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3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in #kr6 years ago (edited)

나는 6개월 동안 설거지를 하고서야 1층 주방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조리를 배울 수 있었다. 1층 주방은 조리팀이라서 늘 바쁘고 체력 소모도 심하다. 이를 악물고 힘든 1층 생활을 2년 동안 버텨냈기에 2층 주방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어렵게 올라온 2층 준비팀에서 드디어 요리를 배웠다. 칼질과 양념 등 진짜 요리를 배운 것이다. 미친 듯이 배웠다.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각오로 쉬는 시간도 없이 남들보다 한 시간이라도 더 열심히 칼질을 했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남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 내가 할 일을 서둘러 마치고는 다른 부서 일을 도왔다. 부서장들은 이런 내가 기특하다며 자신의 기술들을 아낌없이 가르쳐줬다. 이렇게 노력한 덕분에 입사 4년 만에 역사상 처음으로 최연소 냉면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8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 계단씩 밟아서 이 자리에 왔는데, 수애는 한 번에 낙하산으로 착륙했다. 젠장!

.

저녁 6시, 전쟁 시작이다. 이 시간부터 손님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물냉 합이 열네 개, 비냉 합이 열 개, 회냉 합이 여섯 개. 물냉 두 개 먼저.”

수애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한참 전쟁 중인 저녁시간 때는 홀도 주방도 시끄러워서 크게 소리 지르지 않고는 들리지 않았다.

“막내야, 물냉 합이 열세 개.”

난 일부러 틀리게 외쳤다.

“냉면장, 열네 개라고요.”

원래 저 자리는 한 달 전만 해도 내 자리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당연히 내 자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아니다. 이게 다 수애 때문이다. 내 자리를 뺏어간 수애.

“뭐라고요? 열세 개?”

“열네 개. 안 들려요?”

물론 일부러 그러는 거다. 내가 이렇게라도 괴롭혀야 스스로 그만둘 테니까. 제발 나갔으면 좋겠다. 이제 수애 목소리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오려고 한다.

“무철아, 들려? 난 도통 저 가냘픈 목소리가 들리질 않는다.”

무철이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내 눈치만 봤다. 하늘같은 선배와 예쁜 수애 사이에서 심히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귀먹었어요?”

“막내야, 쟤가 뭐래?”

왜 이렇게 힘든 주방에 와서 사서 고생인지 모르겠다. 그 정도 배웠으면 돈 많은 남자 골라서 시집이나 가면 될 것이지 왜 피부 망가지게 땀 흘리며 고생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수애 피부 걱정을 하는 건 진심이다. 저렇게 성격이 더러우니 얼굴이라도 예뻐야 시집을 갈 테니까. 그나마 얼굴이라도 예뻐야 더러운 성격이 가려지지 않겠나. 흐흐흐.

“네. 귀먹었느냐고 물어보는데요.”

눈치 없는 막내가 대답했다.

“아 젠장. 말하는 싸가지 봐라.”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주방에 갑자기 냉기가 흘렀다. 조리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내 눈치만 봤다.

“이봐요, 김경주 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

“귀는 내가 먹은 게 아니라 지가 먹었네. 못 들은 척하기는.”

똥그래지는 눈, 수애가 툭 하면 짓는 표정이다. 내가 시비만 걸면 저렇게 똥그랗게 눈을 뜬다. 워낙에 커서 평소에도 쏟아질 것 같은 수애의 눈이 똥그래지면, 정말이지 얼굴에서 눈만 보였다. 내가 눈 큰 여자를 좋아하지만 솔직히 저런 눈은 아니다. 저건 인간의 눈이 아니잖아.

“어이가 없네. 이봐요 김경주 씨, 나랑 해보자는 겁니까?”

화가 많이 났나 보다. 조금 전에 ‘냉면 열네 개’를 외칠 때보다 목소리가 더 커졌다. 진작 그렇게 크게 소리 질렀으면 내가 열세 개라고 장난치지 않았을 텐데.

“누가 할 소리! 지금 주문 밀리는 거 안 보여요? 식사 안 뺄 겁니까? 직장 장난으로 다니세요?”

수애는 내 말을 듣고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나랑 얘기 좀 합시다.”

수애는 말을 마치고는 뒷문으로 나가버렸다. 하루 중에 가장 바쁜 시간에 근무지 이탈이라니. 쯧쯧 저런 게 부주방장이라고 할 수 있나?

“무철아, 네가 음식 좀 빼라. 금방 들어올게.”

.

뒷문으로 나가니 수애가 벽에 등을 기대고 잔뜩 난 화를 죽이느라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한겨울이라 밤공기는 무척 차가웠다. 어제 내린 눈이 바닥에 쌓인 그대로 얼어 있었다. 언 눈을 밟을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애는 나를 보더니 주방 모자를 벗고 팔짱을 꼈다. 찬바람이 불자 수애의 머리칼이 가볍게 흔들렸다.

“할 말이 뭡니까? 추운데 빨리하고 들어가시죠.”

“내가 못마땅하죠?”

“추우니까 당연한 건 묻지 맙시다.”

“나이도 어린 게 부주방장 자리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러죠? 다 알아요. 나도 자존심 있는 요리사에요.”

말은 청산유수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그래서요?”

나는 일부러 얼굴을 구겼다. 워낙에 잘 생긴 얼굴이라 인상을 써도 착해 보이지만 강한 척해야 하니까.

“나랑 내기해요. 요리시합을 해서 경주 씨가 이기면 내가 조용히 이곳을 떠나죠.”

정신이 나갔구나. 지가 나보다 요리를 잘할 거라 착각하고 있다. 요리는 이론이 아니다. 학교에서 설마 음식 맛있게 하는 걸 배웠을 리는 없지 않은가? 자기 무덤을 파는 수애가 갑자기 불쌍해 보였다.

“그럽시다.”

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단, 제가 이기면 김경주 씨는 저를 상관으로 모셔야 해요.”

“네. 그러죠. 뭐, 당연히 그럴 리는 없겠지만요.”

사랑은냉면처럼s.PNG

** 다른 회차 보기 **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1 꼬인 내 인생이여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2 이 칼 말입니까?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3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4 수애 괴롭히기

(1) 소설은 주 5회 이상 연재하겠습니다.
(2) 완결된 소설은 리디북스에서 판매중입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31
TRX 0.12
JST 0.033
BTC 64341.19
ETH 3145.13
USDT 1.00
SBD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