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단편 - 비, 데미안, K

in #kr-pen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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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비가 좋다. 비 오는 날 아침에는 커튼이 한 톤 낮은 색깔을 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빗소리를 들으며 깨어날 수 없게 되었다. 고층 아파트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이제는 색채를 구별하거나 습기를 느끼는 것으로 비가 오는 것을 알아챈다. 그럴 때 내가 깊고 깜깜한 굴에서 몸을 말고 자는 야생 동물 같다고 느낀다. 비 오는 날은 공원을 산책하고 싶다. 동시에 침대에서 하루 종일 머무르고 싶다. 이불에 몸을 파묻는다. 거실 밖에서 개가 나오라고 문을 긁는다. 개는 내가 깨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잘 때와 깨어있을 때의 숨소리를 구별하는 걸까.




몰입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이 하나 있다. 바로 다이아나의 발바닥 털을 정리하는 일이다. 거실 바닥이 미끄럽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깎아주어야 한다. 개는 싫은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내가 가위질 하는 시간을 잘 참아내었고, 마침내 맛있는 간식을 쟁취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중학교 1학년 때 읽었다. 그 때 나는 K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항상, 언제나, 먼저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K에게 엽서를 보냈다.

그 해 봄에는 비가 많이 왔다. 나는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다가 빗소리에 잠이 깨곤했다. 매일 아침, 혹시나 오늘은 K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가득차 있었던 시절이었다. 비가 오는 날은 K와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비는 공기보다 질량이 높은 액체였고 내 살갗과 K의 살갗에 스며들어 우리의 영혼을 이어줄 것 같았다.

K는 날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에 계속 취해있고 싶었기 때문에 밤마다 편지를 썼다. K는 나의 긴 편지에 답장을 잘 보내지 않았다. 가끔 한 번씩 짤막한 엽서를 보내왔다. 어느날 길에서 K와 마주쳤는데, "넌 작가같아.",라고 말했다. 차라리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면 돈을 쫓지 않고 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뉘앙스는 뭔가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난 K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다는 베르테르적 비극을 마음껏 즐겼다. K를 사랑했다기 보다는 내가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경험하는 그 착란적인 감정 자체를 사랑했던 것 같다. K가 대학에 입학하고 내가 고3이 되었을 때 우리는 남포동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K는 나에게 돈까스를 사주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신입생 환영회때 운명적인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 K는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내가 K에게 보냈던 수 십통의 편지와 함께.




가 그쳤다. 개와 함께 산책을 했다. 네 잎 클로버 찾기에 최적의 시간이다. 비가 진드기를 다 씻었을 테니까.







생각의 단편들


어떤 혹등고래 위에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저장되는 것
꽃이 기다린다
파란 우연
산책자
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준 것
도착을 더듬으며
춤추는 생각들
종이 눈꽃을 노리는 시간
출발하기 위해 도착한다
비 맞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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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출에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오치님 하락장에 늘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얀님의 잔잔한 포스팅은 마음을 차분하게 합니다.
K 라는 분은 어떤 분인지 궁금하네요. 보얀님이 마음에 들었을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해봤어요.
지나간 추억은 왠지 모를 허전함 을 남기는것 같아요 ^^

비오는 날에는 모든 것이 말랑말랑해져서 그 모든 일들이 바로 어제 일어난 듯 느껴져요. 어딘가에서 숨쉬고 있을 K와 이 비를 맞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보얀님은 이미 작가!!!

fenrir님 응원 감사합니다!

다이아나 발톱 정리하시는 거 보고 놀랐어요ㅠㅠ 전 겁이 많아서 무서워서 혹여나 다칠까봐 못 건드리겠더라구요 보얀님의 꼼꼼함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복 많은 다이아나 크크 남쪽에는 지금 비가 많이 온다고 하더라구요 오늘도 좋아하는 비와 함께 즐거운 날 보내시길 ^_^

