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유럽 일주기] 미친여행 CHAP1_14 아직은 ... 말할 수 없다

in #kr-travel6 years ago

14. 아직은... 말할 수 없다

2011년 5월 15일



2년 만에 듣는 목소리다.


2년 사이에 난 모든 옷이 다 털리고 욕창까지 안고 들어오는 거지가 돼 있었고,
얘는 교환학생 간 사이 살이 많이 올라 토끼가 되었다.
그러면 어떠리? 아직도 내 눈에는 예쁜걸.




첫 마디를 잘 떼야 한다는 부담감, 입을 열어보려 한 순간, 소담이가 더욱 난리를 친다.


“야야야~~ 이게 얼마만이야~! 어떻게 스웨덴에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네?”


걱정은 기우였다. 알아서 쉴 새 없이 속사포를 쏜다.
나의 어깨를 가볍게 해 준다. 나한테 이런 모습은 처음인데?
신나면 마구마구 말이 나오는구나. 흠.. 이제 내가 매일매일 신나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잠깐만 기다려. 나 자전거 좀 끌고 와야 돼서.”


옛날에 서울에서 해남까지 자전거 여행을 하던 나를 보고
사서하는 고생이라고 했던 소담이도,
살인적인 스웨덴 교통비에 무릎을 꿇고 자전거를 장만했다.




소담이가 사는 기숙사는 내가 헤맸던 거리와 그렇게 멀지 않았다. 10분 정도 달리면 나온다.
한국의 맨션, 빌라를 생각나게 하는 분위기의 기숙사였다.
개인 방이 있지만 부엌은 공동부엌을 쓰는 형식이다.

같은 층에는 소담이의 절친한 프랑스 친구, 그리고 귀여운 농담을 날리는 아이가 살고 있었다.
(농담이 귀여운 이 아이는 내가 마지막 남은 요구르트를 원샷하니깐 이 미친 한국 친구 동영상을 찍었어야 했다고)
공동 부엌 덕에 식사시간이면 자주 보는 아이들이다.


246598_161919213872503_5861631_n.jpg

웁살라대학교 기숙사. 잔디와 피크닉 테이블이 탐난다.





지금 자기 방 상태가 좋지 않단다.
정리 좀 하겠다고 잠시 밖에 있어달란다.
그 동안 부엌을 보았다. 여기야말로 꼴이 말이 아니다.
도대체 파티를 했는데 설거지도 안하고 몇날 며칠을 있었던 거냐?
지금 접시에 뭐 묻은 게 다 굳어 있잖아!!

내가 이런 꼴은 못 보겠다.
잃은 점수 좀 딸 겸, 정리하는 동안 부엌 설거지라도 해 줘야지.

소담이가 정리를 끝내고 나왔다.

“어? 네가 그거 왜 해?”

“나 이런 꼴 못 본다. 좀 먹었으면 제때제때 치워야지!”

“그거 나랑 관계없는 건데........?”

정신줄이 풀리는 소리. 띠웅.

“어... 그...그래도 좀 보기에는 안 좋잖아?”

어떻게 해 봐야 소용없다. 점수 따려다가 삽질만 했네. 쳇.




짐을 풀고 장을 보러 갔다.
소담이는 자전거를 타고, 깜빡하고 키를 방에 놓고 나온 나는 달렸다. (가지고 오기 귀찮아서)
옛날 생각난다. 친구들은 다들 자전거를 탈 때 나 혼자만 그 속도 따라 달렸던 기억.

“왜 이렇게 천천히 달려?”

“너 힘들잖아?”

“신경 쓰지 마. 난 이런 짓 많이 해서 괜찮아.”
뭘 또 그렇게 생각해 주기까지야?
난 느리게 달리면 감질맛이 난단다.
내가 자전거 따라 달리는 게 편해. 굳이 그렇게 착하게 안 해도 되는데.

히힛.





마트에 도착했다.
자전거가 잔뜩 있는 곳에 줄지어 주차를 했는데, 위에 보니 자전거 주차금지라고 쓰여 있었다.
이 나라 국민들도 어쩔 수 없다.
어느 나라 국민이고 당장 편한 게 장땡이지.

