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의 작은생각] 여성 혐오의 기구한 뿌리 - 모성에의 공포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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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인디 밴드로는 탄탄한 팬 층을 확보한 쏜 애플의 리더 윤성현이 '자궁 냄새' 운운하는 여성 혐오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져 충격을 준 적이 있습니다. 쏜 애플의 팬들 중 절대 다수가 여성이었던 만큼 그가 했다고 전해지는 발언의 충격은 더욱 크게 다가왔었죠. 하지만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의 발언이 '여성 혐오'라는 데는 동의하나, 과연 도덕적 비난의 대상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보호해 주는 존재입니다. 보호란 '예견되는 위험 요인의 선제적 차단'이죠. 불가리아 태생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해온 정신분석학자 쥘리아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이렇게 엄마에 의해 차단되고 배제된 것들은 아이의 내면에서 완전히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코라'라는 곳에 저장된다고 합니다. '코라'는 아이의 내면에서 엄마에 의해 금지당했으나 버릴 수는 없는 것들을 모아두는 암흑의 지하창고 쯤 되는 셈입니다.


엄마로부터 과잉보호를 받는 아이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동생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는 엄마는 아이를 사고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아이의 주변에 최선을 다해 차단막을 칩니다. 자전거나 인라인 스케이트는 교통사고의 위험 때문에 금지의 대상이고, 늦은 귀가는 범죄의 위험 때문에 허용되지 않습니다. 끝이 날카로운 도구는 문구용 칼 조차도 쓰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노로바이러스에 대한 공포 때문에 겨울철에도 초밥이나 회 같은 익히지 않는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합니다.


이렇듯 엄마의 차단막은 때로 '장벽'이 됩니다. 그런데 장벽이 장벽 너머에 대한 그리움까지 차단하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엄마에 의해 '코라'에 가두어져 있던 금지된 욕망은 아이가 엄마의 품속에서 나와 타자와 교류하면서 단단히 잠긴 문틈 사이로 조금씩 비어져 나옵니다. 그러다 일순간에 억눌려 있던 에너지가 분출하면서 코라의 잠긴 문이 부서지고 이번엔 오히려 엄마를 그 코라 속에 감금시켜 버리죠. 성인이 되어 스스로 코라의 문을 열고 대등한 존재로서 엄마와 대면할 때까지...


핑크 플로이드, Mother (그들의 명반 'The Wall'에서 주인공 핑키가 마주한 장벽의 원초적 기원은 엄마입니다. 관련글: 평화를 꿈꾸었던 자가 맞이한 최후의 꿈 - 핑크 플로이드 The Gunner's Dream)

인용문 속의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아이는 여러 겹의 곤경에 빠집니다. 자신을 가두는 엄마의 장벽이 갑갑하고 그 너머의 세상이 그립지만, 엄마에게서 전염된 공포 때문에 선뜻 그 밖으로 발을 내딛지는 못합니다. 다른 아이들과 사귀고 싶지만 촘촘한 엄마의 규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그런 자신에게 더 적극적으로 다가와주지 않는 다른 아이들에 대한 피해의식도 쌓입니다. 스스로를 왕따라고 규정하는 거죠.

아이는 결국 엄마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학교와 또래 집단을 떠나 집안에 스스로 유폐됩니다. 그럼으로서 엄마도 함께 유폐되죠. 아이와 엄마는 함께 유폐된 집안에서 지옥같은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엄마 곁을 영원히 떠납니다. "엄마, 아빠... 저 때문에 불행하셨죠? 이제 저에게서 자유로와지세요."라는 편지를 남긴 채...

