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별을 본다. 외롭지 않으려고. / 016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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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the writer










   우중충한 날 끝에 워크숍이 다가왔다. 날씨는 캘리포니아 특유의 발랄함을 되찾았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수지 큐는 내키지 않으면 굳이 안 가도 된다고 몇 번에 걸쳐 말했으나 나는 그런 말이 여자의 교묘한 이중 화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내게는 일종의 부채 의식 비슷한 것도 있었다. 그녀가 내게 해 준 만큼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비에 젖은 옷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은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만 간절할 뿐 스스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해묵은 숙제와 같았다. 잔뜩 밀려 있어서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고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어떤 것에도 손대지 못하고 있는, 해결보다는 차라리 소멸하기를 바라는 그런 숙제. 그 일부를 해치우기 위해 나는 비행기에 짐짝처럼 몸을 구겨 넣었다.

   헌팅턴 비치는 아름다웠고 리조트는 훌륭했다. 최고의 두뇌들이 지적 유희와 휴식을 겸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풍경과 시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부드럽게 밟히는 따뜻한 모래가 내 모난 마음에 빠르게 풍화 작용을 일으켰다. 첫날은 고급스러운 점심 식사 후 오후 늦게까지 본연의 업무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간의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고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뒤에 이어질 유흥을 아무 죄책감 없이 만끽하기 위해 각 팀의 사람들은 몇 시간 동안 에너지를 불태워야 했다. 물론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해변을 산책하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의 가든파티에서 나는 아직도 내게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일부를 상대하느라 진땀을 뺐다. 어느 양심 없는 가십 잡지가 수지 큐와 나의 관계를 무슨 세기의 로맨스처럼 실었던 기사를 그들은 각별히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잡지와 그들이 공유하는 정서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 각박한 세상에 사랑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심정을 누가 모르겠는가. 다만 그걸 나와 함께 공유하려고 할 건 없다. 나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21세기 남자와는 거리가 멀다. 내 관점에서 그건 남자 여자를 떠나 문명인이 지양해야 마땅한 태도다. 모든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나누면서부터 세상살이가 얼마나 더 피곤해졌는지. 배려와 예의를 낳던 인내와 성숙은 자취를 감추고, 지나고 나면 후회할 말과 행동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나는 그런 부작용보다는 감정과 생각을 쉽게 드러내지 않아서 생기는 고전적인 부작용 쪽을 택하고 싶다.

   내가 혼자가 된 틈을 노리고 있던 남자도 솔직하게 말하는 부류였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에 같은 색의 콧수염을 정갈하게 기른 시대착오적인 남자였다. 남자가 말을 걸어온 건 내가 의자에 앉아 오직 어둠뿐인 하늘을 보며 쉬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그…… 맞죠? 닥터 해든의…….”

   남자는 한 손에 하나씩 차가운 맥주 두 병을 들고 있었다. 이미 가십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한차례 휩쓸린 뒤라 나는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남자는 머쓱해하면서도 손에 들고 있던 맥주병 중 하나를 내밀었다.

   “알코올은 아직 안 돼요. 그 닥터 해든의 엄명이라서요.”
   “오, 미안합니다.”

   남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듯 어색한 침묵 사이에 서 있다가 맥주병 하나를 발치에 내려놓고 손을 내밀었다.

   “릭입니다.”

   내가 그 손을 보며 굼뜨게 움직이려는 찰나 남자가 갑자기 아차 하며 손을 빼더니 자신의 티셔츠에 쓱쓱 문질렀다.

   “잭이에요. 뭐 이미 아시겠지만.”

   남자가 다시 내민 손을 잡으며 나는 피로에 절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시답지 않은 대화 몇 마디를 해치우고 방으로 올라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쪽도 연구원이에요?”
   “아, 우리 몇 번 마주친 적도 있는데……. 물론 정식으로 인사한 적은 없지요. 저는 닥터 로저스 팀 소속이에요.”
   “그랬군요.”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남자가 말했다.

   “어때요, 소감이? 아이에서 갑자기 딱 어른이 된 거잖아요. 옛날에 봤던 영화가 생각나는데요. 빅이라고 톰 행크스 주연의…….”
   “네, 나도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모르겠지. 20여 년을 꼼짝도 못 하는 몸에 갇혀 지내야 하는 생지옥을. 다른 사람들처럼 피상적인 생각밖에 못 하는 그 남자를 속으로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때 같으면 ‘몸에서 쉰내가 나기 전에 일어나서 다행이죠’ 같은 농담으로 내 긍정성을 보여 줬을 텐데 이번에는 도저히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기회가 있으면 한번 경험해 보시죠. 지금이 시작하기에 최적의 시기인 것 같은데요? 곧 있으면 애들 대학 등록금이다 뭐다 시달리게 되실 텐데.”
   “아, 그 정도 나이는 아닌데요. 결혼도 아직 안 했고…….”

   별로 기발하지도 않은 냉소적인 말을 남자는 진담으로 받아들였는지 쩔쩔매다가 내 말의 진의를 깨달았는지 급히 방향을 바꿨다.

