅋㅋㅋ 되게 제 스타일의 글이 많네요 ㅠㅠㅠ너무좋아요 자주올게요!! 소통해용 흐흐

네 1945년에 안 죽었다 썰 등 많더군요.
감사합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21
TRX 0.20
JST 0.034
BTC 98914.40
ETH 3374.27
USDT 1.00
SBD 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