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7 거북이처럼

in #kr-novel7 years ago (edited)

3층으로 올라가니 지은이가 식판을 두 개 들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음식에서 머리카락 나온다는 손님들 불만이 지겹다며 머리를 컷트로 자른 지은이는 남자같이 친한 친구다. 예쁘게 꾸미고 남자친구도 사귀라고 해도 남자는 나 하나면 족하다는 그런 친구다. 나는 친구지 애인은 아니잖아. 아무리 설득을 해봐도 소용없다. 책이 애인이라며 틈만 나면 독서질이다. 그래 책이랑 결혼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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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가 처음 출근한 날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날 보자마자 한 첫 말이 “동갑이니까 말 놀게”였다. 황당하긴 했지만 동갑이라서 말 놓는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냥 넘어갔다.

점심을 먹고 나서 휴게실에서 TV를 보며 쉬고 있을 때 지은이가 옆으로 와서 앉았다. 그리곤 내가 백합을 닮았다나? 하하하. 보통은 남자가 여자에게 꽃을 닮았다고 하지 않나? 웃기긴 했지만 사실 그땐 백합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그냥 어리둥절했다. 백합이 뭔지 모른다고 말하곤 무시해버렸다. 지은이는 TV를 보며 히히덕거리는 내 옆에서 열심히 백합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하든지 말든지 그냥 들은 척도 안 했다.

일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려고 주방에서 나오는데 지은이가 꽃을 들고 나타났다. 하얀 꽃이 정말이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지은이는 향을 맡아보라며 꽃을 내게 내밀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꽃 백합. 우린 그날로 바로 친해졌다. 지은이는 내게서 향기가 난다며 백합을 닮았다고 말했다. 종일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에게서 음식냄새만 날 텐데 향기는 무슨 향기.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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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와 함께 밥을 뜨고는 마주보며 앉았다. 지은이와는 6년 동안 이렇게 함께 밥을 먹었다. 서로에 대해서 잘 아는 세상에 둘도 없는 나의 소중한 친구 지은이. 식당 사람들은 우리 둘의 우정을 알고 있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찬모장만 빼고.

반찬을 만드는 찬모팀에서 가장 높은 찬모장은 우리 둘만 보면 언제 결혼할 거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친구라고 해도 둘이 잘 어울리는데 거짓말하지 말라고 한다. 찬모장의 결혼 타령을 하도 들어서 이젠 그냥 웃어넘긴다.

“지은이 왔어? 많이 먹어.”

다정하게 말하는 찬모장은 꼭 엄마 같다. 자식들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걱정해주는 엄마처럼 늘 식당 식구들 끼니를 챙긴다. 누가 밥을 먹었고 누가 밥을 안 먹었는지 모두 기억한다. 정말이지 딱 엄마다. 밥을 안 먹은 사람에게는 입맛이 없느냐고 따로 물어보고는 맛있는 걸 해주시기도 한다. 체하면 손가락도 따주시는 다정한 엄마 같은 분이시다.

“네. 엄마.”

지은이는 찬모장을 엄마라고 부른다. 진짜 엄마 같다고.

“그래 내 딸, 경주가 아직도 프로포즈 안 했어? 올 봄엔 결혼해야지”

“엄마, 경주가 저를 노처녀로 죽게 놔두려나 봐요.”

얼씨구, 이젠 장단까지 맞춰준다. 그러다가 정말 오해하면 어쩌려고.

찬모장은 또 훈육을 하려는지 옆에 와서 아예 앉았다.

“이렇게 예쁜 지은이 속이 타겠네.”

“하하하. 아니에요. 농담이에요. 경주는 제 이상형이 아니에요. 에이, 저는 저런 남자 딱 질색이에요. 친구니까 봐주는 거죠.”

이하동문이다. 너도 내 이상형은 아니다.

“경주가 어때서? 착하지, 일 잘하지, 어른들 말 잘 듣지, 그리고 잘 생겼잖아. 돈도 많이 벌어놨을 걸?”

찬모장은 민망할 정도로 내 칭찬을 하다가 일어났다. 내가 잘나긴 했어도 대놓고 칭찬을 하니까 민망했다. 내가 착하고, 일 잘하고, 이정도 실력이면 곧 부주방장만이 아니라 주방장도 문제없고, 그동안 연애도 안 하고 일만 했으니 돈도 많이 모아놨고. 와! 이 정도면 일등 신랑감이다. 게다가 잘생겼으니까 이제 신부만 있으면 된다. 단점이라면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여자를 잘 모른다는 것.

