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8 내 짝도 어딘가에 있겠지?

in #kr-novel6 years ago (edited)

새로운 2층 생활이 시작됐다. 수애가 없는 2층은 평화롭기만 했다. 조용한 2층 준비팀에서 내가 할 일이라고는 냉면 재료를 준비하는 일뿐이다. 지금은 2월, 냉면은 팔려봐야 하루에 300여 그릇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빈둥거리거나 겨울에 바쁜 전골부와 탕부 일을 도와줬다.

냉면은 5월이 돼야 팔리는 양이 늘어난다. 그러다가 6월이 되면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하루에 많게는 2천 그릇을 팔기도 한다. 냉면이 가장 많이 팔리는 시기는 6, 7, 8월이다. 세 달 동안 죽어라 일해야 하는 게 냉면부의 숙명이다.

한여름에 냉면부에서 일하면 살도 많이 빠진다. 지금까지 일하면서 여름 냉면부에서 한 달에 5kg씩 빠진 사람도 봤다. 더운 여름 뜨거운 냉면 가마와 동고동락 하다 보면 살 빠지는 거야 어쩔 수 없다. 냉면부는 이렇게 힘든 부서다. 그래서 냉면부에는 뚱뚱한 사람이 없다. 살이 쫙쫙 빠지기 때문에 찔 겨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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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2월의 냉면부에서 내가 할 일이라고는 후배들 가르치는 일이 전부였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배우는 자세로 일하겠다고 말했지만 특별히 더 배울 건 없다. 이미 모든 걸 배웠으니까. 조리사들이 열심히 칼질하고 있어도 옆에서 구경하며 잔소리나 했다.

“칼질소리 봐라. 아름답지가 않잖아. 내가 그렇게 가르치든?”

“에이 형님, 칼질소리가 아름다워서 뭐 하게요?”

말만 하면 늘 삐딱하게 대답하는 3년차 조리사 민수다.

“야 임마, 난 칼질소리만 들어도 채소가 똑바로 썰리는지 삐뚤게 썰리는지 다 알아.”

“뻥치시네. 부주에게 그렇게 말 해봐요. 뭐라고 할지 궁금하네. 낄낄낄.”

“뭐라고? 이 자식이. 야, 수애는 내가 여자라서 봐준 거야.”

내 말이 끝나자마자 조리사들이 키득거렸다.

“형님의 뻥은 믿을 수가 없네요. 제가 부주에게 고대로 전달해줄게요. 여자라서 봐줬다고요. 낄낄낄.”

어쩜 저렇게 곱게도 말할까.

“민수야, 칼질소리 똑바로 안 낼래? 따다다닥, 따다다닥.”

저 녀석은 미운 말만 골라서 한다. 그래서 내가 저놈에겐 기술을 안 가르쳐 줬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녀석이니 그냥 놔두는 수밖에.

갑자기 주방장이 들어왔다.

“너나 잘하세요.”

“앗, 주방장님. 저기, 애들 칼질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겠어요. 영 소리가 아름답지가 않아요.”

“지랄하네. 너 저기 있는 대파 전부 썰어놔. 어디 네 칼질 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가 들어보자.”

“주방장님도 참. 제 칼질 소리야 옥구슬 굴러가듯 맑고 청량하죠. 하하하하.”

“염병하네. 그렇게 잘난 놈이 초짜 부주 못 이겨서 이리로 도망쳤냐?”

이런, 내가 도망친 걸 이미 알고 있었다니.

“아, 주방장님 제가 도망친 게 아니라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왔잖아요.”

“애들 일하는데 옆에서 잔소리하는 게 초심이냐? 닥치고 저 대파 다 썰어놔.”

제자 마음도 몰라주는 주방장님, 저 많은 대파를 혼자 다 썰려면 오늘 종일 썰어야 한다고요. 내 인생의 걸림돌 수애, 정말 밉다. 어떤 일에든 수애가 꼬이면 엉망이 된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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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을 받았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작년처럼 지은이에게 점심을 사주기로 했다. 팔에 쥐가 나도록 파를 썰다가 주방장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옷을 갈아입고 외출 나왔다. 지은이는 오늘 쉬는 날이라서 먼저 레스토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식당은 주말과 휴일에 가장 손님이 많아서 평일에 돌아가면서 쉰다. 식당에 일하면서 휴일에 쉬어본 적이 거의 없다. 토요일에 쉰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한다. 조리사로 산다는 건, 남들 쉬는 휴일에 쉬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날마다 밤 10시에 퇴근하고, 토요일과 휴일에도 출근하니 여자를 사귈 시간도 없다. 그래서 선배들은 대부분 중매결혼을 했다. 나는 결코 중매결혼은 안 할 것이다. 꼭 연애결혼 해야지. 나는 미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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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같은 휴일에 내가 너랑 밥을 먹어야겠냐?”

지은이는 날 보자마자 불만이다.

“예쁘게 입고 왔네.”

“너 여기 안 지겹냐? 너랑 여기 온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네.”

