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단편 - 터널속에서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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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장미는 과연 피어날 수 있을지 간조차 보지도 않고 그렇게 피어나고 있었다.




터널속에서


4년전 폐업신고를 마친 그 무렵의 나는 매일 집과 서점을 오가며 보이지 않는 쳇바퀴를 굴렸다. 집에서 서점까지는 도보로 10분. 중간에 새 주상복합단지가 들어서면서 조성된 메타세콰이어 길을 지나야 했다. 그 길 안에는 터널이 있었는데 입구에 들어서면 웜홀 같은 기분이 들어서 반은 장난으로 미래에 내가 도착할 장소에 포커스하곤 했다. 그 때는 좁은 원룸 생활이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내가 머무는 공간이 확장되는 것을 시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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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갈 책장이 없어서 포개어진 책들은 서재를 꿈꾸었고, 푹 꺼진 매트리스는 깨끗한 침실을 꿈꾸었다.



5월이 되면 터널 안에 넝쿨을 감아올린 장미나무가 수백 송이의 꽃을 피웠다. 합창하듯 한꺼번에 피어난 꽃들을 보자마자 황홀경에 빠져들어서 그 무렵만 되면 늘 서점에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기온이 점점 올라가면 꽃은 처연하게 시들어갔다. 빛 바랜 꽃잎을 밟으며 다음해를 기약했다.


그렇게 장미꽃을 보내고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새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같은 시간에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걸었지만, 두 눈은 작고 하얀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물티슈인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꽃봉오리였다. 친구들은 벌써 피고 졌는데, 이 어린 장미는 너무 늦게 혼자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장미는 죽도록 애를 썼을까?’
‘친구보다 늦어서 불안했을까?’



한참 그 앞에 서있었다. 문득 그 장미가 불안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한 것은 꽃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죽도록 애쓰지 않아서 죄책감이 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뒤쳐질까봐 불안한 것은 바로 나였던 것이다. 계절도 모르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친구가 없어도 꽃은 그냥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어린왕자라도 된 듯이 작은 장미에게 말을 걸었고, 매일 그 앞을 지나면서 활짝 피어나고 지는 과정을 지켜 보았다. 나도 햇빛에 몸을 맡기고, 바람에 몸을 맡기고, 비를 맞으며 그냥 피어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공간 확장은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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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서재를 얻었고, 침대는 침실을 얻었다.




오늘도 작은 장미를 만났던 날처럼 비가 내린다. 난 그날처럼 씨앗을 뿌리기엔, 꽃을 피우기엔 너무 늦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나도 그냥 피어날 것이다.







생각의 단편들


비, 데미안, K
어떤 혹등고래 위에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저장되는 것
꽃이 기다린다
파란 우연
산책자
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준 것
도착을 더듬으며
춤추는 생각들
종이 눈꽃을 노리는 시간
출발하기 위해 도착한다
비 맞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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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너무 좋은 글이에요.. 역시 보얀님!!!!

fenrir님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장미는 너무 예쁘게 피었다가 참 처참하게 진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올해는 때지나 늦게 핀 장미 한송이를 만났습니다.
마찬가지고 말을 걸어보았습니다.^^
나도 그때 뭔가 원하는 것을 생각해볼 걸 그랬을까요?
평소 그런 생각을 잘 하지 않아서, 그냥 꽃에게만 관심을 보였네요.ㅋ

꽃에게 말을 걸었다니 너무 귀여우세요!
자기 전에 원하는 걸 생각해보세요.
잠재의식이 그곳으로 데려다 줄거예요. ^^

오전내 만지작 거리던 사진이 있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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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눈을 오랫동안 기다렸나봐요. 멋진 사진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 ^^ 좋은 공간들이 생겼군요

감사합니다:)

마음은 참 신기한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작은 마음의 변화로도 내 삶이 바뀌게 되기도 하니까요. 좋은글 읽고 가요!
by효밥

마음의 나비효과같아요. 감사합니다:)

꽃이 피어나는 것에 전념해야겠군요. :D

미래에 원하는 모습에 포커스하신다면 이루실 수 있을 거예요. ^^

보얀님 포스팅 에서 뭔가 힘찬
기운이 느껴져요.
감사합니다^^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니 감사합니다:)

와 충만한 감성! 집이 꽃처럼 활짝 피었군요~~^^

쏠메님도 늘 꽃처럼 피어나시길!

늦게 피어난 만큼 늦게 지겠지요. 조금 느려도 괜찮은 거 같아요.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요. :)

맞아요 느려도 괜찮아요. 느린 것이 사실 빠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

장미입장에서는 지고 피고하는게 일상이라 뿌리가 땅에 연결되어 있는한 영혼은 죽지않고 자고 일어나고를 반복한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ㅎㅎ

그러고보니 꽃의 입장에서는 정말 자고 일어나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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