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20 이렇게 하니까 예쁘죠?

in #kr-novel6 years ago

수지와 집이 같은 방향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집까지 바래다준 적은 없었다.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수지가 싫어할까 봐 걱정이 돼서 한 번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수지가 먼저 바래다달라고 해서 조금은 기분이 좋았다. 비록 충격적인 말을 들은 후였어도.

밤공기가 아직은 차가웠다. 이렇게 봄이 가려나 보다. 서른둘 봄이 지나가고 있다. 나에게도 사랑이 오기는 할까? 마지막으로 여자를 집까지 바래다준 게 언제였는지 생각해봤다. 7년 전인지 8년 전인지, 아니면 9년 전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머리를 스치며 지나간 사람이 지은이였다. 지은이는 술을 마신 날은 꼭 집까지 바래다달라고 말했다. 친구니까 당연해 그렇게 해주겠다고 바래다줬다. 같이 택시를 타면 내 어깨에 기대 잠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그런 행동이 사라졌다. 아마도 그때부터 날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졌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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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는 두 가지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서인지 많이 피곤했지만 수지와 더 오래 함께하고 싶어서인지 버스 안에서의 시간이 짧게만 느껴졌다. 우린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서 창밖만 내다봤다. 유리창으로 희미하게 수지의 얼굴이 비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로 옆에 수지가 앉아 있다는 느낌이 내 심장박동을 빠르게 했다.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수지를 놓치기 싫어졌다. 내가 어떻게 해야 수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수애 말이 맞는다면 분명 과거형이다. 그렇다면 수지는 약혼자가 있었다는 것이지 지금은 없다. 그 약혼자는 어디로 간 걸까? 그리고 수지는 왜 지금은 약혼자가 아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수애 말을 믿고 싶어졌다. 수애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수지는 지금은 약혼자가 없는 거니까.

“경주야, 네가 옆에 앉아있으니까 괜히 설렌다.”

한 정류장을 남겨두고 수지가 먼저 침묵을 깼다.

“어? 어. 나도.”

“이 설레임 얼마 만일까? 그냥 이 느낌이 좋아서 말 안 하고 있었는데, 너도 그랬어?”

“응? 응. 나도.”

“내리자.”

수지가 어느 정류장에서 내리는지 알고 있었지만 집은 몰랐다. 버스에서 내린 수지가 말없이 걷기에 옆에서 따라 걸었다. 몇 분이나 걸어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모르는 길을 걷는 기분이 마치 처음 수지와 한 식당에 일하면서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는 기분과 비슷했다.

알지 못하는 길이지만 수지만 믿고 따라 걸었다.

“조금 춥네.”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감싸며 말했다.

난 바로 외투를 벗어서 수지 어깨를 덮어줬다.

“아니야, 괜찮아. 너도 춥잖아.”

“어허, 남자는 원래 괜찮은 거야. 이 정도 날씨야 뭐 아무것도 아니지.”

괜한 허세를 부려봤다.

“고마워 친구.”

수지는 말끝에 친구라는 호칭을 넣어 말했다.

“고맙긴. 친구 사이에. 하하하.”

얼마나 걸었을까? 잠깐 걸은 것 같기도 하고 한참 걸은 것 같기도 했다. 수지와 함께 있으니 신기하게도 시간개념이 없어졌다.

“매일 이 길을 혼자 걸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해.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 못 본 드라마를 다시보기로 봐야겠다는 생각들을 해. 넌 퇴근하며 어떤 생각들을 해?”

대답을 하려는데 앞에 승용차가 나타났다. 헤드라이트가 너무 밝아서 손으로 빛을 가리고 옆으로 비켜섰는데 차는 지나가지 않고 골목길 한가운데에 멈췄다. 수지가 깜짝 놀라며 몇 발자국 뒷걸음질을 쳤다. 곧 차에서 한 남자가 내렸고 헤드라이트가 꺼졌다.

“아빠.”

수지가 아빠라고 불렀다.

당황스러웠다. 학창시절엔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친구 엄마를 보긴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여자의 아빠라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오늘 조금 늦는다더니 데이트 했구나.”

다가오며 말씀하셨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가까이 다가오자 미소가 가득한 자상한 얼굴이 보였다. 언젠가 한 번 본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에이, 아빠는. 데이트 아니야.”

더 확신이 생겼다. 약혼자가 있다면 부모님도 아실 텐데 데이트냐고 묻는 건 이미 약혼이 깨진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수애의 말에 믿음이 더해졌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래요. 반가워요.”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재빠르게 손을 내밀고 악수를 했다.

“얘야, 소개를 해줘야지.”

“아빠도 참. 경주는 같은 식당에 일하는 조리사야. 나랑 동갑이고 그냥 친구야.”

