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어쩌면 세계 판도를 바꾼, 단 한 장의 문서: 「스페셜오더 191」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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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당시 북부연방군 군가 中, "We'll fight for uncle s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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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북전쟁(1861~65) 발발, 앤티텀 전투(1862.9.17) 직전 정세


① 남북전쟁 발발

노예제도의 존속을 놓고 수십여 년간 쌓여 온 북부와 남부 사이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습니다. 유럽 이민자들이 몰려와 공업을 부흥시키면서 자본주의를 중시하며 빠르게 성장한 북부는 자유 노동력, 보호무역을 중시하였던 반면, 그보다 먼저 미국에 들어와 노예를 데려다 농업을 일으킨 남부는 노예제도, 자유무역을 중시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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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정치적 타협을 통해 갈등을 가라앉혀 왔으나, 1850년대부터는 정당정치가 혼란에 빠지자 그마저 힘들어지고, 결국 분열된 4개 당이 참여한 대선에서 노예제도 폐지를 외쳤던 공화당의 링컨이 당선되자, 남부연맹은 독립을 목표로 미국연방을 탙퇴하게 되고, 결국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정치가 무너진 곳에 큰 혼란이 오는 법이지요. 잠수함까지 등장시킨 4년간의 대혈투였습니다.


② 앤티텀 전투(1862.9.17)를 앞둔 정세

자본력 및 인구에서 앞섰던 북부연방군은 압도적인 군력을 바탕으로(※ 당시 병력 전체규모는 북군 약 200만, 남군 약 100만 추정), 남부연합의 거점인 리치몬드를 비롯한 곳곳을 침공하지만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됩니다. 남부지역은 우수한 장교들이 많아 일당백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록상 남군 1명당 북군 1.5명 정도의 사상자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북군 누적사망자 수는 약 36만, 남군 약 25만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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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군 사령관 로버트 리(좌), 북군 사령관 토니 멕클레런(우)>

그렇게 1년반 쯤 흐르자, 남군의 사기가 올라가면서 오히려 북부를 제압할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요. 남부의 로버트 리 장군은 부대를 작게 나누어 기동하여, 워싱턴D.C. 를 둘러싼 메릴랜드 주 전역을 빠르게 점령하고, 위쪽 필라델피아, 뉴욕까지 점령한다면 영국과 프랑스가 최소한 남부의 독립을 승인할 것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대를 각 장군별로 나눠 여러 경로로 이동하면서 메릴랜드 곳곳을 점령하기로 하는데요. 이것은 적은 수로 남군을 나누어 빠르게 움직여가도, 북군의 맥클레런 장군은 과거 전투들에서 먼저 나오지 않던 점을 감안한 선택이었습니다. 보통은 병사가 더 많은 북군 입장에서 방어 위주로 해도 버티기 좋은데 선뜻 먼저 나설 필요는 없었겠지요. (바로 뒤가 북부 수도인 워싱턴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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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현재 워싱턴은 메릴랜드 주에 둘러쌓여 있지요. 저 곳곳을 소규모로 나누어 빠르게 기동하여 점령하여 워싱턴을 포위한 뒤 북부 공업도시까지만 진군하면 최소 독립 승인이 눈앞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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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북부 수도인 워싱턴과 남부 수도인 리치몬드는 코 앞에 있었습니다. 중간에 포토맥 강을 끼고 지켜야하는 북부연합군(=포토맥군이라고 불렸습니다.)과 포토맥강 방어선을 뚫고 워싱턴과 그 북부도시들도 전진해야하는 남부연맹군(=리치몬드가 버지니아 주였기에 버지니아군단이라고 불렸습니다.)과의 대치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북부의 맥클레런은 병력이 더 많음에도(=약 8만 대 4만 5천) 먼저 나서지는 못했습니다. 워싱턴 코 앞을 지키는 부담감, 지형적인 불리함, 매복의 우려 및 과거 패전의 경험에 따른 로버트 리에 대한 두려움 등이 복합작용 했겠지요. 포토맥 강 주변만 지키면 무리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 남부의 로버트 리 장군은 원래 남북전쟁 직전에는 북부연방에서도 사령관을 제의할 정도로 미국 연방 전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전쟁(=내전)도 싫고, 남부의 탈퇴도 싫다는 관점에서 이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고향인 버지니아 주가 연방탈퇴를 결정하고, 남부연맹에 합류하자 "나의 조국은 버지니아"라는 마음으로 군세가 불리한 남부연맹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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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 한장의 문서가 명암을 가른, 앤티텀 전투


