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7 수지의 비밀

in #kr-novel6 years ago (edited)

기다리는 수지에게선 더 이상 답장이 오지 않았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답답하기만 했다. 퇴근하지 않고 주방에서 멍하니 폰만 보고 있는데 수애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이미 옷을 다 갈아입은 수애가 내게 다가왔다.

“폰을 손에 쥐고 있었네. 문자 봤죠?”

“말 걸지 마세요.”

대답하지 않으려다가 짧게 말했다.

“할 말 있으니까 한잔해요. 언니에 대해서 말할 게 있어요.”

수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니 나는 수지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 않았다. 친동생이라면 언니에 대해 많이 알고 있겠지. 오늘 왜 출근하지 않았는지도.

“금방 옷 갈아입고 나갈게요. 앞에서 기다려요.”

“네.”

수애가 짧게 대답했다.

그동안 자신의 얘기는 하지 않았던 수지, 그녀에 대해 궁금했던 모든 것들을 물어봐야겠다. 언제까지 궁금해 할 수만은 없다.

.

수애와 가까운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앉자마자 바로 물어보고 싶었지만 수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많이 어두워서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커피를 조금씩 마시며 폰만 만지작거리기를 십여 분 하자 수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언니요, 상처가 있어요.”

“그런 것 같아요. 그 상처가 얼마나 큰지 어떤 상처인지 모르겠지만 대략 눈치는 채고 있었어요.”

무언가 숨기고 있다면 분명 상처일 것이라 생각했다. 작은 상처였으면 좋겠다. 내가 보듬어줄 수 있을 만큼의 작은 상처라면 좋겠다.

“언니, 결혼할 남자가 있었어요. 언니는 경주 씨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했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언니 자신도 많이 힘들어하면서 겉으로 표현하지 않으려 하는 그 모습이 보기 싫어요. 제가 짜증나서 못 봐주겠어요. 자세한 건 언니에게 직접 들으면 좋겠지만……”

“그만요.”

수애의 말을 끊었다. 더는 듣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수애는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다. 내가 수지와 친한 게 얄미워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다. 내가 미워하는 수애가 나를 위해서 수지의 과거 얘기를 해주는 건 분명 아닐 것이다. 수애도 제3자이기에 수지의 정확한 마음을 알지는 못하겠지. 그렇다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애의 말을 끊었다.

“왜요? 궁금하지 않아요? 언니가 왜 저러는지?”

“궁금해요. 하지만 직접 들을게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수애는 내 말을 듣고는 표정의 변화 없이 가만히 내 두 눈만 주시했다.

“수애 씨, 오늘 들은 얘기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당신, 정말 못됐다.”

갑자기 눈물 흘리는 수애. 내가 뭘 잘못했다고 우는 건지 당황스러웠다. 늘 강인한 모습의 수애였기에 눈물 흘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여자가 우는 걸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일단 티슈라도 건네줬다.

“됐어요.”

수애는 받지 않고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침을 한 번 삼키고 숨을 크게 한 번 쉬고는 울지 않았다는 듯 다시 내 얼굴을 봤다.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미운 사람이라도 우는 모습을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먼저 갈게요. 나중에 언니에게 들으세요. 언니가 말을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마치고는 바로 일어서더니 나가버렸다. 내가 듣지 않겠다고 했으니 잡을 이유도 없었다. 그냥 가게 내버려두곤 다시 휴대폰 화면을 켰다. 수신된 문자는 여전히 없었다. 바로 집으로 가긴 싫었다. 그 자리에서 남은 커피를 모두 마시기 전까지 그냥 앉아있었다.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오지 않는 문자를 기다리면서.

.

밤새 비가 내렸다. 천둥소리에 잠을 뒤척인 탓에 출근하려고 깼을 땐 머리가 조금 아팠다. 수지의 문자를 기다리다가 늦게 잠든 데다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빗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창문을 열어보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수지는 지난밤 어디에서 잤을까? 밥은 잘 챙겨 먹었을까? 내 머릿속은 온통 수지 생각뿐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수지일 거라는 생각에 재빨리 휴대폰을 잡았는데 화면엔 ‘수애’라는 글자가 나를 화나게 했다. 왜 아침부터 전화질이람. 재수 없게.

