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단편 - 터널속에서
작은 장미는 과연 피어날 수 있을지 간조차 보지도 않고 그렇게 피어나고 있었다.
4년전 폐업신고를 마친 그 무렵의 나는 매일 집과 서점을 오가며 보이지 않는 쳇바퀴를 굴렸다. 집에서 서점까지는 도보로 10분. 중간에 새 주상복합단지가 들어서면서 조성된 메타세콰이어 길을 지나야 했다. 그 길 안에는 터널이 있었는데 입구에 들어서면 웜홀 같은 기분이 들어서 반은 장난으로 미래에 내가 도착할 장소에 포커스하곤 했다. 그 때는 좁은 원룸 생활이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내가 머무는 공간이 확장되는 것을 시각화했다.
들어갈 책장이 없어서 포개어진 책들은 서재를 꿈꾸었고, 푹 꺼진 매트리스는 깨끗한 침실을 꿈꾸었다.
5월이 되면 터널 안에 넝쿨을 감아올린 장미나무가 수백 송이의 꽃을 피웠다. 합창하듯 한꺼번에 피어난 꽃들을 보자마자 황홀경에 빠져들어서 그 무렵만 되면 늘 서점에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기온이 점점 올라가면 꽃은 처연하게 시들어갔다. 빛 바랜 꽃잎을 밟으며 다음해를 기약했다.
그렇게 장미꽃을 보내고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새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여느 때와 같은 시간에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걸었지만, 두 눈은 작고 하얀 것을 발견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물티슈인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꽃봉오리였다. 친구들은 벌써 피고 졌는데, 이 어린 장미는 너무 늦게 혼자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장미는 죽도록 애를 썼을까?’
‘친구보다 늦어서 불안했을까?’
한참 그 앞에 서있었다. 문득 그 장미가 불안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한 것은 꽃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죽도록 애쓰지 않아서 죄책감이 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뒤쳐질까봐 불안한 것은 바로 나였던 것이다. 계절도 모르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친구가 없어도 꽃은 그냥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어린왕자라도 된 듯이 작은 장미에게 말을 걸었고, 매일 그 앞을 지나면서 활짝 피어나고 지는 과정을 지켜 보았다. 나도 햇빛에 몸을 맡기고, 바람에 몸을 맡기고, 비를 맞으며 그냥 피어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공간 확장은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책은 서재를 얻었고, 침대는 침실을 얻었다.
오늘도 작은 장미를 만났던 날처럼 비가 내린다. 난 그날처럼 씨앗을 뿌리기엔, 꽃을 피우기엔 너무 늦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나도 그냥 피어날 것이다.
생각의 단편들
비, 데미안, K
어떤 혹등고래 위에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저장되는 것
꽃이 기다린다
파란 우연
산책자
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준 것
도착을 더듬으며
춤추는 생각들
종이 눈꽃을 노리는 시간
출발하기 위해 도착한다
비 맞는 시간
아웅~ 너무 좋은 글이에요.. 역시 보얀님!!!!
fenrir님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장미는 너무 예쁘게 피었다가 참 처참하게 진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올해는 때지나 늦게 핀 장미 한송이를 만났습니다.
마찬가지고 말을 걸어보았습니다.^^
나도 그때 뭔가 원하는 것을 생각해볼 걸 그랬을까요?
평소 그런 생각을 잘 하지 않아서, 그냥 꽃에게만 관심을 보였네요.ㅋ
꽃에게 말을 걸었다니 너무 귀여우세요!
자기 전에 원하는 걸 생각해보세요.
잠재의식이 그곳으로 데려다 줄거예요. ^^
오전내 만지작 거리던 사진이 있었는데, ...
꽃이 눈을 오랫동안 기다렸나봐요. 멋진 사진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 ^^ 좋은 공간들이 생겼군요
감사합니다:)
마음은 참 신기한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작은 마음의 변화로도 내 삶이 바뀌게 되기도 하니까요. 좋은글 읽고 가요!
by효밥
마음의 나비효과같아요. 감사합니다:)
꽃이 피어나는 것에 전념해야겠군요. :D
미래에 원하는 모습에 포커스하신다면 이루실 수 있을 거예요. ^^
보얀님 포스팅 에서 뭔가 힘찬
기운이 느껴져요.
감사합니다^^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니 감사합니다:)
와 충만한 감성! 집이 꽃처럼 활짝 피었군요~~^^
쏠메님도 늘 꽃처럼 피어나시길!
늦게 피어난 만큼 늦게 지겠지요. 조금 느려도 괜찮은 거 같아요.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요. :)
맞아요 느려도 괜찮아요. 느린 것이 사실 빠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
장미입장에서는 지고 피고하는게 일상이라 뿌리가 땅에 연결되어 있는한 영혼은 죽지않고 자고 일어나고를 반복한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ㅎㅎ
그러고보니 꽃의 입장에서는 정말 자고 일어나고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