“경주야, 찬모장 말이 다 맞는데 하나는 내가 도저히 동의 못 하겠다.”

“뭔데?”

“너, 못생겼어. 내 스타일이 아냐.”

지은이가 소름끼치듯 ‘으으으’라는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뭐냐, 너도 내 스타일은 아니거든.”

“그치?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친구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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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다 먹고는 늘 하던 대로 휴게실에 앉아서 TV를 봤다. TV가 재미있어서 보는 건 아니다. 쉬는 시간이면 늘 TV를 보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을 뿐이다.

휴게실 TV에선 드라마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아무생각 없이 뇌를 비우고 TV에만 몰두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할 때가 가장 편안하다.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아도 내게는 쉼이다.

“자, 받아.”

쉬는 시간에도 늘 카운터에서 책을 보는 지은이가 작은 선물상자를 들고 휴게실로 올라왔다.

“뭐야?”

“내가 언제까지 이런 걸 챙겨줘야 되냐? 또 술만 처먹으면 초콜릿 안 줬다고 징징댈까 봐 올해도 준비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오늘이 바로 발렌타인데이. 그러고 보니 무철이가 아침에 바구니 하나를 들고 출근한 게 생각났다. 미친놈. 그 바구니가 그거였구나. 우리나라만 그렇다지만, 오늘은 여자가 주는 날인데 녀석이 급하긴 했나 보다.

“야, 내가 언제 술 먹고 징징댔냐?”

“지랄. 이거 포장하느라고 어젯밤에 잠도 못 잤으니까 황송하게 먹어라. 알겠냐?”

지은이는 말도 참 곱게 한다. 나한테만.

“고마워. 역시 너뿐이야. 고마워 내 친구.”

“됐거든.”

지은이가 휴게실에서 나가자 막내가 관심을 보였다.

“와! 형님하고 지은누나하고 그런 사이에요? 몰랐네.”

“일하러 안 가냐? 어디 막내가 휴게실에서 감히 쉬고 있어?”

주먹으로 막내 머리에 꿀밤을 하나 줬다.

“무철이 형이 올라가서 쉬라고 했어요.”

“야, 지금 1층에 부주랑 무철이 놈이랑 둘만 있지?”

“네. 그럴 걸요?”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이놈이 준비한 바구니를 1층 어딘가에 숨겨놨을 것이다. 그리고 단 둘이 있을 때 수애에게 줬겠지. 수애는 바구니를 받고 뭐라고 말했을까? 잠깐, 그런데 나는 왜 수애의 대답이 궁금한 거지? 수애와 무철이가 연애를 하든 싸움을 하든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렇지.

“하하하 무철이 이놈.”

“빨리 열어보세요.”

“저리 가라 저리 가. 혼자 있을 때 열어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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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자마자 가방에서 선물상자를 꺼냈다. 작년에 받은 상자보다 더 컸다. 아니, 매년 커지고 있었다. 4년 전이었나 보다. 왜 초콜릿 안 주냐고 술 먹고 징징거렸던 게 생각났다. 바로 편의점에서 초코바 하나를 사온 지은이, 그 후로 매년 이렇게 초콜릿을 선물해줬다.

포장을 열었더니 반짝이는 종이로 접은 거북이와 초콜릿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그리고 예쁜 손편지도 함께.

‘내 친구 경주야,
야, 이놈아.
내가 언제까지 이런 거 챙겨줘야겠냐?
농담이고, 맛나게 먹어.
그리고 올해엔 꼭 여자친구 만들어서 알콩달콩 예쁜 사랑해라.
내년엔 없다.’

상자에 예쁘게 담긴 종이 거북이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하나하나 손수 접었을 종이 거북이를 손 위에 올려놓았다. 느리지만 결국엔 이긴다는 거북이를 보며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라는 지은이의 마음이 느껴졌다. 느려 보이지만 절대 느리지 않은 거북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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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는 마치 지은이를 함축하는거 같네요. 느리지만 진득하니 꾸준히 애정을 쏟는 사랑? 암튼 앞으로의 전개도 기대됩니다 :)

오홋,,, 그런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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