   “아! 하하, 이거 제가 실수했네요. 얼마나 힘드셨을지 감히 짐작도 못 하겠어요.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당신이 승자죠.”

   나는 무슨 뜻이냐는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알잖아요. 수지 큐 말이에요.”
   남자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멋진 여자죠. 그만한 여자를 얻었으니 진정한 승자는 잭, 바로 당신인 거죠.”

   문장만 놓고 보면 딱히 문제 될 만한 부분은 없었다. 남자의 말투도 반어법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도 그 말에 신경이 거슬렸다. 피로 때문에 과민해진 탓이리라.

   “이만 들어가야겠어요. 피곤하네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의 인사를 받기도 전에 돌린 등 뒤로 진의를 위장한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짐 같은 형이 있으면 좋겠네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말이군.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지미라는 사실을 알게 돼도 저따위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남자를 슬쩍 돌아봤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는 얼굴로.

   “병도 고쳐주고, 여자도 구해주고. 부럽네요.”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껄였다. 기분이 확 나빠졌다. 남자는 미소 짓고 있었다. 방금 빈정대는 투였던가? 확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기분 나쁜 건 이전에도 한번 맛본 것처럼 느껴진 뒷맛이었다. 나는 험악한 인상을 남자에게 바짝 들이댔다.

   “이봐요, 분명히 말하는데, 병을 이겨낸 것도 수지 큐의 마음을 얻은 것도 내가 그렇게 하고자 했기 때문이야.”

   내가 남자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명료하게 생각을 전달하자 남자는 겁에 질린 눈으로 입을 다물고는 가만히 있었다. 소금 기둥이 된 그를 내버려두고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존재를 증명하듯 남자가 재빨리 말했다.

   “짐이 그녀의 마음을 받아줬다면 당신에겐 기회가 돌아가지 않았겠죠. 그 정도 머리는 돌아갈 텐데. 아무리 오랫동안 녹슬어 있었다 해도.”

   여전히 험악한 내 얼굴에 의문이 새롭게 떠올랐다.

   “모르고 있었군요?”
   마치 결정적 단서를 포착한 형사처럼 남자는 말끝을 올렸다.

   “그녀가 한동안 목을 맸던 건 사실이죠. 당신 형에게 말이에요. 이제는 다 지나간 얘기지만요.”

   수지 큐가 지미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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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잭의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를 모르는 사람 입을 통해서 알게 되다니... 사람들의 간사한 입이란 ㅜ 잭이 수지큐에 대해 마음의 빚을 진 듯하게 느껴졌는데 다음엔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지 ㅜ

마음의 빚을 이걸로 퉁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라고 할 수 있겠군요.

수지 큐가 지미를?

커피 한잔 마시면서 읽고 있었습니다...
커피도 딱 맞춰 다마셨고...
글도 끊기고...
또 다음편을 입맛을 다시며 또 기다려야하는 ㅠㅠ;

다음 편은 조금 늦어질 것 같습니다. 다른 포스팅 준비 중이라서요...ㅠㅠ

헉.... 애간장 탑니다 ㅠㅠ;

아 꼭 저렇게 아는 척을 해야.... 남의 인생에 저런 식으로 끼어들다니 정말 무책임하네요. 잭의 마음이나 기분은 안중에도 없고, 다들 지미! 형! 닥터 해든! 이제는 수지큐까지! 악!

그녀가 내게 해 준 만큼 나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비에 젖은 옷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이 표현 좋다고 하고 쿨하게 사라지려고 했는데 실패 ㅋㅋㅋ

어딜 쿨하게 가시려고... 오늘은 서로 머리끄덩이 잡을 일 없기만을 바랍니다.

1편부터 차례대로 읽고 있는데 소재? 주제? 가 매우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얼릉 캐치업 해야 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정주행 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아아 파국이다;;;
하필 짐이라니...;;

카페베네짤 소환이 시급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쁜놈이 하나 등장했군요

악당의 현실 버전이죠.

앗, 이런 반전이 있다니요! 수지 큐의 매력인가요. 아니면 또 다른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 걸까요. 김 작가님, 이번 화도 잘 읽었습니다!

애독 감사합니다. 수지 큐를 싫어할 남자는 많지 않을 것 같군요. 일단 저도 참 좋아하다는...

kim님 캘리포니아에 계시는군요
새로운 사실을 알게됐습니다
이곳도 오늘은 우중충하고 추운 날씨입니다

여자의 교묘한 이중화법이란 문장에
소름 돋습니다
넘 매력적인 표현이라서요
참 부럽죠~^^

저건 소설 속 배경입니다. 저와 혼동하시면 안 되는데...

수지큐와 지미의 과거사연이 몹시
궁금하네요 그렇지 않아도 주인공이 지미에
대한 감정이 좋지않은데 더욱더 거슬리게 하네요 ㅎ

둘 사이에 뭔 일이 있었다면 조만간 뭔 일이 날지도 모르겠군요.

불난 집에 기름을 뿌리는군요.. 수지큐에게 그런 과거가 있어서 쉽게 잭과 만날 수 있었네요... 이제 이해가..

과연 당사자는 뭐라고 할지 궁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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