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8 수지의 방황

in #kr-novel6 years ago (edited)

“이봐요. 김경주 씨 오늘은 일 좀 하시죠?”

내가 언제는 일 안 했나? 웬 헛소리람.

“나야 늘 열심히, 아니, 과하게 일을 하죠. 너무 심하게 일해서 늘 피곤해요.”

“무채가 얼마 안 남았기에 주방장님이 무를 50개 정도 주문한 것 같던데 같이 썰 거죠?”

“아이고, 이제 여름이 오는구나. 냉면부 올해 여름은 이 경주느님 덕분에 별 탈 없이 돌아가겠구나.”

매년 여름이면 냉면부가 늘 골치였다고 한다. 내가 오기 전까지만. 내가 본격적으로 냉면부를 하면서 매년 여름을 무사히 넘겼다.

냉면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물냉면이 물에 면을 만 것처럼 보여도 냉면육수를 만들려면 하루가 꼬박 걸리는 작업이다. 냉면 고명에 들어가는 편육을 삶은 육수에 동치미를 넣고 간을 하는 과정은 비빔냉면에 비하면 그나마 손이 덜 가는 거다. 비빔냉면에 들어가는 다진 양념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자그마치 3일이다. 게다가 여름엔 냉면에 들어가는 무를 주 1회 100개씩은 썰어야 한다. 냉면에 들어가는 삶은 달걀 반 개도 무시 못 한다. 냉면이 하루에 2천 그릇 나가면 달걀은 1천 개를 삶아야 하는데, 삶는 게 문제가 아니라 까는 게 문제다. 내가 냉면부를 하기 전까지는 두어 명이 온종일 까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혼자서 30분이면 1천 개를 다 깐다. 사람들이 삶은 달걀 까기 기네스북에 도전하라고 말할 정도다. 냉면에 들어가는 오이도 하루에 한 상자씩 채를 썬다. 채칼로 썰면 간단하겠지만 채칼로 썰면 맛이 없어서 나는 직접 썰기를 좋아한다. 무도 기계로 썰면 맛이 떨어진다.

작년엔 냉면장이 따로 있었고 무철이가 보조를 했다. 내가 빠졌던 작년 냉면부는 완전히 개판이 됐다. 여름 냉면장사가 얼마나 힘든지 경험한 무철이는 수애가 늘 걱정인가 보다. 틈만 나면 내게 수애 너무 고생시키지 말라고 부탁한다. 난 딱 잘라서 말해준다. ‘싫어!’

“여름 냉면장사가 사람 잡는다는 말 무철이에게 들었어요. 그래도 난 겁 안 나요.”

수애가 애호박을 다 썰고는 작업하던 자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당연히 겁나지 않겠죠. 내가 있으니까.”

“잘 아시네. 설마 주방장님 명령을 거역하고 냉면부를 등지진 않겠죠. 그렇죠?”

몇 달이나 됐다고 나를 얄밉게도 잘 안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

.

‘미안. 연락 이제야 하네.’

점심때가 되어서야 수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난 괜찮아. 별일 없는 거지?’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저녁때 일 끝나면 식당 앞에 있는 공원으로 나올 수 있어? 할 말이 있거든.’

할 말이라고? 어제 수애가 하려던 말과 관련이 있을까? 어떤 말이든 상관없다. 수지를 하루라도 먼저 볼 수 있다면 무조건 나가야지.

‘당연하지. 끝나면 바로 달려갈게.’

“뭐가 그리 좋아서 싱글벙글 이에요?”

수애다. 나를 감시하는 건가? 꼭 중요한 타이밍에 나타난다.

“몰라도 돼요.”

오늘 하루만 잘 해주기로 했으니까 삐딱하게 말하진 말아야지.

“언니한테서 연락 왔구나?”

“왜 갑자기 말을 놓지?”

“아… 미안해요.”

수애가 당당하게 사과했다.

“오빠라고 부르면 놓게 해주죠.”

