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얀's 에세이] 페드로씨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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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차가게 주인들은 사람보다 홍차를 좋아한다. 커피가게 주인들은 커피보다 사람을 더 좋아한다. 나는 커피보다, 사람들보다, 나 자신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커피가게를 그만둔 것 같다.


 가게에서 많은 사람들을 스쳐보냈다. 스트릿패션 매거진에 단골로 등장하는 아가씨, 에스프레소 한 잔을 하기 위해 매일 저녁 출근도장을 찍는 할아버지, 화요일마다 책을 선물해주는 화요일의 손님, 시 한구절을 적어놓은 종이를 매번 훔쳐가는 여자손님... 나에게 호감을 가졌던 사람들, 그리고 내가 호감을 가졌던 사람들. 나는 친구가 되고 싶었던 그들을 잡지 않고 보내주었다.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욕심보다 언제나 부끄러움과 자존심이 앞섰다.

 그 시절 언제나 기다려지는 손님이 한 명 있었다. 모델같이 늘씬한 그녀는 멋지게 차려 입고 혼자 구석 테이블에 앉아 민음사에서 나온 번역소설을 읽었다.
 그녀와 영화나 책 얘기를 하다가 언제 한번 따로 만나자는 말을 하고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그녀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고, 나는 전화번호부에 그녀의 이름 대신 '페드로씨'라고 저장했다.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지연되었다. 내가 쉬는 날에는 그녀가 출장을 갔고, 그녀가 와인을 마시고 싶은 저녁에 나는 원두주문이 밀려 새벽까지 콩을 볶아야했다. 참지 못한 그녀가 늦은 밤에 닫힌 가게의 문을 밀고 들어와서, "언니, 우리 와인 한잔만 해요." 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당장 기계를 끄고 그녀와 와인을 마셔야했다. 그 때는 커피를 맛있게 볶아내는 것이 내 인생의 중대한 사명처럼 여겼나 보다.
 번번이 무산되는 약속에 기분이 조금 상해서, 그리고 내가 세심하게 로스팅해서 블랜딩한 커피를 매번 남기다니 예의가 없다는 결론을 내고 나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지웠다.



 최근에 한 쇼핑몰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쳤다. 5년이라는 공백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1초도 안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냥 지나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내 시선을 느끼고 뒤돌아 본 그녀가 나에게 아는 척 했다. 우린 그 자리에서 약속시간을 잡았다.

 그녀와 만나서 알게된 사실은 내 좁은 마음을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더러 잘 마시지도 못했다. 그러나 가게가 너무나 멋져서 집이 먼 데도 불구하고 자주 들렀다고 얘기해주었다. 우리는 그 날 와인 2병을 비우면서 많은 얘기를 했다. 자정이 넘어서 헤어졌는데 신기하게 그 시절 그렇게 미쳐있었던 영화와 책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보얀's 에세이


쓴다는 것은 시냅스를 연결하는 것
관계의 견고함은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집사의 편지
베니스에서 얻은 자유
첫사랑
데미안을 만나는 시간
파리에서 해 볼 6가지
요리하는 즐거움
시를 읽는 시간
당신에게 쓰는 편지
로레인 루츠가 가르쳐 준 것
질문 속의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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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 여자분을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멋지고 깨끗한 마음씨를 가지셨다는 게 느껴져요! 그리고 보얀 님과 가게를 정말 좋아했나봐요 ㅎㅎ

네, 정말 멋져요. 그분과 다시 재회하게된 걸 정말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아 좋아요...
커피향이 나다가도 와인 맛이 감도는 이야기...

이제 일이 아니니까 커피도 와인도 더 좋아하게 되었어요.감사합니다^^

커피 볶다 마시는 와인. 그 우연한 만남이 율동같네요.

우연한 만남은 언제나 놀라움을 줍니다^^

왠지 소설 한편을 보는듯한 기분이네요
잘보고 갑니다.

소설 한편 같았다니 감사합니다^^

와 보얀님 에세이 너무 좋아요 ㅠㅠ 글을 읽는데 영화의 한장면 처럼 장면이 떠오르는거 같아요~

쪼야님 이제 좀 괜찮으신가요? 오렌지색 머리카락프로필을 볼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네요^^

네 보얀님~^^ 걱정해 주신 덕분에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짐승같은 회복력으로 벌떡!!

만날 인연은 어떻게든 다시 만나나 봐요^^
저도 쉽게 보냈던 인연들이 잠깐 머리 속에 떠오르네요. 앞으론 조금 더 노력해봐야지.. 라고 생각해봅니다ㅎㅎ

지금의 인연, 앞으로 다가올 인연을 소중하게 챙기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글을 읽는 동안 내내 머릿속에 잘 그려지는 것 같아요. 그 분은 멋을 아는 분이셨군요 ㅎㅎ

네. 멋을 아는 사람은 감정의 결이 섬세해서 만나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 겉아요^^

사람과의 만남에서 '人象'이 늘 그렇습니다. 서로간의 대화나 소통 속에서 자신의 마음에 印을 새겨놓기때문에 그것이 잘 남고 또 문제는 이 印이 번져서 이 본래의 印象이 변질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관계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요즘은 사람을 만날 때 매번 처음 만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대하려고 해요. 그러면 관계가 좀 편해지는걸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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