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5 수고했어요

in #kr-novel6 years ago (edited)

곳곳에 개나리가 보이고 벚꽃도 올라오는 걸 보니 봄이 오긴 한 것 같은데 바람은 매섭게 불었다. 공허한 내 마음에 구멍이라도 낼 심산으로 바람은 나만 따라다니며 더욱 차갑게 불었다. 사람은 누구나 꽃을 보면 봄을 타는가 보다. 매년 출근길에 보이는 꽃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올해는 다르게 보였다. 수지와 친해져서 늘 행복할 거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이유가 뭘까?

분명 수애 때문일 것이다. 어쩌다가 저런 여자가 나타나서 내 인생을 꽈배기 꼬듯 꽈놨는지 모르겠다. 요즘은 조용히 자기 할 일만 하고 내게 시비를 걸거나 말대꾸도 하지 않아서 오히려 불안하다. 내가 나쁜 놈이 되어가는 것 같다. 수애가 저렇게 나오는데 내가 계속 미워하는 게 옳은 건지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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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애의 표정은 이 식당에 출근한 이후 가장 밝아졌다. 출근하면 콧노래를 부르며 채소를 물로 씻고 열심히 칼질을 했다. 칼질에 제대로 재미를 붙였다.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지 않아서 좋았다. 이렇게 편할 줄 알았다면 진작 가르쳐 줄걸.

수애가 애호박, 오이, 당근 등을 썰 동안 나는 1층에서 수지와 수다를 떨었다. 수지는 자신이 할 일을 서둘러 끝내고는 점심손님이 오기 전까지 주방에서 나와 노는 걸 좋아했다. 수지와 나는 주방장도 없고 눈치 주는 사람도 없는 1층 주방에서 오전 내내 수다 떨며 놀았다. 식당 안에 수지와 내가 친하다는 소문도 나선지 주방장도 알면서 모르는 척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예 맘 놓고 수애에게 오늘 할 일을 알려주고는 종일 1층에서만 일했다. 물론 무철이를 2층으로 올려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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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나에 대한 소문 들은 거 있어?”

내가 먼저 수지에게 물었다.

“소문? 무슨 소문?”

“뭐 아무 소문이나.”

“음, 우리 식당 조리사들 중에서 칼질을 가장 잘한다며?”

“그거야 당연한 거고.”

“그래? 그럼 어떤 소문이 있을까?”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내가 먼저 말해야겠다. 수지도 나를 좋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말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널 좋아한다는 소문이 식당에 쫙 나서 모르는 사람이 없더라.”

말을 마치고는 수지의 눈치를 살폈다.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서 수지의 입술에 시선이 고정됐다.

“아, 그 소문? 들었지. 그런데 틀린 소문 같아.”

틀렸다고? 뭐야? 나 수지 좋아하는 거 맞는데. 아무래도 내가 성급했다. 아, 조금만 더 시간을 가지고 말할걸. 아니면 분위기 좋은 카페라도 갔어야 했나? 퇴근 시간이 늘 밤 10시니까 퇴근 후에 따로 차를 마시자고 하기도 미안해서 기회만 보다가 결국 실수를 해버렸다.

“그래? 뭐, 소문이야 원래 왜곡되는 거니까. 하하하.”

틀린 소문이라는 수지의 말에 멋쩍어서 크게 헛웃음 소리를 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내가 수지를 좋아하는 마음을 알아줬으면 해서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게 생겼다.

“응. 틀렸어. 내가 좋아하는 거거든.”

갑자기 심장이 멈춰버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했다. 놀라서 수지의 얼굴을 보니 수지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환히 보이는 큰 눈이 반짝거리며 나를 끌어당겼다. 부끄러워선지 자연적으로 고개가 숙여졌다. 아니, 심장이 떨려 수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서 시선을 피했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여자에게 이런 고백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어? 어, 그, 그래.”

말문이 막혔다. 소문을 핑계로 좋아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수지가 먼저 해버렸다. 분위기 좋은 카페는 아니더라도 사람이 없는 곳이거나 단 둘이 있는 곳도 아니고 조리사들이 득실득실한 주방 구석에 앉아서 말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이런 내 모습이 재밌는지 수지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너 귀엽다. 나, 갈게. 이따가 점심때 보자.”

“어? 응. 그, 그래.”

나는 일어나는 수지에게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바보. ‘나도 좋아해.’라고 했어야지.

