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9 반짝이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

in #kr-novel7 years ago (edited)

다음 날 점심. 결혼 어쩌고 하던 지은이의 표정을 살폈지만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뭘 빤히 쳐다보냐며 이상하다고 말하는 지은이에게 별일 아니라고 대충 얼버무렸다. 점심을 먹는 동안 자연스레 어제 만난 소개팅 남자에 대해 말하리라 생각했는데 아무 말 없었다.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내가 결국 먼저 물어봤다.

“뭐 하는 사람이래?”

“그냥 회사원.”

“회사는?”

“대기업.”

지은이는 귀찮다는 듯 간단하게만 대답했다.

“돈은 잘 벌겠군. 뭐가 마음에 들었어?”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얘기하는데 잘 맞더라. 취미도, 관심사도, 좋아하는 것도.”

“축하해. 잘해봐.”

“그러려고.”

지은이에게서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나 표정을 찾지 못했다. 자신의 얘기를 하면서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대답하고 있었다. 묵묵히 자신의 밥을 떠먹는 모습에서 기쁘다는 그 어떠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러냐? 남자가 애프터를 안 했어?”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짧게 대답하던 지은이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째려봤다.

“까부네. 넌 다 좋은데 여자 마음 모르는 게 흠이야. 으이그, 어쩔래?”

지은이가 주먹을 불끈 쥐고선 나를 때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내가? 야, 여자 마음을 알면 여자지 남자냐? 걱정을 마라. 내 짝도 어딘가에 있겠지.”

“이 멍충아, 짝은 가까운 곳에 있는 거야. 멀리서 헤매면 네 다리만 아프거든! 헤매고 헤매고 또 헤매봐라. 그러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후회하게 될 테니까.”

지은이가 요즘 갑자기 철학적인 말을 한다. 책을 많이 읽더니 책바보가 되었나?

“가까이? 우리 식당 여직원 중에 결혼한 사람 제외하면 한 30명 되나? 알바생까지 해서.”

“밥이나 처먹어.”

지은이는 밥이나 처먹으라는 명언을 내뱉고는 밥을 폭풍흡입 해댔다. 다 먹었으니 먼저 일어나겠다며 자신의 식판을 들고 나가버렸다.

.

지은이가 왜 저러는지 종일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내가 잘못한 걸 생각해내느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는 직접 물어보려고 1층으로 가봤지만 지은이는 일찍 퇴근하고 자리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생각하고 자려고 누워서도 생각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혹시 옛 사진을 보면 생각날까 싶어서 야유회 때마다 찍은 사진들을 정리해둔 앨범을 꺼냈다. 내 직장생활 8년이 이 앨범 안에 들어있었다.

몇 장을 넘기자 지은이 사진이 나왔다. 어깨보다 살짝 내려오는 머리 길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 지은이가 처음엔 머리가 저 정도였지. 아무리 기억력이 나쁘다지만 지금까지 잊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왜 짧게 잘랐을까? 냉면에서 머리카락 나온다는 말이 지겨워서 잘랐다는 게 아니라면 진짜 이유가 있을 텐데 더 이상은 생각나지 않았다. 난 지은이 말대로 친구가 될 자격이 없나보다. 친구라는 놈이 친구에 대한 기억도 제대로 못 하니 말이다.

.

수애와 마주칠 일이 없는 평온하고 지루한 날들이 이어졌고 3월이 되었다.

출근을 하면 그날 팔아야 할 채소들을 썰고 냉면 육수와 냉면에 들어갈 다진 양념을 확인했다. 오전시간을 대충 때우고는 지은이와 함께 점심을 먹고 휴게실에서 TV를 봤다. 저녁때가 되면 바쁜 부서들의 일을 도왔다. 후배 양성이라는 핑계로 잔소리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지난번 대파사건으로 골탕 먹인 민수에게 칼질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특별히 더욱더 많은 잔소리 선물을 쏴줬다. 처음엔 불평을 하더니 내 고집 꺾은 사람이 없다는 전설을 어디서 들었는지 잠자코 내 잔소리 선물 보따리를 받기만 했다.

“조금 나아진 것 같군. 따다다닥 따다다닥.”

“경주 형의 칼질소리를 따라 하려면 얼마나 수련을 해야 하나요?”

하도 잔소리를 했더니 이젠 아부도 조금 늘었다. 요망한 민수다.

“수련이라…. 음…. 넌 수련을 해도 못 따라와.”

“아 진짜. 형, 너무하네. 죄송해요 죄송해. 내가 그날 대파 대충 썰어서 죄송하다고요.”

이 세상에서 내 고집 꺾은 사람은 주방장 빼고는 아직 단 한 명도 없지.

“그렇지? 잘못했지? 민수야, 이 형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줄게.”

“아이고 황송해라.”

2층 준비팀 조리사들이 모두 모여 있기에 한 마디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다들 모인 김에 한마디 할게. 하던 일 멈추고 주목.”

말은 참 잘 듣는다. 내 말에 모두 하던 일을 멈췄다.

“요리는 말이야, 종합예술이야. 왜 음식 맛은 손맛인지 알아? 여기서 말하는 손맛은 정성이거든. 최상의 재료로 요리를 해도 정성이 빠지면 맛이 없고, 먹을 수나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의 최하품으로 요리를 해도 정성이 가득하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되는 거야. 칼질을 할 때 대충 두드리는 거 내 눈엔 다 보여. 사랑하는 사람에게 만들어줄 음식재료라고 생각하고 썰어봐. 그렇게 대충 썰 수 있어? 크기만 일정하면 잘 썰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있는데 한마디로 까주지. 그럴 거면 기계로 썰지 왜 팔 아프게 직접 썰어? 왜 기계로 썬 채소와 직접 사람이 썬 채소의 맛이 다른지 알아? 손맛이 빠졌기 때문이야. 손맛은 정성이고 정성은 사랑이거든. 앞으로는 칼질을 할 때도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해라. 그럼 칼질소리가 아름다워질 테니까."

내가 말해놓고도 멋지다. 난 요리만 잘할 뿐 아니라 말도 잘 한다는 걸 새롭게 깨달았다.

“오! 형님, 그거 누가 한 말이에요?”

역시 민수의 반응은 불 보듯 뻔했다. 말을 곱게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내가 한 말이다.”

뒤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내 유창한 말을 듣고 박수를 친 사람이 누군지 뒤돌아보니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 박수를 치고 있었다.

어깨보다 살짝 밑으로 내려오는 머리칼에 키는 나보다 조금 더 작고, 꼬집어주고 싶은 볼에 작은 입술. 그리고 큰 눈.

“와! 멋있어요, 조리사님.”

그리고 상냥한 목소리.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는 그녀는 내가 그동안 그토록 기다리던 이상형과 일치했다. 그녀의 얼굴 주변은 마치 뒤에 태양이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환하게 빛났다. 내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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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연재 소설을 올리고 계셨군요! 흑 벌써 8 편이 올라왔네요.
설레임 가득한 러브 스토리 인가봐요. 정말 가까운데 있었네요 ㅎㅎ

이미 출간한 책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요즘 한 권도 안 팔려서요. ^^

드!!! 드디어!!!
이 소설의 히로인 등장인건가요!!!!

앗,,, 드디어 남주의 이상형이 등장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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