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9 미안해. 나 밉지?

in #kr-novel6 years ago (edited)

퇴근 시간이 되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틀 못 봤는데도 많이 보고 싶었다. 이런 게 좋아하는 감정일까? 나이 서른둘에 이제야 누군가를 좋아하는 내가 신기하기만 했다.
퇴근 무렵 지은이가 문자를 보냈다.

‘수지 만나냐?’

‘어떻게 알았어? 수애에게 들었어?’

‘다 아는 수가 있지. 요즘은 네가 내 친구인 게 짜증 나.’

지은이의 문자에 깜짝 놀랐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짜증난다고 말한 걸까? 잠시 최근의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헛, 내가 왜?’

‘재수 없어. 친구만 아니었다면 발로 차버렸을 거야.’

내가 요즘 지은이에게 소홀하긴 했다. 수지에게 정신 팔린 데다가 수애와 신경전으로 지은이에게 관심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짜증난다고 말한 걸까?

‘앗, 미안.’

‘됐고, 수애한테 너무 그러지 마라. 너는 참 착한데 눈치가 없어서 문제야.’

내가 잘못 짚었다. 수애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짜증났던 거다.

‘눈치? 내가 좀 그렇긴 하지.’

‘좀이 아니라 심각해.’

눈치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터라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답장을 확인하자마자 지은이가 전화했다.

“응. 문자는 좀 불편하긴 하지. 타자가 익숙지 않아서.”

전화를 받자마자 너스레를 떨었다.

“이 멍충아, 넌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어. 내가 널 좋아한 것도 모르지? 이 바보야.”

“나를?”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다. 그냥 잘 통해서 오랫동안 좋은 친구로 우정을 쌓던 것뿐이다.

“그래 이 멍충아. 근데 지금은 아니야. 잠깐 그랬지. 처음에 식당 왔을 때 말이야.”

“아…… 그랬구나.”

오래전, 지은이가 내게 관심을 보이고 서로 친해진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 내가 친구로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걸로만 알았다.

“지금은 아니야. 널 좋아하는 사람은 참 답답하겠다. 내가 그 마음 다 알지. 나도 그랬으니까.”

“수지가 답답하다고 그래?”

“지랄하네. 수지 아니거든. 내가 요즘 너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끊어.”

말을 마치자마자 정말로 끊어버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짐작을 할 수 없었다. 누가 답답하다는 걸까? 에잇, 모르겠다. 퇴근이나 해야지.

.

약속장소엔 수지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수지가 앉아있는 자리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서 좋았다.

“별일 없었어?”

내가 먼저 물었다.

“응. 걱정해준 덕분에.”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가볍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때 수지가 먼저 본래 하려던 말을 꺼냈다.

“경주야, 네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 잘 알아. 나도 네가 좋아. 그런데 조금은 불편해.”

사귀자는 말을 한 것 때문인가 보다.

“응. 지난번에 내가 친구로 옆에 있어달라고 한 말 기억하고 있어.”

수지가 살짝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 사실은 결혼할 사람이 있어. 이제야 말해서 미안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 허무함이 아니라 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약혼자가 있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수애는 수지에게 약혼자가 있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했기에 별일 아니라고만 생각했었다.

“어, 그렇구나.”

왜 과거형으로 말했던 걸까?

“미안해. 이제야 말해서. 나 그이를 기다리기로 했거든. 그런데 기다리다가 힘들어서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봐.”

난 아무 말 없이 계속 듣기만 했다. 아니, 할 말을 못 찾고 있었다.

“경주야, 예전에 네가 누굴 많이 닮았다고 말했던 거 기억나?”

누군가를 닮았다는 말을 하긴 했었지만 잊고 있었다.

“응. 기억나.”

“네가 그이를 많이 닮았어. 정말 너무 많이 닮았어. 그래서 내가 잠시 혼동했나 봐. 미안해.”

“그랬구나.”

“미안해. 나 밉지?”

밉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머릿속이 공허했다.

“아니야.”

“고마워. 우리 그래도 절친이지?”

“그럼. 절친이지.”

난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가짜 웃음이라고 티가 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고마워.”

“궁금한 게 있는데, 약혼자를 기다리고 있다면 어디 멀리 간 거야?”

“응. 아주 멀리 갔어. 하지만 돌아올 거야. 난 그렇게 믿어.”

더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간 건지, 왜 간 건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수지가 스스로 말해주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는 대화 없이 각자의 커피만 만지작거렸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 침묵을 깬 건 수지였다.

“나 오늘 집 앞까지 바래다줄래? 우린 절친이잖아.”

“응. 그래. 우린 절친이니까.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그러는 건 당연한 거지.”

나는 억지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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