수지가 주방에서 나가려는데 입구에 수애가 서 있었다. 얘는 왜 내 인생에 자꾸 끼어들고 난리야?

“뭐야 두 사람? 신성한 직장에서 연애하는 거야?”

수애가 수지를 째려보며 모두 들었다는 뜻으로 말했다. 뭔가 특종을 알아낸 기자의 야심 찬 얼굴 같았다.

“다 들었어? 미안.”

수지는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사과를 했다. 신성한 직장에서 연애하는 게 사과할 일이었나?

“됐어, 가봐. 나한테 사과할 필요는 없어.”

수지가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도 궁금했지만, 수애가 1층 주방에 나타난 이유가 더 궁금해졌다.

“열심히 칼질 연습이나 할 것이지 여긴 웬일이에요? 다 썰었어요?”

“당연하죠. 내가 이제 경주 씨보다 칼질 더 잘할 걸요? 이렇게 일은 안 하고 팽팽 놀기만 하면 실력이 썩지 않겠어요?”

수애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별걱정을 다 하네요. 나는요, 당신하고 달라요. 내 칼질 실력은 절대 썩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근데 무슨 일로 내려왔어요?”

“다 썰었어요. 이제 뭐 할까요?”

수애는 내 대답을 들으려고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미소까지 지어서 부담스러웠다.

“별걸 다 물어보네. 다 했으면 쉬세요. 푹 쉬세요.”

“냉면 육수 만드는 거 언제 가르쳐줄 거예요?”

“내가 날마다 하는 거 봤죠? 그게 전부에요. 내일부터는 직접 해보세요. 됐죠?”

이제 칼질은 마스터 했다는 건가? 적어도 6개월은 날마다 썰어야 익숙해질 텐데 욕심도 과하다. 하긴 냉면기술을 모두 배우겠다고 했으니 급할 만하지.

“경주 씨는 말로 안 해도 다 알아요? 그런 분이 참 눈치도 없으시네.”

“뭐라고요? 내가 무슨 눈치가 없어요? 나 눈치 빠른 사람이에요.”

“됐고요, 말로 좀 설명해줘요. 매일 보긴 했어도 아무 말도 안 하고 혼자 해서 제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잖아요.”

사람 괴롭히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냉면 육수 만드는 거 두어 번만 봐도 따라 하겠구만 별걸 다 물어보네.

“머리 좋죠? 제가 쭉 말할 테니까 잘 외우세요. 냉면 육수 한 통에 동치미 두 바가지 반. 야채육수 만들 땐 파 적당히, 양파 적당히, 마늘 적당히, 생강 적당히. 간을 할 땐 포도당 가루 적당히. 소금은 짜지 않게. 잘 들었죠? 끝.”

“네? 적당히가 얼만큼이에요?”

“늘 봤으면서 적당히가 얼만큼인지 몰라요? 파 두 주먹, 양파 두 개나 세 개, 마늘 한 주먹 생강 반 주먹.”

대충 말해도 좀 알아들어라. 귀찮다.

“주먹? 제 손이 경주 씨보다 작으니까 경주 씨 한 주먹이면 저는 한 주먹 반?”

“그러시든가.”

“아, 뭐에요. 늘 그렇게 일했어요?”

“네. 내 방식이니까 배우기 싫으면 말든가.”

“아니 아니에요. 경주 씨 방식대로 배울게요.”

수애가 왜 저럴까? 내가 수애 입장이라면 자존심 상해서라도 ‘에잇, 안 배워.’라고 할 텐데. 수애는 노트에다가 내가 말하는 대로 열심히 적었다. 자신의 손을 펼쳐보더니 내게 손을 펴보라고 말했다. 그 정도쯤은 어려운 게 아니라 펼쳐 보였더니 내 손바닥에 자신의 손을 대고 손의 크기를 비교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지만 여자 손이 닿자 느낌이 이상했다. 자기 손이 작다며 이번엔 내게 파를 한 주먹 잡아보라고 말했다. 대충 잡아서 보여줬더니 몇 개인지 세보는 것이다.

“어려워요. 양파는 두 개나 세 개면 두 개에요? 세 개 에요?”

“큰놈은 두 개, 중간치는 세 개.”

“얼마나 커야 큰놈이에요?”

참 귀찮다. 그냥 대충 크다고 생각되면 큰놈이지.

“주먹 쥐어봐요. 수애 씨 주먹은 작으니까 수애 씨 주먹만 한 건 중간치. 내 주먹만 한 건 큰놈.”

