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0 멋진 조리사님

in #kr-novel6 years ago (edited)

(회당 분량이 적어서 감질나셨죠? 10회부터는 회당 분량이 늘어납니다. ^^)

난 마치 온몸이 마비된 사람처럼 굳어져 버렸다.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출발하려는 버스를 잡기 위해 전력질주를 하고 막 버스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고 버스에 올라탔다는 기쁨과 비슷한 안도감도 들었다. 드디어 나타났다. 나의 이상형.

그녀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녀의 빛나는 얼굴 때문에 눈이 부시다는 걸 깨닫고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겨우 숨을 가다듬자 상황파악이 되었다. 후배들에게 칼질소리 아름답게 내라고 가르치고 있었고 그녀가 그걸 듣고는 박수를 친 것이다. 게다가 나에게 멋지다고까지 말했다. 내 이상형이 나에게 멋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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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누구시죠? 여긴 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인데요.”

민수가 물었다. 그녀는 그때서야 박수를 멈췄다.

“안녕하세요. 내일부터 함께 일하게 된 예수지라고 해요. 잘 부탁드릴게요.”

수지. 이름도 예쁘다.

난 처음 본 사람에게 부끄러움 없이 말을 잘 붙이는 성격이지만 입술이 굳은 것 같았다. 함께 일하게 되어 반갑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입을 열고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민수가 다시 말했다.

“네.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

“반가워요. 와! 여긴 조리사 뽑을 때 얼굴 보고 뽑나 봐요. 모두들 미남이세요.”

그녀가 미남이라고 했다. 나에게 미남이라고 했다. 날 처음 보자마자 멋지고 미남이라고 했다.

“하하하하. 주방장님 취향이에요. 저기 그런데 주방에서 일하시나요? 조리사?”

조리사? 귀해서 잘해야 한 명 정도 구할 수 있다는 여자 조리사가 수애 말고 또 온다는 건가?

“어쩌죠? 제가 요리를 좋아하긴 하는데 조리사는 아니에요. 홀에서 일하게 됐어요.”

조리사가 아니면 어떤가. 한 식당에서 일한다면 매일 볼 수 있으니까 최고의 상황인 것이다. 그동안 착하게 살아온 보람을 느꼈다. 신은 아직 날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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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가 인사를 마치고 주방에서 나가자 바로 지은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사람 새로 왔네. 수지라고. 좀 아는 거 있어?’

바로 답장이 왔다.

‘너에게 문자가 올 줄 알고 대기 타고 있었다. 몰라.’

아는 것도 없으면서 대기는 무슨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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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전 주방장이 방으로 불렀다. 가보니 수애도 있었다.

“부르면 빨리 튀어 와라.”

“네. 죄송합니다.”

“별거 아니고 인사이동을 좀 하려고. 부주 수애가 1층 조리팀에서 열심히 해줘서 든든하다. 어때, 힘들지?”

“아니요. 재밌어요. 무철이가 잘 알려줘서 재밌게 일하고 있어요.”

“그래, 무철이가 참 착하고 일도 잘해. 경주가 제대로 키웠어.”

참으로 잘 해주겠지. 무철이 놈은 수애를 좋아하니까.

“수애야, 진짜 한식을 배우려면 준비팀에서 기술을 배워야 해. 그런데 내가 널 가르치기엔 너무 바쁘구나. 그렇다고 밑에 조리사들에게 가르치라고 할 수도 없고 해서 어렵게 결정했으니까 거부하지 말고 잘 따라줬으면 한다.”

수애에게 할 말이 있으면 둘이 하지 난 왜 부른 걸까? 나는 두 사람의 얘기를 따분하게 듣고만 있었다. 주방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2층으로 올라와서 경주에게서 냉면을 배워라.”

“네?”

수애도 나도 놀랐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고 수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장님과 의논까지 다 끝냈어. 사장님도 허락하셨다. 지금이 3월 초니까 5월까지 3개월 안에 냉면을 마스터해야 한다. 냉면장사는 6월부터거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네가 5월까지 경주에게서 냉면기술을 모두 전수받지 못하면 부주방장 자리를 지키긴 힘들 거다. 부주방장 자리를 내줘야 할 거란 말이다. 주방에선 학력보다는 실력이야.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지 않는 사람을 계속 부주방장으로 놔둘 수는 없는 일이야.”

드디어 기회가 오는 건가?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앞으로 3개월 후에 수애는 부주 자리를 내게 내놔야 할 것이다. 아니 당연히 내놓을 것이다. 내가 안 가르쳐 줄 테니까. 하하하.

“그리고 경주야, 다 들었지? 널 부른 건, 수애에게 5월 말까지 냉면기술을 단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전수해주라는 특명을 내리기 위해서다. 만약 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넌 해고야.”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이 천재 조리사 경주느님이 아무리 잘 가르쳐줘도 수애가 소질이 없으면 못 배울 수도 있지 않은가.