① "로버트 리" 장군의 스페셜오더 191호, 분실되다!

메릴랜드 전역을 빠르게 점령할 계획이었던 로버트 리는 1862년 9월 9일, 주요 장군들에게 각자의 이동 경로, 중간중간 점령해야할 미션 등을 정한 특별명령(=스페셜오더) 191호를 지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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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글로 적힌 명령서인데, 이 안에는 부대별 이동 경로 및 지켜야 할 지침(=마을에 절대 피해를 주지 말 것 등)을 적은 것은 기밀 문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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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mericancivilwar.com>

이 문서의 내용 및 당시 양측의 실제 움직임을 경로화한 지도입니다. 너무 복잡하니까, 그냥 워싱턴과 리치몬드 사이에 포토맥 강을 기준으로 북군과 남군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남군이 4.5만이었던 부대를 2.7만, 1.8만으로 쪼개서 빠르게 움직여 메릴랜드 곳곳을 점령하고 워싱턴을 포위할 계획이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명령서 사본은 달랑 1장이었고, 장군들은 모든 장교들에게 돌려보라고 지시했지요. 그런데 하필 단 한 장인 특별명령 191호 문서를 장교 한 명이 분실하고 맙니다. (그래서 별칭은 로스트 오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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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이동하던 리 장군의 부대들이 먼저 지나간 캠프 자리에, 하필 북군도 몇일 후 캠프를 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미 남군 덕에 자리가 정돈되어 텐트치기 좋았겠지요.)

그곳은 우리로 치면 시골 변두리 도시였지만, 당시 사진으로 보면 이미 꽤 발달한 모습이었습니다. 유럽 소도시와 비슷한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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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그 중요한 특별명령 191호 문서를, 남군 장교 하나가 담배 3개피를 넣어 돌돌 말아가지고 있다가, 깜빡하고 놓고 간 것이었습니다.

세계대전 중의 주요 전투에서도 결국 암호를 읽은 쪽이 쉽게 승리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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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마침, 나흘 후 그 자리에 야영하던 북군 상병이 신기하게도 본 것이죠. 수상하다 느끼고 전달을 거듭, 북군 사령관인 멕클레런까지 이를 보게 됩니다. 그는 쾌재를 불렀습니다. 사실 유명한 리 장군과 남군의 사기가 부담스러웠거든요. 그는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첩보를 알고도 리에게 진다면, 은퇴하겠다"


② 남군의 패퇴로 끝난 앤티텀 전투(1862.9.17)

비밀문서 분실 후 나흘 만에 앤티텀 전투가 시작됩니다. 남북전쟁을 사실상 북군의 승리로 매듭지은 전투가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전투"라면, 북부의 수도 워싱턴을 위협하면서 상승세였던 남군의 기세를 크게 꺾은 것이 바로 "앤티텀 전투"라 할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적은 군사를 쪼개서 이동한다는 첩보를 거저 얻다보니, 북군의 멕클레런은 이마저도 의심을 했지만, 정찰 정황상 사실로 확신하고 전투에 나서게 됩니다. 적은 규모로 나눠 이동하는 각각의 남군을 각개 격파하려는 것이었죠.