정상적인 경우, 엄마는 아이의 내면에서 '코라'에 감금됨으로서, 오히려 아이를 보호해주는 임무(?)로부터 아이에 의해 '해방'됩니다. 그런데, 불행한 엄마들은 아이에 의해 '코라'에 감금되는 것에 강하게 저항함으로써 오히려 아이의 삶에 더 강하게 '스스로' 결박 당합니다. 아이에게 닥칠 위험에 대한 초조가 강하면 강할수록 아이에게 더 치명적인 결과를 낳고, 아이에 대한 보호막이 촘촘하면 촘촘할수록 아이는 더 큰 위험에 빠집니다. 그렇게 엄마는 아이의 감옥이 되고 아이는 다시 엄마의 감옥이 되어갑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러한 악순환이 앞의 예처럼 파국으로 치닫지 않는다해도, 이러한 경험이 주는 트라우마는 아이의 내면에 '모성에 대한 공포/혐오'를 깊이 새겨 넣습니다. 나아가 성인이 되어서도 코라의 문을 스스로 열고 삶의 유일한 여성이었던 엄마를 대등한 존재로서 마주할 기회를 갖지 못할 경우, 모성에 대한 공포/혐오는 여성에 대한 공포/혐오로 확대 재생산됩니다. 상처입은 엄마의 피해자였던 아들이 상처입은 가해자로 다시 태어나는 거죠.

그런데 세계 최장 수준의 노동시간과 대다수 여성의 경력 단절이라는 언뜻 별 상관없는 듯한 '사회적 상황'은 가정에서의 '아버지 부재-부권 약화'와 '양육 책임의 여성 전가'라는 조건과 맞물려, '불행한 엄마'들을 양산하고, 극심한 입시 경쟁은 그들이 단단하고 촘촘한 감옥 속에 아이들을 보호/감금할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높입니다.

오늘날 청소년기를 갓 남긴 20대 초반의 남성들에게 퍼지고 있는 여성 혐오의 상당 부분은 모성에 대한 혐오와 공포에 뿌리를 두고 있는 듯 보입니다. 쏜 애플의 윤성현 역시 자신의 '자궁 냄새' 발언에 대해 해명하면서 편모 슬하에서 자라면서 생긴 모성에 대한 공포를 언급하기도 했지요.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을 바탕으로 윤성현을 매도하는 것이 다소간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그의 말은 '가해 발언'으로서 만큼이나, '상처의 고백' 또는 '공포의 고백'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성에 대한 공포에 기원을 둔 유형의 여성 혐오는 미투 운동이 일시적 분노의 표출에 머무르지 않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듯합니다. 상처가 상처를 낳는, 이 기구하기 짝이 없는 가해와 피해의 연쇄고리를 끊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차별적 구조의 본질과 그것이 낳는 효과에 대한 세심한 성찰과 진단 아닐까요?


쏜 애플, 석류의 맛. 이 곡에서도 저는 여성에 대한 선망, 공포, 애착, 혐오,탐닉이 뒤섞인 윤성현의 내면을 읽습니다.