“네? 아니 이건 불공평하잖아요. 냉면부 기술은 최소한 1년은 배워야 좀 한다는 건 주방장님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어떻게 3개월 안에 모두 알려줘요? 그리고 부주가 실력이 없어서 내가 가르치는 걸 못 따라와도 제가 해고인가요?”

“그래. 넌 초심을 잃어버렸어. 너 요즘 출근해서 하는 일이 뭐야?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지? 더는 날 실망시키지 마라. 경주야, 난 널 믿는다. 넌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니까.”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요즘의 나는 내가 봐도 실망적인 모습이니까. 부주방장을 뺏긴 화풀이로 후배들에게 잔소리나 하며 가르친다는 핑계로 괴롭히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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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한다. 성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향해 달린다. 공부하고 훈련하고 인내하며 꿈을 위해 포기라는 것도 배운다. 성공이 눈앞에 있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면 좌절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응원으로 다시 힘을 얻고 재도약을 한 사람은 반드시 꿈을 이룬다.

내 꿈은 일류요리사다. 한식이라는 어려운 길을 선택했지만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막내생활을 함께 했다가 양식으로 옮긴 친구가 그쪽에서 잘나간다는 소식을 들어도 절대 부러워하지 않았다. 내 꿈은 요리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한식의 주방장이니까.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주방장을 할 수 있다는 관례를 깨고 첫 고졸 주방장이 되겠다던 포부는 수애로 인해 잠시 미뤄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뤄진 게 아니라 송두리째 날아가게 생겼다.

내가 가장 미워하는 수애에게 3개월 만에 냉면기술을 전수하라니, 이게 말이 되나? 내가 왜 내 인생이 꼬이게 한 걸림돌에게 냉면기술을 가르쳐야 하는 건지 이해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참을까 생각해봤지만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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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자마자 대충 씻고 잠을 자려고 누웠다. 낮에 본 수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연애 안 하고 일만 열심히 한 나에게 찾아온 행운처럼 느껴졌다. 꼭 잡아야지. 나의 행운.

휴대폰이 울렸다. 지은이의 문자였다.

‘오늘 새로 온 수지 말이야, 수애 언니라더라. 우리랑 동갑. 나 정보력 죽이지? 술 사라.’

내 인생의 걸림돌 수애의 언니? 수애는 분명 전생에 나와 원수였을 것이다. 아마도 전생에 내가 수애에게 못된 짓을 해서 수애가 복수를 하러 왔나 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경주 너 잘 걸렸어. 전생의 원수 그 한을 갚아주마.’ 에잇 젠장.

수애가 분명 언니에게 내 얘기를 했겠지. ‘언니, 식당에 출근하면 또라이 한 명만 조심하면 돼. 이름은 경주라고 미친놈이야.’라고 말을 했겠지. 망했다.

수지가 수애의 언니라는 말이 어이없고 황당해서 차마 답장을 뭐라고 보내야 할지 몰랐다.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한 글자 한 글자 다시 또박또박 읽어봤다. 혹시나 내가 잘못 읽은 건 아닌지.

‘수애 언니라더라.’라는 글자는 아무리 눈을 깜빡이며 다시 읽어보아도 그대로였다. 혹시나 잘못 보냈나 싶어서 ‘수지 씨가 수애 언니?’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래. 수지가 수애 친언니란다.’

수애는 왜 하필 이 식당에 온 걸까?

‘나 말이야. 똥 밟았나봐.’

내가 부주방장이 못 되게 방해하고, 이젠 해고의 위기까지 몰아넣더니, 내 이상형의 친동생이라니. 이건 어디 삼류 막장드라마도 아니고 뭐냔 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놈은 안 되는 걸까? 겨우 수애라는 여자 때문에 내 인생이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져야 하는 걸까?

한참이 지나서야 답장이 왔다.

‘축하해.’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하나뿐인 내 친구 지은이. 허탈감에 빠져있을 나를 위로하려는 지은이만의 방식이었다.

지은이의 문자가 또 하나 날아왔다.

‘잘 자라. 똥 꿈 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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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수애는 2층 준비팀으로 출근했다. 수애가 2층으로 오자 무철이는 울상이었지만 2층 조리사들의 얼굴은 한층 더 밝아졌다. 주방에 여자가 있으니까 향기가 난다나 어쨌다나. 어리석은 놈들아, 주방에선 음식냄새만 난다. 너희들 코엔 파 냄새가 향기냐 이놈들아.

주방에 잠시 있다가 수애가 꼴 보기 싫기도 하고 오늘부터 출근한다는 수지가 보고 싶기도 해서 1층으로 내려갔다. 지은이를 보러 가는 척하며 수지의 얼굴을 훔쳐보려는 심산이었다.

지은이는 카운터에서 전표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수지는 손걸레로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카운터로 걸어가는 동안 고개를 살짝 돌리며 계속 수지를 훔쳐봤다. 정장을 입고 사뿐하게 걷는 모습이 한 마리의 백조 같았다.

“왔냐? 어인 일로 여기까지 행차를 다 하셨냐?”

마땅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수지 얼굴 보려고 왔다고는 할 수 없잖아.

