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4 채썰기의 생명은 편썰기

in #kr-novel6 years ago (edited)

하나는 확실해졌다. 수애가 미쳤다. 피해야지.

“내가? 왜?”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니, 말해도 믿지 않을 거예요. 처음엔 경주 씨가 이유도 없이 미웠어요. 제가 미워하는 그 사람과 많이 닮았거든요. 내게 큰 상처를 주고 가버린 그 놈이 자꾸 생각나서 경주 씨에게 차갑게 대했어요.”

지난번에 수지와 수애가 말했던 날 닮았다는 그 사람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요?”

“어리석었어요. 아무 죄 없는 경주 씨에게 그럴 필요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성질 부렸으니까요. 같이 몇 달 지내보니 참 착한 사람이라는 게 보였어요. 내가 또 다칠까 봐 칼을 다루려고 하면 꼭 옆에 붙어 있으라고 민수와 무철이에게 부탁한 거 알아요. 일할 때의 모습은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어요. 경주 씨가 칼질을 할 때면 멋있어서 나도 모르게 멍해지곤 해요. 저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가 봐요.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경주 씨가 멋있어 보인다는 거예요.”

수애가 제대로 미쳤다. 예수라는 분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했다는 건 들어봤지만 원수를 멋있게 보라고까진 안 했을 텐데.

“난 당신에게 멋있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요. 내게서 칼질 배우려는 수작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돼요.”

“수작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아요. 사실이니까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었다.

“갑시다. 집에 갈 줄 알죠? 택시 잡을 줄도 알죠? 난 이만 갑니다.”

수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나를 부르지도 않았다.

술집을 나와서 터벅터벅 걸었다. 머릿속이 조금은 복잡해졌다. 수애가 내게 멋있다고 말했다. 어떤 뜻일까? 단순히 내가 멋있다는 걸까? 아니면 설마 내가 남자로 멋있다는 것? 에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아니지, 정말 미친 거라면 가능하겠지. 모르겠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냥 잊어버려야겠다. 수지에게만 집중해야지.

수지를 생각하자 그녀의 부탁이 생각났다. 동생 잘 챙겨달라는 부탁이 떠오르자 술집에 그대로 있을 수애가 생각났다. 젠장. 설마 혼자 있진 않겠지. 진작 택시 타고 집에 갔겠지. 걱정하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 걱정됐다. 술도 마시지 않았으니까 알아서 잘 가겠지 생각하다가도 수지의 부탁을 생각하면 모른 척할 수도 없어서 발길을 되돌렸다.

술집에 도착해서 보니 앉았던 자리는 이미 치워지고 없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괜한 걱정을 했다. 다시 술집을 나오는데 젠장, 수애가 입구에 서 있었다.

“돌아올 줄 알았어요. 헤~”

수애는 말도 안 되게 해맑게 웃었다. 아, 완전히 당했다.

“뭐 두고 간 게 있어서 온 거거든요. 착각하지 마세요.”

“저를 두고 갔잖아요.”

“아니거든요. 쳇.”

괜히 와봤다. 사람은 역시 선택을 잘해야 한다. 그냥 집으로 갔어야 했다.

걷기 시작하자 옆으로 수애가 따라붙었다.

“추워라. 밤이 되니까 갑자기 추워졌어요. 이럴 땐 보통 남자가 외투를 벗어주던데.”

“저기요, 혼자 미치세요. 난 정상인이거든요. 내가 미쳤어요? 왜 외투를 벗어줘요? 미운 사람에게?”

“내가 언제 벗어달라고 했나? 혼자 흥분하긴.”

뭐야 이 여자? 대꾸하기도 싫어서 못 들은 척 해버렸다.

걷는 속도를 올렸다. 그러자 수애가 총총걸음으로 바로 따라붙었다. 속도를 더 올렸다. 수애도 따라 속도를 올렸다. 뭐야? 자존심도 없어? 내가 슬슬 뛰자 수애도 따라 뛰었다. 갑자기 재밌어졌다. 그래서 전속력으로 뛰었다. 이젠 못 따라오겠지? 한참을 뛰다가 뒤돌아보니 수애가 열심히 뛰며 따라오고 있었다.

“같이 가요.”

“싫어요.”

대답하고는 다시 뛰었다.

큰길가로 나오자 한산한 거리엔 헤드라이트를 켠 차들이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봄이 오는 시기였지만 밤바람은 차가웠다. 한차례 바람이 불자 기분 나쁘게 추웠다. 주위를 둘러보며 택시를 찾아봤다. 보이는 택시가 없어서 아쉬웠다. 이때 택시라도 한 대 있어야 타고 도망을 가는데. 수애는 곧 내가 있는 곳까지 뛰어왔다.

“헉헉, 무슨 남자가 이래? 같이 좀 가요. 왜 뛰어요?”

숨을 가쁘게 쉬는 모습이 웃겼다. 그러게 왜 내 옆에 붙어서 걸으려고 그래?

“하나만 물어봅시다. 내가 왜 멋있어 보여요?”