다이아나가 귀를 닦거나 털 깎을때 얌전하게 있어줘서 신기해요:) 예전에 키웠던 아이들은 손도 못대게 난리를 피웠거든요 ㅎㅎ

01
저는 장마시즌에 폭우가 쏟아지거나 비오는 날에는 ticket to the tropics가 생각납니다. 특별한 추억이라기보다는 10대 중2때 였을겁니다. 아마도 새롭게 좋아하는 그녀가 나타나기까지 아니 대학 입한전까지 H를 짝사랑했던거 같습니다. 중간아주 잠깐 다른 친구에게 샛길로 빠지긴 했지만 최종 귀결처는 H였던거 같습니다. 제가 여자를 좋아하면 오래가거든요. 초딩 5학년부터 좋아라했던 H를 생각하면서 비오는날 워크멘을 주머니에 넣고 해드폰끼고 비가 퍼붓는 날 아파트 주변을 한바퀴 돌았는데 비가 엄청 많이 와서 비를 피하기 위해아파트 정자에 앉았을 때 워크맨에서 이노래가 흘러나왔어요. 그때의 비냄새와 상쾌함, 그리고 H를 생각하면서 멜랑코리해졌던 기억 종자가 아주 강했나봅니다. 가끔 비가오면 그때 생각이 납니다.

02
H는 대학졸업후 어느 돈많은 아저씨?(10년차 이상)와 결혼해서 잘산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당시 홍대 큰 까페의 사장이라고 했던거 같아요. H가 이쁘진 않았지만 묘한 매력이 있어서 그당시 친구들사이에서 인기가 많았거든요. 노래도 참 잘불렀어요. 포스팅 대문 사진의 젖어진 나무길에 떨어져 있는 네잎클로바가 참 이쁩니다. 그곳에서부터 비냄새와 상쾌함이 흘러나오는 것 같아요. H는 초딩 5학년때 저를 몽키라고 불렀지요. 걔도 저를 그때 잠깐 좋아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도 남녀를 떠나 예쁘진 않지만 매력적인 사람에게 끌렸던 것 같아요:) 비오면 클로버 찾으러 나가는데 올해는 꼭 일곱잎 클로버를 찾는게 꿈이랍니다!

비는 참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아요~
생각에 빠지고 추억에 잠기고 감수성에 젖어드는요^^

오늘은 감수성을 자극하는 비가 아니라 칼국수를 부르는 비가 내리네요:)

앗~!! 제 마음을 들킨 듯요^^

네잎클로버 잎들, 큼직큼직하니 참 예뻐요-! 온 존재를 활짝 열고 쏟아지는 비를 맞이하고 있네요 :)

저에게도 이니셜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어요. 안 그럴 것 같은데 친한 사이였다는 거 말고는 연애 관계 비슷한 어떤 것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쪽이나 저나 이성적으로 조절하는 능력이 대단했거든요. 한쪽에서라도 먼저 풀리면 금세 공기가 달라졌을 텐데 어쩐지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어요. 서로 추구하는 가치나 삶의 모양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함께 하는 미래가 그려지기 어려운 사이. 몇 년을 끌다가 점점 희미해지고, 결국 지금은 굳이 연락하는 사이까지는 아닌 걸로, 그렇다고 연락을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친구 같은 사이로 남아 있어요.

여기도 지금 비가 내리고 있어서, 보얀님과 함께 산책하면서 이야기를 나눈 기분이 듭니다. :) 언젠가 보얀님을 만나면 다이아나도 쓰담쓰담할 수 있는 날이 오겠죠? 히히

조절하는 능력이 강해서이기도 하지만, 타이밍이 미묘하게 엇갈리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요즘 부산은 클로버가 흰꽃을 피우고 있어요. 저도 리리님 댓글을 읽으며 같이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답니다. 리리님께 드릴 네 잎 클로버는 잘 보관하고 있을게요 ^^

비 오는 날의 감성이군요.. 왠지 마음까지 촉촉해진 기분입니다

낭만님, 오랜만이에요^^ 어제는 감성 충전했구요, 오늘은 방금 따끈한 칼국수를 먹었답니다.

여름에는 비가 오는 날이 좋구요, 겨울에는 눈이 오는 날이 좋더라구요. ㅎㅎ

여긴 눈이 잘 안오네요:)

비의 감성에 흠뻑 빠지고 싶은 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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