으이그, 장난기가 또 발동이다.

“됐네요.”

.

오후 내내 무 채썰기를 했다. 무철이와 민수까지 붙어서 썰었다. 아직 여름이 되려면 멀었는데 언젠가부터 날씨가 미쳐서 여름이 일찍 온다. 보통은 6월부터 냉면이 팔리는데 5월 말이면 냉면장사가 시작될 듯 보인다.

가장 난이도가 어려운 편썰기는 내가 하고 무철이와 민수는 채썰기를 했다. 아직 손가락이 성하지 않은 수애도 채썰기를 하려고 해서 1층으로 내려 보내려 했지만 완강히 거부하기에 그냥 썰게 뒀다. 칼질에 집중하는 수애의 모습이 평소보다 더 진지해 보였다. 한식에서 가장 난이도가 어려운 칼질이 무 채썰기라고 들은 이후로 늘 이 날을 기다려왔다더니 자세부터 달랐다. 내 특별교육 덕분에 수애의 칼질 실력이 나날이 일취월장했다.

채썰기가 모두 끝나고 뒷정리까지 끝나 잠시 쉬려고 앉았다. 수애가 음료수 캔을 하나 들고 옆으로 앉았다.

“경주 씨 참 멋있어요.”

오후 내내 육체노동을 하더니 다시 미쳐오나 보다.

“나야 원래 멋있죠.”

“그런 것 같아요. 요리도 잘하고 칼질도 잘 하고. 팔에 근육 봐.”

수애가 내 팔을 가리키며 말했다.

“왜요, 부러워요? 이제 수애 씨 팔도 이렇게 근육질이 될 거니까 부러워 말아요. 하하하. 생각만 해도 웃기네. 막 상상이 되네요. 근육질 팔을 가진 여자조리사. 하하하.”

“그러게요. 히히.”

이상하다. 요즘은 미치면 착해지나 보다. 내가 분명 놀렸는데 웃고 있다. 이제 괴롭히는 것도 그만 해야겠다. 반응이 없으니 재미가 없다.

“좋아요?”

“재밌잖아요. 히히.”

참 재밌기도 하겠다.

“저기, 경주 씨.”

“네.”

불러놓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수지 언니가 왜 좋아요?”

별걸 다 물어본다. 알아서 뭐 하려고 궁금한 걸까?

“내 이상형이에요. 그리고 착하잖아요.”

“나도 착한데.”

“에이, 설마요.”

난 벌레라도 본 얼굴을 하며 말했다.

“나 정말 착해요. 그런데요, 나는 왜 미워요?”

“그거야, 음… 내가 왜 미워했더라.”

“에이, 바보. 내가 부주방장이라 밉잖아요.”

“아, 맞다. 그거였어.”

“이유가 그거 하나에요? 그럼 나 부주방장 안 하면 안 밉겠네요?”

“아니죠. 수애 씨는 그냥 얄미워요. 이유가 딱히 없어요. 부주방장 아니더라도 미웠을 거예요.”

“그렇구나.”

수애는 말을 마치고는 가만히 손에 든 캔만 만지작거렸다.

“경주 씨, 근데요, 미운 정이 더 찐하대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수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수애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큰 눈에 짧은 머리. 땀을 흘려야 하는 주방에 일하느라 화장도 제대로 안 한 얼굴인데도 피부가 맑았다. 처음 온 날 남자 조리사들이 모두 반해버린 미모 그대로였다. 그동안 주방에서 일하느라 잘 가꾸지도 못했을 텐데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정이요? 우린 미운정이 아니라 미운 웬수에요.”

“원래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못되게 하잖아요. 혹시 경주 씨도 그런 거 아니에요?”

풋~~~! 음료수를 마시려다 내뿜고 말았다.

“내가 미쳤어요? 얼굴만 예쁘다고 여잔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에서 나가려는데 수애가 말했다.

“나 미친 거 같아요.”

아니 다행이다.

주방을 나가버리자 멀리서 수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나는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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