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유럽 일주기] 미친여행 CHAP1_15 웁살라, 너와 같은 하늘 아래

in #kr-travel6 years ago (edited)

15. 웁살라, 너와 같은 하늘 아래

2011년 5월 16일


소담이가 승희 방으로 가기 전에 창문에 발을 쳐 주고 갔다.

“요즘은 새벽 4시면 해가 떠서 이렇게 가리지 않으면 절대 잘 수가 없어.”


내 몸속엔 체내 시계가 있다.
언제 자든 기상시간은 아침 7시 반이라는.
(노숙할 때에는 해 뜨자마자 눈을 뜬다.)

오늘도 어김없이 일어나서 창밖을 보니 마치 정오마냥 해가 쨍쨍하다.
아직 연락을 안 받는 것을 보니 이 둘은 아직 자고 있나 보다.

맘 같아선 ‘항상 유럽 남자들 하면 떠오르는’
제과점에 가서 갓 구운 바게트를 사와 모닝커피와 함께 대령해주고 싶지만,
열쇠가 없는 관계로 한 번 나가면 열쇠 없이는 못 들어온다.
난 조용히 한 구석에서 책이나 본다.
그렇게 할 일이 없다.
아침잠 짧은 게 이럴 때 안 좋구나.


두 여자들은 9시쯤에 일어났다. 분명 12시에 잤는데 9시까지 잠이 오는지 신기하다.
난 이렇게 자려면 머리가 아파서 먼저 일어나는데.


오늘 가장 우선으로 할 일은 신발과 옷을 마련하는 것이다.

첫날 노숙할 때 비가 온 덕에 신발에 물이 질퍽하게 들어갔고,
그게 한동안 잘 마르지 않아 발 냄새가 지금 상상 초월이다.
이 냄새를 철저히 없애기 위해 신발도 멀찍이 벗어놓고,
신던 양말은 버리고 벗자마자 바로 발부터 닦으러 갔다.

그냥 단순한 남의 집에 와서도 이런 건 민폐인데
하필이면 왜 이곳에서 이렇게 되는 건지 정말...
제발 점수 깎아먹을 건수를 만들지 말란 말이야!




비 올 때를 생각해서 아예 신발을 새로 살 때 젖을 염려가 없는 샌들을 사려고 한다.
싼 걸 사야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너무 가격에 구애받지는 않기로 했다.
지금 사면 몇 달을 신을 것이니깐.


여러 가게를 뒤져 드디어 샌들을 들여왔다.
5만 원 정도 했다.
좀 비싸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기 물가를 생각하면 괜찮아 보인다.
어쨌든 이놈의 고린내 나는 운동화와도 이제 안녕이다.
들여오자마자 갈아 신고 이 원수 같은 운동화를 쓰레기통에 당장 박아 버렸다.
속 시원하다! 이제 그 집에 폐를 끼칠 재료까지 모조리 없애 버렸다.


이제는 옷을 마련하러 갈 시간이다.
난 옷 메이커, 질 이런 건 필요 없고, 싸고 못생기지 않으면 장땡이다.
소담이가 추천해준 샵을 갔다.
H&M.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메이커인데?

알고 보니 그곳은 스웨덴메이커였단다.
메이커 축에 들어감에도 불구 나름 괜찮은 티가 만원, 바지는 최저 2만원이라는
동대문 시장 가격에 괜찮은 옷을 살 수 있다.
목적은 내 옷이지만 여자들이 그냥 지나갈 리 없지.
내 옷 고르는 걸 도와주는 명목으로 온 소담이와 승희는 날 버리고
자기들이 옷 삼매경이 빠졌다.
할 수 없다. 그냥 나 혼자 살아야지.
뭘 바라니 뭘.

그냥 아이쇼핑으로 끝날 줄 알았더니 이것저것 입어보고 난리가 난다.
소담이가 물어본다.

“나 어때?”

“땡~.” 예뻐

“치...”

어떻게든 내 마음이 들키기 싫었다.
마음과 반대로 말이 나온다.


신발도 장만했다. 옷도 장만했겠다.
이제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꿀리지 않고 마구 다닐 수 있다!
새 옷을 입고 뛰어보자 팔짝. (응?)






이제 웁살라 대학을 한 번 돌아보기로 한다.
나름의 피크닉을 하겠다고 아침부터 토스트를 바리바리 싸들고 난리를 쳤었지.

우리는 한 과목을 일주일에 한 번, 혹은 두 번, 일정 시간을 한 학기 내내 듣지만,
이곳은 각 달마다 열리는 과목이 다르다.
공학수학은 3월 한 달 동안 강의를 하고, 전자장기학은 4월 동안에 하는 이런 식이다.
그래서 수강신청을 잘 하면 쉬는 달도 만들 수 있다고.
지금 소담이는 다 종강하고 일주일에 학교 가는 날이 하루라고 한다.