기동경로가 걸린 남군은 궁지에 몰리게 되지만, 쿨하게 싸웁니다. 일단 지연전을 펼치면서 주력군은 리 장군 부대가 있는 곳으로 집결시켜야했습니다. 리 장군도 적은 부대지만 지형적 유리함 등을 앞세워 꾸준히 응전하며 갈라진 부대들이 도착할 때까지 버팁니다.


<앤티텀 전투 묘사 장면>

갈라졌던 남군 부대는 도착하는 대로 바로 앤티텀 전투의 전선에 투입됩니다. 그렇게 남군은 대규모 북군과 계속 버티며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지원군을 증원시키면서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하루 만에 남군 약 1만, 북군 약 1.2만명의 사망자를 냅니다. 당시 하루 사상자수로는 상당한 규모였습니다.


③ 링컨 대통령 vs 멕클레런 장군

북군도 상당한 추가병력을 증원받았으나, 멕클레런은 패퇴하는 로버트 리의 부대를 쫓지는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링컨 대통령은 맥클레런을 해임하게 됩니다. 어찌보면 수도 워싱턴이 위태로웠던 상황에서 남군을 패퇴시킨 성공적 전투였는데, 남군을 궤멸까지 시키지는 못한 것을 탓한 거지요. "멕클레런"의 분노는, 그를 1864년 민주당 대선후보로 만들어 링컨과 붙게 됩니다. 물론 55%대 45%로 그는 분패합니다.

과거에 이순신도 전투에 나가지 않아 백의종군 처벌 받은 적도 있었다지요. 사실 이 때 링컨은 내심 다른 계획이 있었습니다. 북군이 사실상 승리하면, 준비해놓은 "노예해방선언문"을 발표하고 싶었거든요. 전쟁이 2년이나 지속되고 북군/남군의 사상자가 늘어나는 것은 사실 링컨의 재선에 큰 부담이었겠지요.

후반부에 보여드리겠지만, 링컨 초선 때보다 재선 때의 전체 투표수가 65만표나 모자라게 됩니다. 남북전쟁은 거의 투표권있는 백인끼리 싸웠고, 북군 36만/남군 25만을 합쳐 최소 약 61만이 사망하였고 수많은 부상자를 낸 것을 감안하면, 투표수 65만표 감소는 대부분 죽었거나 다쳐서라고 가정하면 참 가슴아픈 일이지요.

이때의 노예해방선언문 내용을 보면, (북부 연방 경계지역의 노예 말고) 남부지역의 노예만 우선 해방시킨다던가, 해방된 남부 흑인은 북군에 입대할 수 있다던가 하는 사실상 전쟁의 승리를 위한 명분도 컸습니다. 또한 노예제도 폐지라는 큰 명분은 점차 국제 사회에서 북부연방의 지지를 높여, 프랑스 등과 교역하던 남부의 고립을 낳아, 결국 남군 물자가 크게 부족해진 것도 남부연맹 패배의 주 원인이 되었다고 하네요.

링컨은 결국 앤티텀 전투가 열렸던 1862년 9월 17일 전후에 노예해방선언을 하지 못하고, 전황이 여전히 불리했던 1863년 1월 1일에 가서야 간신히 노예해방선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내전 중에 남군이 관할하는 지역에 미국연방 대표라지만 사실상 북군 대표인 링컨의 이 선언은 상징적인 것이었지만, 국제사회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고 점차 흑인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전쟁을 그만두고 싶은 민주당 의원들까지 설득(혹은 영화에서는 매수도 서슴치 않음)하여 1864년 하원, 1865년 상원을 통과시켜 실질적 효력까지 발휘시키기에 이릅니다.

이로 인해 남부흑인들이 대거 북군에 입대하며 전세는 완전히 기울고, 원래 인구와 물자가 부족했던 남부연맹은 1865년 4월 9일에 최종 항복하게 됩니다.