“여기가 가깝고 맛도 좋잖아.”

특별한 날이 아니면 치마를 잘 입지 않는 지은이가 치마를 입고 나왔다. 아직 봄이 오려면 멀었는데 옷도 많이 얇아졌다.

“아직 추운데 왜 그렇게 얇고 입고 나왔어?”

“응. 소개팅 있어.”

세상에 남자는 나 하나면 족하다며 남자를 멀리하던 지은이가 소개팅을?

“소개팅? 웬일이야? 남자는 관심 없다며.”

“싫다는데 친구가 딱 한 번만 해달라고 졸라대서 말이야. 두 번 다신 말을 꺼내지 않는다는 약속 받고 딱 한 번만 해주려고.”

기분이 조금 묘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소개팅 소식이 기뻐야 할 텐데 이상했다.

“뭐하는 사람이래?”

“그건 안 물어봤어. 친구가 지 페이스북에 나랑 찍은 사진을 올렸나봐. 3개월을 졸랐다더라.”

“네가 맘에 들었나 보네. 그 남자 사진은 봤어?”

“아니, 차만 마시고 헤어질 거야. 내가 말했잖아, 내 인생에 남자는 너 하나면 족하다고.”

또 시작이다. 나는 친구지 애인이 아니잖아.

“내가 네 애인이냐. 나 하나면 족하게.”

“애인은 아니지. 내 초콜릿이나 받아먹는 친구지. 너는 왜 여자친구 안 만들어? 너도 여자는 나 하나면 족하냐?"

“야 야, 농담하지 마. 나는 말이야 내 이상형을 기다리고 있거든. 운명 같은 만남 말이야. 첫눈에 반하는 그런 여자를 만날 거야.”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 난 첫눈에 반하는 그런 사람과 사랑을 할 것이다. 단 하루라도 안 보면 잠을 못 이룰 정도의 열정적인 사랑을 할 것이다.

“이상형? 지겹다 지겨워. 아직도 이상형 타령이야? 나이가 서른이 넘어도 아직 애네.”

“아직도라니, 우리 청춘이야.”

어깨보다 살짝 밑으로 내려오는 머리칼에 큰 눈, 키는 나보다 조금 더 작고, 상냥한 목소리에 작은 입술, 꼬집어주고 싶은 볼 그리고 작은 손. 그리고 착한 마음씨. 이게 내 이상형이다. 거창하지도 않은데 아직 이 사람이라고 할 여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하기야 종일 주방에만 처박혀 있으니 만날 기회도 없지.

“그래서 내가 머리를 짧게 자른 거야. 네 이상형 타령 듣기 싫어서. 계속 기다려 봐라. 언젠가 나타나겠지.”

“음식에서 머리카락 나왔다는 말이 듣기 지겨워서 잘랐다며.”

“넌 그 말을 믿냐? 순진하긴. 넌 아직 나를 몰라. 친구라는 게 참 자격이 없다. 널 내 친구에서 탈락시켜야겠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자기 속마음은 말하지도 않으면서 자기에 대해서 잘 모른다니, 억울했다. 나도 멋진 친구가 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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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와 점심을 먹고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주방장은 없었다. 그리고 파도 다 썰려 있었다. 분명 후배들이 썰어놨을 것이다. 역시 내가 후배들 교육은 잘 했다니까.

이렇게 오늘 하루도 지나고 퇴근할 무렵이었다. 화가 잔뜩 난 주방장이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다시 1층으로 내려가라고 경고를 했다. 파를 후배들이 썰어놨다는 걸 들킨 것이다. 그때서야 썰려진 파를 보니 크기가 뒤죽박죽이었다. 크기가 제각각인 파를 보고 내가 썬 게 아니라는 걸 눈치 챈 것이다. 주방장은 눈치 9단이다. 속일 수가 없다. 쉽게 속이려 했던 내가 바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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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소개팅은 잘 했냐? ㅋㅋㅋ’

바로 답장이 왔다.

‘맘에 드네. 나도 더 늦기 전에 시집가야겠어.’

오늘 처음 만났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게 제정신인가 싶었다.

‘축하해. 나보다 먼저 가겠네.’

답장이 없기에 옷을 갈아입고 식당을 나섰다.

1층에는 수애와 무철이가 남아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보기에 좋아 보였다. 마치 한 쌍의 연인처럼. 갑자기 무철이도 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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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짝도 어딘가에 있겠지? 그래, 있을 거야. 어딘가에. 내 짝도 곧 나타나겠지? 그래, 언젠가는 나타날 거야. 첫눈에 반하는 그런 운명 같은 사랑이 내게도 찾아올 거야. 그래, 언젠가는 찾아올 거야. 그 사람도 지금 외로워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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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팔했어요. ^^

잘 읽었습니다. 어떻게 주방 생활을 이렇게 묘사하실수가 있는지 ㅎㅎㅎ
저는 아무래도 냉면부에 3개월간 가있어야겠습니다. 5킬로를 가져가주십시오. ㅎㅎㅎ

냉면부에서 일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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