“뭐, 그냥. 아, 맞다. 수애 보기 싫어서.”

“수애에게 너무 그러지 마라. 네 이미지만 안 좋아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더라. 너랑 수애랑 사이 안 좋은 거 말이야."

“알라지 뭐.”

“배짱 좋네. 내 친구다워.”

난 말을 하면서도 계속 수지의 얼굴을 훔쳐봤다.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테이블을 닦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만 훔쳐봐라. 티 난다.”

지은이가 내 어깨를 치며 말했다.

“티 나냐?”

“당연하지. 너 수지 보러 온 거지?”

“그렇게 보여?”

“당연하지. 네가 늘 노래 부르던 이상형이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내가 그렇게 많이 말했어?”

이 멍충아,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다. 땡땡이치지 말고 올라가서 일이나 하셔.”

그래야지. 일해야지. 수애와 한 주방에서. 젠장.

“점심때 수지랑 같이 올라갈게. 밥 같이 먹자.”

“정말? 와! 고마워. 역시 넌 내 소중한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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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때가 되자 출발한다는 지은이의 문자가 왔다. 3층에 올라가니 수지가 있었다. 수지는 지은이와 함께 앉았고 나는 자연스레 수지 정면에 앉게 되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예뻤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목구멍으로 삼켜지기나 하는 건지 정신이 없을 만큼 빠져들었다.

“참, 어제 주방에서 말 잘하던 멋진 조리사님 맞죠?”

상냥한 목소리가 내 심장박동을 더욱 빠르게 펌프질 시켰다.

“네. 안녕하세요.”

기억하고 있었다. 멋진 조리사로.

“얘가 경주야.”

지은이와 수지는 벌써 말을 놨나 보다.

“안녕하세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수지는 나에 대해서 얼마만큼 들었을까? 수애는 수지에게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을까?

“네. 안녕하세요.”

“우리 식당에서 칼질을 가장 잘하신다면서요? 나는 남자가 칼질하는 모습 정말 멋있더라. 한 번 보여주실 수 있죠?”

“야, 동갑이야. 말 놔. 경주야, 우리 셋 동갑이니까 그냥 말 놓고 친구하자. 알았지?”

지은이가 대화에 끼어들며 셋이 친구하자고 말했다.

“어? 그, 그래.”

“그럴까요?”

내가 괜한 걱정을 했던 걸까? 수지는 나와 친구를 하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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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주방으로 갔더니 수애가 내 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칼을 무서워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지금 뭐하십니까?”

“아, 경주 씨 미안해요. 우리 식당에서 경주 씨 칼이 제일 잘 든다고 해서 구경 좀 하려고요.”

“그러다 다치면 내 책임도 있으니까 만지지 마세요. 칼질 못하는 사람이 만지면 손가락 잘려요.”

내 칼 만지다가 손가락 다친 사람을 많이 봐서 경고해줬다.

“칼 하나가 뭐 대수라고 치사해라.”

“대수에요. 이 칼은 나 김경주의 자존심이에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날이 잘 서 있다고 자신한다고요. 만지지 마세요.”

“치!”

‘치’ 소리가 기분 나빴다. 그래도 참기로 했다. 인간 김경주 성질 많이 죽었네.

“경주 씨, 나 부탁이 있어요.”

“부탁? 내가 당신 부탁을 들어줄 것 같아요? 꿈 깨세요.”

“까칠하긴. 일단 들어나 보세요.”

“싫어요. 내가 왜 그쪽 말을 들어야 하죠? 듣기 싫은데.”

더욱더 까칠하게 말했다. 목소리로 화살을 만들어서 확 쏴줬다.

“나 칼질 좀 가르쳐줘요.”

수애는 자신이 말을 하고도 어색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딴청을 했다.

“싫다면요?”

“에이 쫌생이.”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최대한 진정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아서 작업대를 손으로 크게 내리쳤다. 수애는 깜짝 놀라 토끼눈을 했다.

“그만 합시다.”

굵은 목소리로 화내며 말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수애가 소리 지르며 말했다.

“주방장님이 두 분 싸우면 바로 보고하라고 했어요. 할까요?”

멀찍이서 자기 일을 하던 민수가 말했다. 도대체 주방장은 나에게 왜 이러는 걸까? 주방에 내 편이 한 명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외로움이 몰려왔다.

“들었죠?”

수애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약 올리듯이 살며시 웃으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 수애에게만 들리게 조용히 말해줬다.

“너, 까불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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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이네요.^^
처음부터 하나씩 읽어봐야겟어요.ㅎ

우앗, 고맙습니다. ^^

냉면처럼 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인지 첨부터 다시 봐야겠습니다. 소설 10편 잘 보고 갑니다. ㅎㅎ!!

냉면처럼 하는 사랑... 소설 후반부에 나옵니다. ^^

처음부터 읽어볼게요. 스티밋 하길 잘했다고 생각되요.
천재성이 돋보이면서도 재치있고 좋으신분들이 가득한 스티밋

대단한 분들이 모인 곳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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