※ 북부연방군 군가가 끝나신 분은 이해 차원에서 남부연맹군 군가도 들어보시죠. Dixie란 당시 남부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반대어는 그 유명한 Yankee(양키, 북부 사람들)입니다. 남부연합은 스타크래프트의 "테란"과 유사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남북전쟁 중 남부연맹군 군가, "To arms in dixie"(=남부에서 무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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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페셜오더 191」분실의 나비효과들과 교훈


① 남부가 독립했다면, 전 세계 판도가 꽤 바꼈을 것

남군의 기세가 피크였고, 북군의 수도가 위태로웠던 상황에서 단 한 장의 기밀문서가 어이없이 유출됨으로써, 전세는 대등해졌습니다. 물론, 그 문서의 첩보가 아니더라도 북군의 병력 우위가 커서 남군이 힘들었을 거라는 견해도 있습니다만, 조직력과 전투력이 높았던 남군에게 수도 워싱턴이 포위당하거나 함락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요.

미국에는 여기서 분실된 "로스트오더 191"이 당시 유출되지 않았고 전투도 이겨서 남부가 독립한 것을 전제로 쓴 가상의 역사소설(=역사 대체 소설)도 있다는군요. 그에 의하면, 미국은 21세기 현재도 남과 북으로 대립하고 있다고 하네요^^

이때 미국이 "하나의 연합 연방"인 "United States of America"로 통합되지 못하고, 남부가 독립하여 갈등을 지속했다면, 과연 지금의 국제 질서가 되었을까요? 20세기의 그 많은 세계대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2차 세계대전 중의 일본의 항복 및 대한민국의 독립은 있을 수 있었을까요?

북군이 밀렸다면, 과연 노예제도는 사라질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경제구조상 그렇게 흘러가는 분위기였기 때문에(=북부에서도 노동력 수요가 확대되어 흑인들이 대거 필요해짐), 결국 노예제도는 폐지되었겠지만, 아마도 상당기간 더 존속되었을 가능성이 있겠지요. 그랬다면 미국의 인권신장 속도는 지금보다 늦어졌을 겁니다.

북부 대부분 지역에서는 이미 18세기 후반에 노예제도가 폐지되었고, 남부마저도 최종적으로 1865년에 노예제도가 폐지된 미국조차, 흑인과 여성에 대한 투표권 제공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지요.

결국 남부 독립시, 미국은 전세계 곳곳의 여러 측면에서 지금만큼 영향력을 미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때의 「스페셜오더 191」의 우연한 분실이 없었다면, 미국 판도는, 어쩌면 세계 판도는 수많은 나비효과를 타고 완전히 달라졌을 일말의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순 없을 겁니다.

문서, 통신, 인증서, 코인 등 보안에 유의해야겠습니다.


② 링컨의 불행한 결말, 너무 많은 강적을 만들면 안돼

이 부분은 조금은 부수적으로 붙여 봅니다. 네트워크가 부족했던 링컨은 민주당계 정당들의 분열 속에, 초선 때는 불과 39%로 어부지리 당선 측면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더욱 노예제 폐지를 부르짖고, 자신의 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겁니다. 정당들의 분열로 인해 선거인단 수로는 압도적 당선이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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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위키, "1860년 미 대통령 선거 결과">

승전 및 노예제 폐지 등으로 재선 때는 55%를 얻으며, 좀 더 안정적으로 당선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재임 중에 내전이 나 수십만이 죽고 수백만을 다치게 한 대통령을 무조건 잘했다고만 보기 힘든 면도 있긴 합니다. 그래서인지 둘이 붙은 것 치고, 55%는 압도적인 레벨은 아니었던 듯 합니다. 특히 상대가 자신이 앤티텀 전투의 책임을 물어 해임한 민주당의 "멕클레런" 장군이었는데도 말이죠. 이때의 링컨은 사실상 "공화당"이었지만, 공식적으로는 더 확장된 공화당인 "국민연방당" 소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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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위키, "1864년 미 대통령 선거 결과">

  • 국민연방당 = 공화당 + 급진공화당 + 민주당 탈당파

급진공화당은 "흑인 투표권"까지 공약을 내걸었으니, 지금에서 보면 참 이름 그대로 급진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공화당"은 상상 이상으로 개혁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남부에 기반을 두었던 민주당에서 자발적으로 혹은 설득이나 매수를 당해서 공화당으로 넘어 온 민주당 의원들도 꽤 있었습니다. 이들로 인해 결국 노예제도폐지안이 통과될 수 있었긴 합니다.