“그거야 나도 모르죠. 내가 아무래도 미친 거 같아요. 나도 내가 이해되지 않아요. 헤~”

수애는 가쁜 숨을 참아가며 대답했다.

“참 안타깝다. 어린 나이에, 쯧쯧….”

멀리서 택시가 한 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손을 흔들어 택시를 세웠다. 타려고 문손잡이를 잡았다가 ‘그래도 수지 부탁인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수애를 불렀다.

“먼저 타고 가세요.”

“오! 멋있어. 역시 착한 사람이었어. 헤~ 고마워요.”

젠장. 실수했다.

수애는 택시를 타고는 창문을 내려서 미소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난 그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두 번 다시는 수애와 술을 먹지 않으리라고 다짐 또 다짐했다.

.

다음 날, 출근하자 탈의실에서 만난 무철이가 자기만 빼놓고 놀았다며 투덜대고 있었다.

“무철아, 인생이란 그런 거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배신을 때리는 거지.”

“형님, 형님이라도 저를 불렀어야죠.”

“야 인마, 난 네가 당연히 수애와 먼저 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

무철인 입을 삐죽 내밀었다. 단단히 삐친 모양이다.

“참, 무철아. 수애 잘 보살펴줘라. 요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거 같더라. 젊은 나이에 안 됐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자세한 건 몰라도 돼.”

대충 대답하고는 2층 주방으로 내려갔다.
수애가 오늘 썰어야 할 채소들을 미리 닦아서 작업대에 준비해놓고 있었다. 부주 맞아? 그날 사용할 채소들은 주로 막내들이나 연차가 적은 조리사들 몫이다.

“배우려는 자세가 돼 있네. 좋아, 오늘 내가 당근 채썰기를 알려주죠.”

“정말요? 헤~”

수애가 내 앞에서 자꾸 웃는다. 정신병 초기증상인가?

“채썰기를 하려면 일단 편썰기를 먼저 해야 해요. 얇게 편썰기를 한 다음에 채썰기를 하기 때문에 채썰기의 생명은 바로 요 편썰기지요. 일정한 두께로 편썰기를 해야 채가 예쁘게 나오거든요. 고른 두께로 편썰기를 하는 기술이야말로 최고의 기술이에요. 편썰기만 잘 하면 칼질 고수가 될 수 있거든요. 일단 당근으로 편썰기 연습을 하면 난이도가 가장 높은 무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거예요.”

“네. 편썰기. 명심 명심.”

이건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도 아니고 ‘우리 부주가 달라졌어요’라고 해야 하나? 미친 사람치고는 보기 좋다. 그래 계속 미쳐있어라.

“당근은 둥글잖아요. 굴러가지 않게 왼손으로 잘 잡고 칼을 위에서 아래로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힘으로 지그시 눌러야 해요. 칼을 앞뒤로 움직이면 두께가 일정하게 잘리지 않아요. 이게 바로 편썰기의 핵심이에요. 당근이 굴러가지 않게 왼손으로 잘 잡는 게 초보들에겐 어려워요. 그래서 한쪽 면을 살짝 잘라서 평평하게 만들어주면 좋아요. 이제 안 굴러가겠죠?”

수애가 내가 한 대로 따라했다. 당근의 한쪽 면을 조금 잘라내 평평하게 만들었다.

“칼질을 할 땐 왼손을 항상 조심해야 해요. 내 손가락이 어디어디에 있는지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어야 해요. 잠깐이라도 잊어버리면 지난번처럼 다치거든요. 되도록이면 손가락을 오므리세요. 자, 이렇게.”

내 손을 보여주며 손가락을 오므린 채로 어떻게 당근을 잡는지 보여줬다.

“그리고, 자세를 저처럼 왼발을 정면으로 내놓고 몸을 최대한 수직으로 만드세요. 그리고 칼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세요. 당근과 칼, 눈이 수직이 되도록요. 칼을 무서워하지 말고 그 자세에서 칼을 슬며시 들어 당근 위로 올리세요.”

수애 칼 위치를 보니 당근의 두께조절이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말고 조금만 더 바깥쪽으로.”

“이렇게요?”

수애가 칼을 조금 더 바깥쪽으로 옮겼다.

“아니, 그렇게 말고.”

난 답답해서 수애가 손에 쥔 칼을 옮겨 위치를 바로잡아줬다. 그리고 시선이 칼 바로 위로 가도록 등을 살짝 앞으로 밀어줬다.

“몸을 조금 더 앞으로. 익숙해지기 전까진 손과 칼, 채소의 위치를 눈으로 익히세요. 힘들더라도 그 자세를 유지하고 칼에 힘을 주고 편썰기를 해보세요.”

말을 하고는 시범을 보였다. 내 당근은 얇게 썰렸지만 수애의 당근은 반 정도 썰리다가 부러졌다.

“잘 하고 있어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계속 해보세요.”

수애의 편썰기는 두께도 일정하지 않고 엉망이었다.