“오! 얘기 많이 들었어요. 남자친구 경주 군, 반가워요.”

“아빠, 그냥 친구라니까.”

“그래그래. 친구. 허허허.”

“네, 네. 반갑습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런 경험이 처음이기도 해서 그냥 악수만 했다.

“내 두 딸 잘 부탁해요.”

“네. 저야 당연히 잘…….”

차 안에 누가 더 있는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수지 아버지께서 보조석에서 내렸으니까 분명 운전석에는 다른 사람이 타고 있을 텐데.

“아빠 먼저 가 있을게. 어서 들어와.”

“네. 금방 갈게요.”

차로 돌아가 보조석을 열자 실내등이 켜지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보였다.

수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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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집으로 천천히 걸었다. 걸어서 30여 분 거리지만 그냥 걷기로 했다.

나를 그냥 친구라고 소개한 수지. 데이트한 거냐고 물어본 아버지. 그 장면을 지켜본 수애. 그런데 왜 수애 얼굴이 자꾸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맛있는 음식을 숨겨놓고 혼자 몰래 먹다가 들킨 기분이었다.

10여 분쯤 걸었을까, 수애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약혼자는 누구인지, 있었던 건지 아니면 멀리 가 있어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건지. 우선 이것부터 알고 싶었다. 하지만 수애가 내 물음에 잘 대답해줄지 걱정됐다. 그래, 내가 뭐 예쁘다고 가르쳐줄까. 지난번에 말을 끊고 듣기 싫다고 했는데.

집에 도착해서는 샤워를 하고 가만히 누웠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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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봄도 왔으니 곧 여름. 냉면 기술을 빠르게 가르쳐줘야겠다. 언제까지 1층으로 도망갈 수는 없으니까. 무채 썰기는 아직 미숙하니 내가 도와준다고 해도 물냉면 육수, 비빔냉면 장(비빔냉면 다진 양념)은 충분히 가르쳐줄 수 있다.

수애는 출근하자마자 부지런히 채소들을 썰었다. 냉면에 들어가는 오이를 채칼로 썰면 정성이 빠지니까 칼로 직접 썰라고 했더니 예쁘게 잘도 썬다. 배우는 것도 빠르다. 보통은 한 번 알려줘도 잘 따라 하지 못하는 게 정상인데, 두 번 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바로 배워버렸다. 예쁜 음식이 맛도 좋으니 빨리 썰려고 하지 말고 깔끔하게 썰라고 했더니 집중해서 잘도 썬다. 다친 손가락엔 아직도 붕대가 감겨있었다.

“오늘 비빔냉면 장을 할게요. 오이 썰던 것만 마저 하고 배 한 상자, 양파 한 망을 갈기 좋게 준비해주세요.”

옆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와~~~ 오늘요? 히힛.”

드디어 냉면 장을 만든다는 것에 기분이 좋은가 보다.

“딱 한 번만 알려줄 거예요.”

“한 번이면 충분해요. 유능한 스승과 뛰어난 제자니까요.”

자신을 제자라고 낮췄다.

변한 수애의 모습이 부담스럽다. 그냥 예전처럼 화내고 싸우던 시절이 그리워졌다.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내 말도 잘 들으니 좋아야 할 텐데, 까칠하게 행동하는 내 모습이 못나 보여서 부담스러웠다. 저렇게 나오니 까칠하게 하기에도 민망해졌다. 내가 참 별생각을 다 한다.

배 한 상자를 갖다놓고 갈기 좋게 준비하는 수애 옆으로 다가갔다. 수애는 하나하나 꺼내서 껍질을 칼로 까고 가운데 부분을 제거했다.

“예쁘게 생긴 배는 손님상에 올리게 따로 빼고요, 못생긴 녀석으로 해주세요.”

“아, 그렇구나. 보기 좋은 음식이 맛도 있다고 했죠?”

말만 하면 그대로 따랐다.

못생긴 배 하나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뭔가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이 옆에 서있는 내게 고개를 돌렸다.

“참 못생겼다. 까칠한 누구 마음처럼.”

입을 삐죽거리더니 껍질을 깠다.

까칠한 누구 마음? ‘나’겠지. 딱히 화내고 싶지는 않았다. 입을 삐죽거리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껍질을 다 까더니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잘라내어 둥글둥글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니까 예쁘죠? 아무리 못생긴 배라도 이렇게 다듬어주면 예뻐져요. 사람 마음도 그래요. 따듯한 손으로 만져주면 예뻐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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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회짜리 소설이지만,
스팀잇은 기출간된 소설을 연재할만한 곳이 아니라 판단되어 연재를 중단합니다.
21회부터 30회까지의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읽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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