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지나는 티벳 불교
그 다음 자신이 홍옥과 같이 광채가 나는 붉은 빛의 신성한 귀의자 바즈라 요기니라고 상상한다. 그녀는 하나의 얼굴과 두 개의 손과 세 개의 눈을 지니며 머리 위로 높이 들어올린 오른손은 눈부시게 빛나는 반원형의 도끼날을 휘둘러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모든 사고 작용을 끊는다. 가슴 앞의 왼손은 피를 가득 채운 인간의 두개골을 들고 있으며 끝없는 지복과 만족을 수여한다. 다섯 개의 두개골로 장식된 관을 쓰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50개 인간의 머리를 목에 걸었다. 여섯 가지 상징적 장식물 중 다섯을 착용하고 묘지의 재로 만든 연고는 바르지 않았다. 팔에는 신성한 아버지 헤루카를 상징하는 기다란 지팡이를 끼었다. 그녀는 열여섯 살의 만개한 벌거벗은 처녀로서 엎드린 인간 형상의 가슴을 왼발로 밟고 오른발을 들어올려 춤을 춘다. 지혜의 불길이 훈륜(暈輪)을 이루어 그녀를 두르고 있다. 티벳 밀교 요가
보편적 미덕인 자비심, 푸근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엄마 품이 떠오른다. 대부분의 종교적 이미지에서 자비심이 관련되면 선하고 밝은 느낌이다. 예를 들어 고즈넉한 성당 뒤뜰에 자리잡은 성모 마리아이거나 하얀 옷을 입은 관세음 보살의 신비스러움이다. 그런데 티벳 불교에서 보여지는 몇몇 이미지는 공포스럽고 괴상하여 거북하거나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점이 늘 궁금했다.
선, 이타심을 생각하면 밝고 아름답지만 막상 그것을 내가 실천하려면 어떠한가? 무엇인가 남에게 주려면 아깝고 내 살을 깎는 것 같고 희생이 따르기 때문에 힘이든다. 나만 호구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생그지 되는 거 아닌가? 내가 누리던 모든 권리가 다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이것이 발전하면 물론, 공포심. 괴롭고 부정적인 마음은 어떤 것일까? 두려움, 공포, 아까움, 증오, 분노 등 선한 행동을 하고자 할때 이러한 부정적인 느낌이 앞서기도 한다. 선한 사람은 즐거워야 하고 잘생기고 아름답고 신비스러워야 할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만큼 어렵고 힘이 들어간다. 티벳 불교의 이미지는 이점을 풍자한 것은 아닌가?
선한 행동이 선한 행동을 촉진 시키고 아름다운 에너지로 전환되기 이전 넘어야만 하는 심리적 문턱을 엣지있게 비유해 준 것은 아닐까? 티벳 사자의 서에서 죽음과 재탄생의 중음단계에서 만날지도 모르는 무섭고 두려운 이미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미지를 통해서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 즉 이것은 좋고 이것은 싫다는 극단적인 감정을 심층의식 속에서 뿌리뽑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선한 마음과 행동도 겁이 없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굽히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최고의 자비심 에너지로 변환되니 바로 불성(佛性)이다.
그래서 노자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천도는 맛이 없다(天道無味)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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