덕분에 행복하다.
같은 하늘 아래, 너와 같이 있는 이 시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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웁살라대학교 본관 안에는 별별 조각들로 가득 차 있다



웁살라 대학교는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다.
5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지금이야 스톡홀름이 수도지만, 옛날에는 웁살라가 수도여서 그렇단다.

생물학 분류 체계를 처음 확립하신 린네
지금 온도의 단위로 널리 쓰이는 셀시우스 씨도 이 대학 출신이다.

500년의 역사답게 캠퍼스에 들어서자마자 고풍스러운 냄새가 났다.
본관이라 하는 곳을 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유럽의 오래된 대학, 딱 그 느낌이다.
해리포터에서 많이 본 그 풍경.

“너도 저런 곳에서 수업 들어? 좋겠다. 호그와트 기분 나겠다야!~”

“아니... 내가 듣는 곳은 완전 새로 지은건물....”

...다 그런 건 아닌가보다.




본관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확 뜨이는 문구가 있다.

'Tänka Fritt är Stort, Men Tänka Rätt är Större'
18세기 시인 트릴드의 문구란다.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은 대단하다. 그렇지만 올바로 생각하는 것은 더욱 대단하다’란 뜻이다.


네가 날 좋아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하다.

하지만, 이런 일은 쥐뿔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바로 단념할 수 있는 정신은
더욱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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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은 대단하다. 그렇지만 올바로 생각하는 것은 더욱 대단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조각상 몇 개가 있었다.
둘러보니 강의실도 몇 개 있었다.
본관이라서 그저 행정관으로만 쓸 줄 알았는데 말이다.
고풍스러운 외관과는 달리 그래도 내부는 어느 정도는 현대식 장비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도 이곳에서 수업 한 번이라도 안 들어봤어?”

“아니? 환영회 때 말고는 올 일이 없던데?”

...이런 건물들도 다 빛 좋은 개살구인가 보다.

경영대 캠퍼스로 갔다. 여기에서 점심을 먹자고 한다.
왜 여기냐고?

“경영대에 훈남들이 많데!!! 얘네들은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어도 멋지더라 꺄아~"

그렇지 뭐. 남자만 예쁜 여자 찾남? 여자도 잘생긴 남자를 찾지. 머리로는 생각한다.

하지만 가슴에 무언가 화끈한 것이 올라온다.



가서 앉아보니 말마따나 훈남들이
노트북과 책더미 속에서 앞으로 닥칠 시험에 고군분투 하고 있었다.

기럭지가 되니 대충 걸쳐 입은 티셔츠에 공부에 찌든 모습에도
우리 동양인 여자들은 설랜가보다.
좋겠다. 조상 잘 만나서.
그리고는 내 키를 본다. 지금 내 상태는 대한민국 88년생 남자 8%안에 든다.

하... 부모님, 날 왜 이렇게 낳아 주셨습니까요??!! 질투 솟게스리.






한참동안 대학을 돌고 집으로 들어왔다.
저녁 후 어김없이 피카 시간이다. 소담이가 말을 꺼낸다.

“너 여기 다음에 탈린 간다고 했지?”

“그렇긴 한데?”

“승희승희, 너 아직 에스토니아는 안 가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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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탈린갈래?”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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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담이.. 너 지금 탈린을 가자고 하는거니?

나와 함께?



스톡홀름에서 탈린으로 넘어가는 페리가 있는데,
날짜가 임박한 페리에 대하여 남는 방을 떨이로 판단다.
그건 무조건 방 하나 단위로 파는데, 한 방에 4명이 들어간다.

편도 원가가 4인 1실 200유로(30만원)인데
이 떨이 티켓은 왕복으로 396크로나 (8만원)이다.

어떡해서든 1명을 채우려고 소담이가 여기저기 연락을 한다.

“오빠, 며칠 뒤에 탈린 갈 건데요, 혹시 시간 되세요?”

“야, 며칠 뒤에 탈린 갈 건데, 스케줄 있어?”

속으로 간절하게 빈다.

아무도 오지마...

지금은.. 당신들이 올 시간이 아니야...
둘만 있어도 부족한 시간이라고...






대답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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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시험기간에 걸렸는지 안 된다고 한다.