수애가 한숨을 쉰다. 그러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댄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표정이 재밌다. 수애가 날 괴롭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수애를 괴롭히는 것 같았다. 설명을 다 들은 수애는 자신이 냉면 육수를 만들어 보겠다고 말하고는 올라갔다. 파는 내 손으로 두 주먹, 양파는 내 주먹만 한 크기로 두 개. 오늘 수애가 어떻게 육수를 만들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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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때가 되어 지은이, 수지와 함께 밥을 먹으러 올라갔다. 찬모장도 소문을 들었는지 이제 더는 지은이에게 내가 아직도 프러포즈 안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수애가 있나 살펴보니 그곳에 없었다. 밥을 벌써 먹고 내려갔나? 아니면 육수 맛이 잘 안 나서 헤매고 있나? 혼자 육수 만드느라 끙끙거리고 있을 수애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참 못된 놈인가 보다. 수애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니.

점심을 다 먹을 때까지도 수애는 나타나지 않았다. 걱정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수애가 있는 2층 주방으로 내려갔다. 역시나 수애는 주방에 있었다. 팔짱을 끼고는 육수를 가만히 째려보고 있었다. 고민이 가득한 사람 마냥 가만히 서 있었다. 내 발소리를 듣고서야 날 발견한 수애의 얼굴이 언제 심각했느냐는 듯이 밝아졌다. 그러더니 실실 웃는다. 미쳤나?

“경주 씨, 맛 좀 볼래요? 나, 잘한 것 같아요.”

“잘했겠죠. 천재 김경주 님이 가르쳐준 건데.”

난 살짝 거드름을 피우며 국자를 하나 들고 육수 통으로 다가갔다. 국자로 냉면육수를 휘휘 젓고 조금 떠서 맛을 봤다. 내가 한 맛과 똑같았다. 대충 가르쳐 줬는데 어떻게 똑같은 맛을 냈을까? 칼질에는 소질이 없어도 맛을 내는 재능은 있네.

“잘했네요. 수고했어요.”

말을 하고는 그냥 주방을 나가려고 뒤돌아서자 수애가 불렀다.

“경주 씨, 고마워요.”

“뭐가요?”

고개를 돌려 수애를 보며 물었다.

“수고했다고 말해줘서.”

별꼴이다. 그게 왜 고마운 건지.

“고마울 일인가? 앞으로 자주 해줄게요.”

“정말요?”

좋아서 어찌할 줄 모르는 수애를 보니 괜한 말을 했나 싶기도 했다. 나는 수애를 괴롭혀야지 기분 좋게 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그 말을 해서 수애 기분을 좋게 했는지 후회했다. 어쩌랴 이미 내뱉은 말을. 앞으로는 수애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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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도 나는 1층 주방에서 일했다. 주방장은 1층 주방에 있는 날 보고는 왜 여기서 일하느냐 물었다. 수애에게 일을 빨리 가르치려고 일부러 혼자 일하게 놔뒀다고 핑계를 댔지만, 내가 수지를 좋아한다는 소문에 식당에 다 퍼졌다면 주방장도 알고 있을 터라 일부로 속아주는 것 같았다. 일하는 내내 틈만 나면 주방 앞에 서서 내게 조잘거리는 수지와 어떻게 하면 정식으로 사귈 수 있을까만 궁리했다. 이미 내게 좋아한다고 고백해버린 수지에게 사귀자는 말을 안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수지야, 일 끝나고 우리 차 마실까?”

“응? 좋지. 음, 요 앞에 커피숍에서 우리 수다 떨자.”

수지는 신이 난다며 빨리 퇴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드디어 퇴근 시간. 나는 세수도 다시 하고 머리도 새로 만지고 옷에 향기 나는 섬유탈취제도 뿌렸다. 나보다 먼저 퇴근한 수지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금방 달려가겠다고 답장을 하고 거울을 봤다. 기분이 좋아서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보였다. 그래, 오늘 고백하는 거야. 내가 꿈꾸었던 연애 시작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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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소설은 30회가 마지막이지만, 반응이 적어서 20회까지만 연재하겠습니다.
20회가 완료된 후엔 다른 소설로 연재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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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하네요... 부럽다 ㅎㅎㅎ..

부럽죠? ㅎㅎㅎㅎㅎ

소설 잘 읽었습니다. 심리 묘사가 섬세하네요.
대단하세요.....

아핫,,, 칭찬 고맙습니다. ^^

오늘도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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