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6 날 좋아해줘서 고마워

in #kr-novel6 years ago (edited)

커피숍에는 먼저 도착한 수지가 책을 읽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칼을 한쪽으로 늘어뜨린 모습이 지적으로 보였다. 내가 상상하던 여성의 모습을 완벽하게 갖춘 그녀와 친해진 것만으로도 꿈만 같은데 이렇게 고백까지 하는 날이 오다니 심장이 두근거려서 잠시 걸음을 쉬었다. 고백하기에 적당한 장소다. 조명이며 흘러나오는 음악이며 모두 사랑스러웠다.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짧은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길게 느껴졌던 시간이 왜곡되어 짧게만 느껴졌다. 심장박동이 더욱더 빨라졌다.

“어, 왔어?”

날 발견한 수지가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난 일단 분위기를 잡기 위해서 부드럽게 대화를 이끌기 시작했다. 식당 얘기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 얘기며 재밌는 에피소드를 섞어가며 일단 그녀의 기분을 좋게 해줬다. 내가 말할 때마다 까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중요한 말을 할 땐 타이밍이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듣는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듣고도 기쁘지가 않다. 기분을 살펴보니 매우 좋아 보였다. 그래 이때야!

“너 처음 온 날 생각난다. 지금처럼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쳐줬잖아.”

“맞아. 그날 너 말하는 거 정말 멋있었어. 반할 만큼.”

그녀가 눈을 더 크게 뜨며 말했다.

“나 그날 천사를 봤어. 내가 평생에 꿈에서만 보던 그 천사.”

“정말? 어디서?”

내 얘기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 이대로만 잘 끌고 가자.

“그날 그 주방에서. 그 천사 얼굴에 빛이 나서 눈이 부시더라.”

“그래? 난 아직 천사를 만난 적이 없는데 부럽네. 천사도 보고.”

내가 말하는 천사가 자신이라는 걸 아직 눈치 못 챈 것 같았다.

“나 사실은 그 천사를 보고 한눈에 반했어. 그리고 그날로 그 천사를 좋아하게 됐어.”

“혹시, 그 천사가 사람이야?”

그녀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응. 사람인데 마치 천사 같았어. 난 그날 이후로 행복해졌어. 내가 꿈에 그리던 사람과 가까워졌거든.”

“치, 질투 나네. 그 사람이 누구야?”

잠시 뜸을 들이고 눈을 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너!”

“나? 뭐야, 농담이지?”

다시 까르르 웃었다.

“진심이야. 그리고 나 내가 좋아하는 천사와 정식으로 사귀고 싶어졌어.”

수지는 가만히 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내가 말한 천사가 자신임을 안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수지야…….”

“응. 얘기해.”

수지도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말을 빨리하라고 독촉하듯이 반짝였다.

“나랑 사귈래?”

수지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커피를 봤다. 그렇게 침묵이 흘렀다. 오랫동안 대답을 하지 않아 답답하면서도 괜히 말을 꺼냈나 싶기도 했다. 지금처럼 친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이 행복마저 사라질 것 같아 조금은 두려워졌다.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게 부담스러워서 내게서 멀어질까 겁났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가만히 커피를 보다가 손으로 컵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입을 오므리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컵 속의 커피가 모두 사라지고 바닥이 보일 때가 돼서야 입을 열었다.

“고마워. 날 좋아해줘서.”

난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경주야, 나도 널 좋아해.”

아,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걱정과 불안함이 이 한마디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어둡기만 했던 내 마음에 햇빛이 비치듯 환해졌다. 내 주위로 꽃이 피고 향기도 나는 것 같았다. 계속 말을 이었다.

“경주야, 그런데 나 아직 준비가 안 됐어. 널 많이 좋아하지만 아직 자격이 없어. 지금처럼 친구로 더 있어줄래? 내 부탁이야.”

어떤 준비인지는 몰라도 그런 부탁은 별것 아니라 생각됐다. 날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수지가 날 좋아한다니, 세상을 다 가진 것만큼 행복했다.

“준비? 응. 네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어.”

“고마워.”

수지는 그때서야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눈물도 한 방울 나오려는 것 같았다.

“내가 더 고맙지. 나를 좋아해줘서.”

“경주야, 너 참 매력 있어.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내가 준비되기까지 오래 걸릴지도 몰라. 미안해.”

“괜찮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좋겠다.”

“지금처럼 내 옆에 있어주는 게 도와주는 거야. 그렇게 해줄 거지?”

“응. 그렇게 할게.”

비록 사귀기로 하진 못했지만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내 얼굴을 보며 살며시 미소 짓는 눈이 오늘따라 더 반짝였다. 나오려던 눈물이 눈을 적시어 더욱더 빛이 났다.

.