“힘이 동일하게 들어가지 않아서 그래요. 처음 힘과 나중 힘이 똑같아야 두께가 동일해져요. 그리고 칼을 수직으로 세워야 두께가 동일해요. 눈을 칼과 수직 되게 놓고 칼의 움직임을 놓치지 말고 주시하세요.”

수애는 여전히 힘 조절을 하지 못했다. 잘 되지 않아도 계속해서 편썰기에 집중했다.

“힘 조절은 계속 훈련하면 나아질 테니까 오늘 이 당근 모두 편썰기 하세요. 내가 채썰기 할게요.”

조금 썰다가 수애의 칼질을 가만 지켜보니 두께가 너무 엉망이었다. 이 정도면 손님상에도 나가기 힘들다.

“거참, 정말 못 봐주겠네. 힘 조절이 그렇게 안 돼요?”

“네. 어려워요.”

수애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도움을 청했다. 수애가 칼을 무서워한다는 게 생각났다. 그래선지 조금 더 자세하게 가르쳐주고 싶어졌다. 힘 조절을 알려주려면 칼을 쥔 수애의 손 위에 내 손을 얹고 힘의 정도를 알려줘야 한다. 수애의 손을 잡기는 싫지만 칼 공포를 없애주기 위해선 이 방법을 써야 할 것 같았다.

“딱 한 번만 알려줄게요.”

난 말을 마치고는 수애 옆으로 바싹 붙었다. 그리고 칼을 잡은 수애의 오른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내 왼손은 당근을 잡고 있는 수애의 왼손 위에 얹었다. 젠장, 진짜 영화 찍는 자세다. 남자후배들에게 가르쳐줄 땐 이상한 자세라고는 차마 생각지도 못했던 자세였다. 수애의 머리칼에서 나는 샴푸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젠장, 향이 좋았다.

“자, 이렇게.”

수애의 오른손을 잡고 당근 편썰기를 시작했다.

“힘을 조금만 빼세요. 어허, 칼을 무서워 하니까 힘이 많이 들어가잖아요.”

하나하나 썰려질 때마다 조금씩 나아졌다. 당근 하나를 다 썰고 두 번째 당근을 잡았다.

“얼마만큼의 힘이 들어가는지 알겠죠? 처음에 힘이 많이 들어가던 걸 좀 덜어주니까 잘 썰리죠? 이번엔 수애 씨가 손을 움직여 봐요. 내가 감을 보게.”

확실히 나아졌다. 역시 내가 만들어낸 교육법은 최고였다. 칼질 초보자에게 그 어렵다는 당근 편썰기를 한 시간 만에 감을 익히게 해줬다.

“어, 두 분 이제 화해한 거예요?”

언제나 말을 곱게 하는 민수다.

“야, 네 일이나 해.”

“수지 누님이 이 장면을 보면 뭐라고 말하려나.”

내가 저 녀석 입을 꿰매버릴 것이다. 기필코.

“저, 저기, 경, 경주 씨. 보는 사람도 많은데 이제 제 손을 놔도 될 것 같아요.”

젠장, 여태 수애 손을 잡고 있었다. 미친 사람 옆에 있으면 같이 미치나 보다. 정신 차려야지.

빠르게 자세를 풀었다. 주위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둘러보니 모두들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민수만 빼고.

“민수야, 너 이리 와봐.”

“왜요?”

“왜요 라니, 선배가 오라면 와야지.”

“에이, 가면 때릴 거잖아요.”

“알면서 맞을 짓은 왜 하는데?”

“형, 너무하네. 수지 누님 좋아하면서 왜 남의 여자 손은 잡고 그래요? 제가 웬만하면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무철이 형을 위해서라도 못 본 척할 수가 없잖아요.”

“저기, 민수 씨. 무철이와 나는 그냥 친구에요. 오해 같은 거 안 했으면 좋겠어요.”

가만히 당근을 썰던 수애가 말했다.

“니들은 일을 입으로 하냐?”

주방장이 주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나타나는 타이밍이 막장드라마 수준이다.

수애가 편썰기 한 당근을 발견하곤 자세히 봤다.

“부주, 이거 직접 썬 거야?”

“네. 경주 씨랑 영화 한 편 찍고 나니까 실력이 갑자기 늘었어요.”

“뭐? 영화?”

“아, 주방장님 그런 게 있어요.”

내가 수애 대신 대답했다. 칼질을 빨리 가르쳐주려 했던 내 행동을 후회했다.

“얼마나 보기 좋으냐. 두 사람 앞으로도 이렇게 친하게 지내면서 열심히 해봐.”

“네.”

수애만 대답했다.

.

이 세상에서 소문보다 빠른 건 없나 보다. 점심을 먹고 1층으로 내려갔을 땐 오전에 2층 주방에서 있었던 일을 이미 모두 알고 난 후였다. 내 얼굴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애와 화해한 거냐고 물었다. 내가 민수를 가만 놔두면 사람이 아니고 개다. 이 자식은 일은 안 하고 싸돌아다니면서 헛소문만 내고 다녔나 보다.

“막내야, 지금 당장 민수 이리로 끌고 와.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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