다행이다.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


<이전 포스팅>

CHAP1 런던, 노르웨이, 스웨덴,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체코, 독일, 오스트리아
CHAP1_14 아직은 ... 말할 수 없다
CHAP1_13 그녀를 만나기 12시간 전
CHAP1_12 욕창 터지고, 기차에 실려 가고
CHAP1_11 배낭을 털리다
CHAP1_10 사람의 따뜻함을 느끼다 + 노르웨이의 자연에 호되게 데이다
CHAP1_8 한국영화 많이 컸네? + 9 첫 주행, 첫 노숙, 첫 봉변
CHAP1_7 이런 곳에도 한국사람?
CHAP1_5 첫 주행 + 1_6 북한도 자전거로 달린다고?
CHAP1_3 + 1_4 Bryan Almighty + 자전거의 운명은?
CHAP1_1 + 1_2 인천 출발 + 히드로 도착

CHAP0 준비
CHAP0_번외 가져갔던 장비 일람
CHAP0_6 출국 그리고...
CHAP0_4 자전거 맞추기 + 5 쉥겐조약
CHAP0_3 항공권과 장비 마련하기
CHAP0_2 어디를 어떻게 가볼까?
CHAP0_1 다짐




혹여나 자전거 여행을 준비하시는 스티미언분들.. 도움이 되셨을련지요?

도움이 되었다면 UpVote + 리스팀 부탁드리겠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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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브라이언님 글이 진짜 너무 재밌습니다...ㅋㅋㅋ얼른 다음편 보고싶어요:) 결말이 궁금해서 미치겠습니다~_~

'Tänka Fritt är Stort, Men Tänka Rätt är Större'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은 대단하다. 그렇지만 올바로 생각하는 것은 더욱 대단하다’

멋진 말도 하나 얻어가네요 오늘도 잘봤습니다!

결말이 궁금하시다면
3달간 꾸준히 정주행해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ㅎㅎ

헐ㅋㅋ3달분량이었군요 마음의 준비를 헙헙ㅋㅋㅋ

스크린샷 2018-01-13 오전 12.32.06.png

이 정도 분량으로 파일 3개가 있습니다 ㅋㅋㅋㅋ

100~110편 가량 되니
20~22주 정도 나오겠네요
이제 2주 했고요

그럼 팟팅...ㅎㅎ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남은 20주 성실하게 출첵하겠습니다:)

흥미 진진 !!! 다음편 기대하고 갑니다 ~

감사합니다 :) 월욜날 뵈어용 ㅎ

ㅋㅋㅋㅋ다른 사람의 여행기를 읽는건 참 재밌는 것 같아요 같은 곳에 가도 다른 경험과 생각을 하니까요 :D 오늘도 재밌게 읽고 가요!

감사합니다 >_<
계속 보게 되면 이렇게 사는 놈도 있구나 싶을 거예요 ㅎㅎ

아무도 오지마...
지금은.. 당신들이 올 시간이 아니야...
둘만 있어도 부족한 시간이라고...

속마음을 읽어버린 기분이네요 ㅎㅎㅎ

ㅜㅜㅜㅜ 아련합니다 그 때만 해도.. ㅎ

오늘도 역시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500년 전통의 대학교면
학생들 자부심도 대단하겠네요

영국 빼고 모든 대학생들이 그렇듯
그냥 자신이 거쳐가는 대학 1....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넘 재밌었어요 ㅎㅎ 보팅파워는 별로 없지만 풀보팅 하고 가요!! ㅎㅎ 좋겠다 조상 잘만나서~~~
웁살라 대학교, 가보진 않았지만 교환학생으로 가려했던 곳이라 이렇게 보니 반갑네요 ^^

반갑습니다 :) 힣힣
좋은 곳에서 보팅파워 임대받으셨군요 +_+

그나저나 말리위 썰 계속 듣고 싶네요 ㅎㅎ
자주자주 놀러갈게요

와 자전거를..대단하세요~!

딱히 .. 없어요
길 있으면 가면 됩니다..ㅎㅎ

끼야...!!! 탈린...!! ㄱㄱㄱㄱ👉👉👉👉
완전 로맨티스트시네요오~~ (아쉽게 실천에 옮기시지는 못하셨지만..☺️) ‘바게트에 모닝커피’릉 생각해 내시고! ‘너와 같은 하늘 아래~’ 우후~ㅎㅎㅎ 이 여행기 넘 재밌어요!! 롱디도 항상 꿈 꿉니다.. ‘같은 하늘 아래..!’🙏🙏

쥬팔님 보고 여행기 끝나고 난 뒤 컨텐츠가 생각났어요
갸오오와 사랑꾼들 말고 브라이언과 사랑꾼들
아님
선천적 얼간이들 - 브라이언 버전

병맛의 끝을 보여드리죠 ㅋㅋㅋ

ㅋㅋㅋㅋㅋㅋ오 장르는 연애 시리즈인가요? (그렇담 완전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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