“여보세요.”

최대한 불친절하게 보이려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받았다.

“언니가 새벽에 돌아왔어요. 지금은 자요. 오늘 출근 안 한대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수애 목소리가 반갑긴 처음이다. 이렇게 직접 전화로 알려줘서 늘 밉기만 한 수애가 갑자기 고맙게 느껴졌다.

“정말요? 어디 아픈 덴 없데요?”

“네. 걱정 말아요. 이른 아침부터 전화하는 게 실례인 건 알지만 경주 씨가 걱정할까 봐 전화했어요.”

“고마워요. 전화해줘서.”

“그냥 전화하고 싶었어요. 이따가 식당에서 봐요.”

“네.”

기분이 좋아졌다. 아픈 데 없이 잘 돌아왔다니 다행이다.

그런데 사람이 참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미운 수애가 왜 오늘 아침엔 고맙게 느껴질까? 수애는 왜 내게 자기 언니가 새벽에 들어온 걸 알려줬을까? 내가 만약 수애라면 자기를 미워하는 놈 골탕이나 먹어보라고 절대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수애가 천사같이 착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닐 테고. 에잇, 모르겠다. 내가 알 게 뭐람. 아무튼, 오늘 하루는 수애를 미워하지 말아야겠다. 짐승도 은혜를 갚는다는데 나는 사람이니까. 그래 오늘 하루만이다. 딱 하루만.

.

식당에 출근해서도 계속 휴대폰만 들여다봤다. 여전히 연락은 없었다. 오늘은 왠지 1층으로 내려가기 싫어서 2층에서 내 일을 했다. 수애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채소들을 썰기만 했다. 보통 때라면 내가 1층으로 내려가고 무철이가 2층으로 올라와서 수애와 같이 채소를 썰 텐데, 혼자 썰고 있는 모습이 조금 힘들어 보여서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딱 오늘 하루만 잘 해주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썰어서 점심 먹기 전까지 다 썰 수나 있겠어요?”

“그럼 도와주시든가.”

난 애호박을 썰고 있는 수애 옆으로 슬쩍 다가갔다.

“참 이상해. 부주방장이 아랫사람보다 칼질을 못해.”

나도 참 못났다. 오늘 하루는 안 그러기로 해놓고 나도 모르게 비꼬는 말이 튀어나왔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수애가 칼질을 멈추고는 어깨로 나를 밀었다.

“저리 가요, 저리 가. 나 혼자 할 테니까.”

“에이, 미안. 도와줄게요.”

“됐거든요. 언제 도와줬다고 친한 척이람. 그리고 말은 바로 해야지. 도와주는 게 아니라 원래 경주 씨가 할 일이거든요!”

“삐쳤구나. 미안미안. 오빠가 도와줄게.”

“오빠?”

내가 장난이 좀 심했나? 수애가 칼을 내려놓고 날 보며 웃더니 말을 이었다.

“나한테 부주방장님이라고 부르면 오빠라고 불러주죠. 까짓 거 뭐 오빠라고 부르는 게 어렵나. 불러 봐요. 부주방장님이라고.”

“그만둡시다.”

정이 안 가는 인간이다.

사랑은냉면처럼s.PNG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1 꼬인 내 인생이여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2 이 칼 말입니까?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3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4 수애 괴롭히기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5 포기해야 하는 걸까?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6 드디어 미쳤군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7 거북이처럼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8 내 짝도 어딘가에 있겠지?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09 반짝이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0 멋진 조리사님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1 내가 누굴 닮았다고?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2 당신이 최고니까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3 나 미쳤나봐요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4 채썰기의 생명은 편썰기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5 수고했어요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6 날 좋아해줘서 고마워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7 수지의 비밀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8 수지의 방황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19 미안해. 나 밉지?
[소설연재] 사랑은 냉면처럼 | 20 이렇게 하니까 예쁘죠?

Coin Marketplace

STEEM 0.18
TRX 0.16
JST 0.031
BTC 60893.72
ETH 2624.62
USDT 1.00
SBD 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