이젠 까마득해요
온전한 당신을 먹은 기억
여긴 날씨가 좋아요
이젠 별로 열도 안 나구요

도망쳐 온 하늘에는
새가 없어요
다다랐던 땅 위에는
그댈 닮은 것이 자라나요

한 알, 한 알 때다가
입에 넣고 혀를 굴려봐요
달아 빠진 듯해도
어딘가 썩은 것만 같아요

오도독! 오도독!
혀를 씹을 만큼 삼켜도
내 안에 똬리 튼
검은 구멍 짙어만 지네

그래도 좀처럼
멈출 수가 없어 난 그래
오늘도 제 발로
기어들어 간 작은 지옥

한참을 떨어진 것 같은데
바닥은 어디?
마치 천 번쯤 거짓말을
한 것 같은 기분

자꾸만 천해지고
거듭되어 거절되고
애꿎은 입가만
붉게 물들어

아무리 씻어내도
지워지지를 않아요
좀 더 무리해서
더럽혀줘요

들어와 줘요, 끝을 주세요

머리가 새까만 짐승의
고기는 먹는 게 아니라 했다
그렇게 사람이 된다면
차라리 난 귀신이고 싶어라

한참을 떨어진 것 같은데
바닥은 어디?
마치 천 번쯤 거짓말을
한 것 같은 기분

끝이 없는 끝을 내게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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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 개인적으로 굉장히 긍정적으로 봅니다. 저도 집단 내에 적체한 악습과 잘못된 문화는 이런 방식으로라도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속한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에 의해 한 개인을 억압하는 것은 어느 쪽이나 폭력적이라는 점입니다. 설령 집단의 경향성이 어느정도의 근거가 있더라도, 그것이 개인의 가능성을 제한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자신을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봐달라고 하는만큼 타인도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봐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은 개인으로 봐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한 개인을 집단화시켜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다소 잘못된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따뜻한 시선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윤성현의 잘못된 발언이 오직 '가해자 집단'이라는 가상으로 상정된 집단에 속해있기 때문에 나온 발언이 아니라, 그가 겪었던 구체적인 경험과 상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집단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 겠습니다만, 그것으로 다시 개인 개인에게 낙인을 찍어 죄의식을 느끼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단 남성, 여성으로 구분된 집단만이 아니라, 지역, 인종, 학력 등에 있어서도 집단의 낙인을 찍지 말고 조금만 더 관심을 갖아 개인의 개성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문제의식은 구체적이고 섬세해야 한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90년대 '정체성의 정치'가 대두되던 시기에 청년시절을 보낸 사람으로서 '정체성의 정치'가 '갈라짐의 정치', '진영 논리'로 변질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조금은 걱정이 되긴 합니다. 지켜봐야 겠죠...

사람은 상처투성이 같습니다 모두가 치유받고 사랑받아야하고 내상처가 남을 찌를까 걱정됩니다

그래서 극복과 치유의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사려깊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역시 헤르메스님.. 저는 "엄마, 아빠... 저 때문에 불행하셨죠? 이제 저에게서 자유로와지세요." 라는 아이들의 음성을 듣습니다. 누군가는 떠나갔고 누군가는 붙들었습니다. 떠나간 아이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저를 붙든 아이 손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힘겨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마법사가 이거 하러 왔나.. 차라리 요셉으로 태어날 것을.. 하기도 했습니다.

모성에 대한 공포/혐오.. 해결하지 않으면 결국 인류는 지구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게 되겠지요. 헤르메스님의 아이들에게 기대를 걸어 봅니다.

미미한 힘들이 만나서 내는 공명의 힘을 믿을 수밖에요. 멀린님과의 만남도 그런 면에서 대단한 의미입니다. 대마법사께서 주시는 격려와 영감을 먹고 이 미미한 머글본 마법사는 오늘도 힘을 냅니다. 감사합니다...^^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힘들만큼의 연쇄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많은 엄마들의 지나친 구속에 관련된 내용도 공감하구요. 피해를 엉뚱한 사람들이 받게되니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세상에 반이 여자도 반이 남자인데 남녀로 구분지어 이야기되는 것도 위험해보이구요

아이를 가두는 엄마들 또한 어그러진 구조의 피해자라는 점에서 더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공감합니다. 남근을 가지고 잇는 모성에 대한 공포.

아주 아주 잘 읽었습니다. 통찰력에 감탄했습니다. 저 역시 예전부터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코라의 잠긴 문이 부서지고 이번엔 오히려 엄마를 그 코라 속에 감금시켜 버린다..참으로 인상 깊습니다. 모성에 대한 공포/혐오는 여성에 대한 공포/혐오로 발전한다는 것도 공감합니다. 헤르메스님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을 아시는지요? 저는 그 감독의 작품들을 매우 흥미롭게 봤습니다. 그의 작품 안에서 발견되는 여성에 대한 모든 주제들이 때로는 버겁지만, 꼭 탐구해보고 싶은 영역입니다.