수지가 버스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숨을 크게 내뱉었다. 정말이지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혼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아, 이런 게 바로 사랑이구나. 한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건 신이 사람에게 준 특별한 선물인가보다. 사랑이라는 게 없었다면 삶이 어둡고 희망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사랑을 왜 하지 않고 여태 일만 하며 살았을까? 아마도 그녀를 만나려고 그랬겠지.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내게 했던 말들을 계속 되뇌었다.

버스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미안해하지 마. 난 지금 행복해.’

바로 답장을 보냈다.

‘행복하다니 다행이야. 그리고 이 세상에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내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에 더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수지에게 꼭 필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말하는 준비라는 게 무언지는 몰라도 내가 도와주고 싶어졌다. 힘이 되어주고 싶어졌다.

‘네가 내 앞에 나타나서 행복해. 수지야, 고마워.’

행복하다는 답장을 보냈다.

집으로 가는 길이 다르게 보였다. 늘 걷는 어두운 밤길이 오늘따라 환한 가로등 아래서 나를 반기고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또 미소가 지어졌다. 홀로 서 있는 가로등이 외롭지 않아 보였다. 어둠을 밝혀주는 가로등 아래를 걸으며 내 삶에 드디어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동안의 내가 어두운 밤길이었다면 그녀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천사는 가로등처럼 내 삶을 밝게 비춰주고 나의 외로움을 걷어갈 것이다. 드디어 나에게도 빛이 보였다. 사랑의 빛!

.

다음 날. 수지가 출근하지 않았다. 왜 출근하지 않았는지 지은이에게 물어보니 일이 있어서 못 나온다는 전화가 왔다고 했다. 수지와 한집에 사는 수애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수애와 말을 섞긴 싫었다. ‘오늘 출근 안 했네. 무슨 일 있어?’라고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 답답해졌다. 매일 보던 수지가 보이지 않으니 허전하기도 하고 걱정도 됐다. 수지에게 생긴 일이 큰일이 아니길 바랐다.

점심때가 되어도 답장이 오지 않자 속이 타들어 갔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밥은 먹었을까? 여러 가지 걱정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아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이런 불안한 내 모습이 보였는지 점심을 먹다 말고 지은이가 물었다.

“야, 너 무슨 일 있냐? 표정이 왜 이리 어두워?”

“어? 아냐. 아무 일도.”

수지 생각에 빠진 내 표정이 어두워 보였나보다.

“에이. 아무 일도 아닌 게 아니구만. 수지랑 연락 안 돼?”

“어? 어. 문자했는데 답장이 없네.”

“야, 전화해야지. 밥 다 먹고 전화해서 점심은 먹었냐고 물어봐.”

“어. 그래. 그래야겠다.”

“야, 경주야. 아니다.”

“응? 응.”

지은이가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묻지는 않았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옥상으로 올라가서 수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이 꺼져있다는 친절한 안내가 흘러나왔다. 괜히 전화해봤다. 하지 말 걸.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걸 확인한 후라 더 불안해졌다.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퇴근 때가 되어서야 문자가 날아왔다.

‘답장이 늦어서 미안해. 갑자기 일이 생겨서. 나 내일도 출근 못해. 오늘 네가 참 많이 보고 싶다.’

‘괜찮아. 답장 늦을 수도 있지.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다.’

바로 답장을 보냈다. 문자를 받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는 몰라도 내가 많이 보고 싶은 하루였다는 문자에 종일 불안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문자 한 통이 이렇게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게 신기했다.

휴대폰은 다시 울리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다시 문자 하나를 보냈다.

‘수지야, 나도 오늘 네가 많이 보고 싶더라.’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가만히 보기만 했다. 퇴근할 준비도 안 하고 멍하니 있는 나를 본 막내는 어디 아프냐고 물어봤다. 하나 둘 모두 주방을 나갔다. 마무리하느라 가장 늦게 퇴근하는 막내도 나간 빈 주방에 가만히 있었다. 별로 집에 가고 싶지가 않았다. 늘 내 옆에서 조잘거리던 수지가 없는 단 하루가 이렇게 외로울 줄은 몰랐다. 내일도 없다고 생각하니 오늘을 끝내기 싫어졌다.

그때서야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바로 문자를 확인했다.

‘한잔합시다.’

젠장. 수애다. 평생 도움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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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뭔가 꿈틀거리는 느낌이네요 ㅎ 뒤에 글이 공감갑니다 문자 한통으로 안심이 된다는 그 느낌 상대를 진심으로 좋아해야만 가능한 감정이죠

이런 느낌 경험 있으시군요. ^^

잼나게 잘 읽었어요. ㅎㅎ

아핫,,, 고맙습니다. ^^

^^ 재미있네요~
나중에 모아서 책한권 가즈아~~~
응원할게요~^^

전자책으로는 이미 냈는데,,, 언젠가는 종이책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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