가격표를 살펴보았다.
노르웨이보다 많이 싸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나라 보다는 비싸다.
그런데 신기한 건 식빵, 우유만큼은 정말 싸다.
식빵 한 줄, 우유 1리터에 1000~1500원이면 말 다했다.
우리의 밥 같은 것이라 그런가?

내가 먹고 싶은 걸 고르라고 한다.
나는 지금까지 가격만 보고 절약만 한 지라 뭘 고를 눈은 없다.
내 눈에는 우유와 콘후레이크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소담이는 맛있게 먹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대부분의 여자가 이렇다는 걸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우유를 찾을 때 이 아이는 샌드위치 샐러드를 생각하고 있다.

“샐러드로 저것 중에 어떤 게 좋을까?”

옆에 PB 상품이 있었다. 그동안의 습관대로 PB를 집는 순간

“빨리 손 떼! 그거 정말 맛없는 거야!
돈 조금 절약하려다가 입을 버린다고. 하나를 먹더라도 맛있는 걸 먹어야지!”

꾸중 제대로 들었다. 가격보단 맛이 더 중요한 소담이다.

한국에서 볼 때엔 귀하게 자란 아이처럼 보였는데
타지에서 홀로 척박하게 사는 교환학생 생활은 사람 참 많이 바꿔놓나 보다.
이렇게 장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제 영락없는 주부다.
내가 다 흐뭇하다. 왠지 엥겔 지수는 피크를 찍겠지만.

“이제 우린 모두 주부가 되어야 한단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저녁에 소담이의 절친한 친구가 왔다.
승희라고 한다. 동갑이란다. 나도 모르게 얼굴 본 지 10초만에

“말 놓을까?”

라고 한다. 아무래도 내 얼굴표피두께가 10cm는 족히 되는 것 같다.

저녁으로 같이 삼겹살, (분말)사골국, 계란말이를 해 먹었다.
매일매일 전투식량과 콘후레이크로 연명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니 감동의 눈물이 쓰나미같이 밀려온다.

오랜만에 진수성찬이라 배를 두드릴 정도로 먹었는데 커피타임까지 하자고 한다.
사치의 연속이다.

스웨덴에서는 이것을 피카Fika라 부른다. 
티타임을 피카라고 하고, 티타임한다는 것 자체로도 피카로 부른다. 
(즉, 명사 동사 모두 fika라 부른다.) 
영어로 치면 ‘Let’s fika‘ 정도도 쓸 수 있다고. 
절대 커피만 먹지 않고 케익이든 과자든 뭔가 하나씩 더 나온다. 



지금은 두 친구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극한의 단맛 초콜릿 과자다.
왠지 여기 있는 동안 무진장 살이 쪄서 나갈 기분이다.
그러면 어때? 앞으로 에너지 태울 일이 창창한데.

밀린 이야기도 하고 영화도 본다. 영화를 실컷 보고 있는데, 갑자기 소담이에게 전화가 온다.

누굴까?


사실, 내가 제대하기 1년 전 시점까지도 남자친구가 있었다.
혹시 그 사람은 아닐까?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지금 내가 루트를 바꾸면서까지 여기 온 것도
내가 여기 도착할 시점엔 이미 헤어졌을 거라는 가정을 하고 건 베팅이다.

그런데 설마... 아직도?
영화를 보는 내내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애써 표를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내 속은 어쩔 수 없다. 떨려온다.
전화를 한다는 소담이는 한 시간이 되도록 오지 않는다. 불안하다.

영화를 다 보고 승희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소담이는 씻고 승희 방으로 갈 것이다.
궁금증은 마구 올라오는데 풀 시간이 얼마 없다.
이 궁금증을 못 풀면 난 오늘 밤 잠을 못 잘 것 같다.





아까 피카 시간에 좋아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했었다. 소담이가 물어본다.

“넌 지금 좋아하는 사람 있어?”

“있지. 무려 3년을 바라보고 있지.”

“오~~ 누구누구누구?”

“알려줄 수 없단다.”

“야, 그래도 누군지 알아야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주지.
이것만 말해줘. 같은 동아리야, 아니야.”

“자~~ 거기까지. 노코멘트~!”

“야...!”

“난 노코멘트라고 했다!”

“알려줘알려줘!!”

“근데 지금 영화 뭐 봐?” (말돌리기)

이렇게 피카시간에는 간신히 흐지부지하게 만들었지.