왜 이런 이야길 꺼냈냐면, 링컨은 상당히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지만 그의 상황을 고려해 명분을 찾았던 것이지, 고매하게 명분을 쫓았던 것은 아니라는 측면이 있어서입니다. 정치란 것이 그런 것이겠지요. 그는 명분이 정당하다면 그 수단 측면에서는 합법 불법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때론 지나칠 정도로 독단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고 애썼던 면도 있구요. 전쟁의 혼란 속에 정치도 그만큼 혼탁했겠지요. 뭐 결국 어쩌면 링컨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이 서로 너무 강경해서, 타협을 못해 생기게 된 전쟁이라는 측면도 과도 있지만, 노예제 폐지 및 미국 통합을 지켰던 점은 분명 존중받을만 합니다. 이때부터 생겨난 흑인들의 압도적 지지세로 공화당은 1930년 대공황이 올 때까지 약 70여년 간 미국을 주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적도 너무 많이 만들었습니다. 사방이 (특히 남부에서) 적이었지요.

결국 재선에 성공했지만, 남북전쟁이 끝나고 불과 6일 만인 1865년 4월 15일, 연극 관람 중에 민주당과 남부연합의 지지자였던 배우 "존 윌크스 부스"에게 피격당하면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이 때의 너무 쉬운 암살에 대한 의문들이 제기되고는 합니다.

명분을 쫓는 것이 좋지만, 적을 너무 많이 만들지는 말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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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물 많이 드시면 더위에 좋답니다.

연관성은 없지만, 국가(國歌)로 보는 국가 "미국편(#2, 2-2)"의 번외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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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차에 도전하세요

그리고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그 하나의 문서가 세상을 이렇게나 바꿔버렸군요!ㅎㅎ

그럴 여지가 없었다고는 못하겠지요.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전쟁 이야기 좋아하는데, 정말 흥미로운 글입니다. ㅎㅎㅎ

감사합니다. 시리즈가 아래 링크에도 많습니다^^

재밌는 글 쓰시네요. 열심히 보겠습니다. ㅎㅎㅎ 감사합니다. ㅎㅎㅎ

감사합니다. 메인은 채권/주식/코인/스팀 등 투자 관련 글인데, 크게 바뀐 것도 없고 날도 더워 역사 공부하고 있네요^^

오호. 그것도 굉장히 관심가는 건데요. 역사도 좋아합니다. 근데 글이 전반적으로 퀄리티가 상당히 높으시네요. ^^;; 와. 잘 보겠습니다. ㅎㅎㅎ

그런 일이 있었군요 로버트리가 유명세에 비해 힘을 못썼다 햇더니 ㅎㅎㅎ

그쵸^^ 참 신기해요. 감사합니다.

로버트 리 장군의 로스트 오더..
재미있네요.

중요한 오더 였던 것 같은데,
오더를 조각내서 개별적으로 분리하고,
개별 오더를 복수의 전령을 통해서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하긴하네요.

나폴레옹의 워터루 전투에서도 비슷한 전령 에러 들이 일어났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오더의 신뢰성이나 방첩 역정보 등등 현실적인 여러 어려움들 때문에 그런 판단을 최선으로 생각했을 수 있겠군요.

암튼 로스트 오더를 북군 사령관까지 신속히 전달되게 하는 북군 시스템과
그 오더를 확인한 매클레런 장군이 위장 정보를 의심하면서도 병력이동을 확인하면서 진위를 판별하고,
조각난 남군을 개별 격파했다는 점이,

길게 가면 어쨓든 병력과 물자가 많고, 신중하고 철저한 쪽이 이기게 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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