라스 폰 트리에... 휴우... 뭐라 말씀 드릴까요... 대학교 때 불법 복제한 "유로파" 비디오 테이프가 지금도 서가에 꽂혀 있습니다. 20대 때는 열 번도 넘게 본 듯... 이후 어렵사리 수소문해서 구해 보았던 TV 시리즈 "킹덤" 비디오 테이프들... 이후 브레이킹 더 웨이브, 어둠 속의 댄서까지는 탐닉 수준이었죠... 어둠 속의 댄서는 비요르크의 음악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데 도그빌 이후에는 왠지, 가까이 하지 않게 되더군요. 제가 나이가 들고 결혼이란 걸 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헐리우드와 만나면서 트리에 특유의 낡은 병원의 수술실 비린내 같은 분위기, 서늘함, 기괴한 유머 감각, 불안정한 떨림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달까요? 물론 후기에는 후기 나름의 매력이 있겠고 그걸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암튼, 저는 그랬습니다. 여성/모성에 대한 트리에의 태도는 그가 가진 "태생의 비밀"과 그것을 알게까지의 정황에 비추어 보면 이해되는 측면이 있죠. 어쨌든 휴우... 라스 폰 트리에라는 이름을 들은 지금 제 느낌은 "깊은 물" 가까이에 서 있는 느낌이네요.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저를 확 끌어당길 것 같은 심연 같은... 두려움...

아..많이 공감가는 댓글이네요. 저도 뭐라 말씀 드릴까요 ㅎㅎ... 저 역시 중딩때부터 비요르크 음악에 빠져있었습니다. 수술실 비린내 같은 분위기, 서늘함, 기괴한 유머감각, 불안정한 떨림..다 제가 추구하는 것이네요. 저는 그런 글을 쓰려고 합니다. 그래서 인지 이런 소통이 참 즐겁네요 ^^

솔직히 라스 폰 트리에는 꽤나 오래 잊고 있던 이름이었어요. 생각해보니 요즘은 좀더 건조한 서늘함(?)을 선호하는 쪽으로 취향이 바뀐 듯도... 이를테면 웨스 앤더슨 같은... 저도 오랜만에 추억에 젖은 즐거운 대화였어요. 자주 뵐게요~^^

웨스 앤더슨..제가 잘 모르는 감독인데요. 이제부터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화는 아실거에요. 로열 테넌바움, 문라이즈 킹덤, 부다페스트 호텔 같은...^^

분명 너 잘되라고 한 행위가
결국 모두에게 상처를 주고 해를 입히는 결과를 맺게 되니
참 아이러니하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미투운동에 대해서는 그 차제적으로는 긍정하지만서도...
괜한 불씨가 나지 않기를...

잘 보고 가요

자녀 잘 되라고 하는 행위야 별 문제겠습니까? 자신의 욕망을 아이에게 덧씌우는 것, 자신의 초조를 아이에게 투사하는 것이 문제겠죠. 그리고 그건 근본적으로 특정한 '엄마'의 문제라기보다 이 시대의 문제, 구조의 문제이기에 더 세심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귀한 의견 감사드립니다~

20대들의 여성혐오가 모성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해보니 풀리는 것들이 있네요. 이와 비슷한 글을 더 긴 것도 읽어보고 싶은데, 크리스테바를 읽으면 될까요? 엄마가 아이의 감옥이 되고, 다시 아이가 엄마의 감옥이 되는 이야기는 슬프면서도 너무 적절한 비유 같습니다.

네... 그런데 크리스테바 번역본들이 동문선에서 많이 나왔는데 그 시절 동문선 번역서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암호문 수준이라... ㅠㅠ

헤르메스가 어떤 사람인지...
또 정주행 해야할 분이 생겼군요...

내가 좋아 하는 핑크플로이드가 mother이라는 노래도 불렀네요, 처음 들습니다만 노래가 아주 좋네요

네... 명반 The Wall 앨범에 있는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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