“아까 집에서 전화 왔어. 오랜만에 동생 목소리 들었네. 잔소리 좀 하느라고 늦었어.”

너... 지금 내 마음을 읽은 거야? 물어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왜...?

“어? 어...”

뭐라고 대꾸 좀 하고 싶다. 대꾸 좀 하라고, 이 쑥맥아!
멘탈에 딜레이가 걸렸다가 풀렸다. 입을 열었다.

“전 세계 어느 누나나 똑같구나. 우리 누나도 좀 그런데.”

조금의 딜레이.

“근데 아까 3년 누구야?”

“못 말해 준다니깐?”

“나부터 말할게. 난 작년 2월에 만났다가 여기 오고 헤어졌어.
가끔씩 연락은 오고. 뭐, 그런 사이야.”

헤어졌다고!! 올레!!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오는 건가?!
아까 응어리진 마음이 풀린다. 떨림이 멈춘다.

“그래서 넌 누구야?”

“그래도 노 코멘트~”

그래도 노 코멘트. 말할 수 없다.

왜냐면

너거든.

아직은 말할 수 없거든. 때가 아니니깐.

마음속으로 묻어만 둔다.
지금 내 마음이 저릿한다 해도.



다음 시간에 계속...

248228_161919310539160_246701_n.jpg

웁살라대학교 앞


<이전 포스팅>

CHAP1 런던, 노르웨이, 스웨덴,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체코, 독일, 오스트리아
CHAP1_13 그녀를 만나기 12시간 전
CHAP1_12 욕창 터지고, 기차에 실려 가고
CHAP1_11 배낭을 털리다
CHAP1_10 사람의 따뜻함을 느끼다 + 노르웨이의 자연에 호되게 데이다
CHAP1_8 한국영화 많이 컸네? + 9 첫 주행, 첫 노숙, 첫 봉변
CHAP1_7 이런 곳에도 한국사람?
CHAP1_5 첫 주행 + 1_6 북한도 자전거로 달린다고?
CHAP1_3 + 1_4 Bryan Almighty + 자전거의 운명은?
CHAP1_1 + 1_2 인천 출발 + 히드로 도착

CHAP0 준비
CHAP0_번외 가져갔던 장비 일람
CHAP0_6 출국 그리고...
CHAP0_4 자전거 맞추기 + 5 쉥겐조약
CHAP0_3 항공권과 장비 마련하기
CHAP0_2 어디를 어떻게 가볼까?
CHAP0_1 다짐




혹여나 자전거 여행을 준비하시는 스티미언분들.. 도움이 되셨을련지요?

도움이 되었다면 UpVote + 리스팀 부탁드리겠습니다 -_-)/

Sort:  

그래서! 그래서요! 다음은 언제!

...내일 오후나 밤 중.. 쿨럭 ㅎㅎ

제가 요즘에 출장중으로 글을 잘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출장중에 자전거여행을 계획하고 다닙니다. 방콕 돌아가면 몰아서 ㅋㅋㅋ 읽겠습니다. 즐거운날들 만드세용~~~~~~

키보드를 꽝꽝 때리면서 즐겁게 살아 보겠습니다 ㅎㅎㅎㅎ
즐거운(?) 출장 되시길 -_-)/

네~~~~~~~ㅂ

왜냐면 너거든.
꺅......!!!!🤭😳⚡️💃🕺🙉🙈🙉🙈
단숨에 쭉- 읽었어요! ㅋㅋㅋㅋ
다음편에 결론이 나나요.?!?!

...노코멘트 ㅋㅋㅋㅋ
매일매일을... 즐겨 ... 주시죠...
그리고 전 오늘 밤 이불을 차러 가겠습니다 ㅋㅋ

두근두근>< 아름다운 결말 기대합니다ㅋㅋ

감사합니다 :) 매일 한 편씩 올리고 있습니다 ㅎㅎ
매일 생각날 때 들어오시면 올라와 있을거예요

드라마 마지막 장면처럼 애를 태우시는군요 ㅎㅎㅎ

저도 기대 심리 높여서 독자 모으고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_< 카페베네
ㅋㅋㅋㅋㅋㅋ

Coin Marketplace

STEEM 0.31
TRX 0.12
JST 0.033
BTC 63747.88
ETH 3130.43
USDT 1.00
SBD 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