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에세이] 데미안을 만나는 시간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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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락사스는 당신의 어떤 생각에 대해서도, 어떤 꿈에 대해서도 거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흠잡을 곳 없이 평범한 사람이 되면 당신 곁을 떠나버릴 것입니다. 그는 당신을 버리고 자기의 사상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그릇을 찾아갈 겁니다."



  중학교 일학년 때 처음 데미안을 읽었다. 손바닥만한 마당문고 시리즈가 줄지어 있는 동네서점에서 제목이 근사해서 뽑기를 하듯 집은 책이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앞면이 닳아서 찢어질 때까지 읽을 책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 시절 나는 불운한 계절들을 힘겹게 지나고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보름이 지났을 즈음 반장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그게 화근이었다. 담임은 깡마르고 발음이 엉망인 영어선생님이었는데, 매사에 불만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가 차라리 무서운 사람이었다면 차라리 잘 버틸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기분이 좋다가도 마음이 안드는 구석이 보이면 악담을 퍼붓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화가 나면 말하기 전에 눈썹뼈 위에 튀어나온 피부부터 위로 쏠렸는데, 나는 항상 그 부위에 주의를 기울였고 그의 종잡을 수 없는 기분때문에 내 어깨는 긴장으로 굳어있었다. 그런데 그의 심기를 거슬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환경미화전을 위해 학급비를 모았는데, 나는 그 날 오전에 거둔 학급비를 점심시간에 몽땅 도둑맞아버렸던 것이다. 공포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5만원 정도 되는 돈이었는데, 나에게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 당시에 아버지가 실직상태라 집안형편이 어려웠으므로 엄마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5만원만 구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었다. 이틀밤을 꼬박 샌 나는 교무실에 찾아가서 사실대로 말했다. 담임선생님은 묵묵히 이야기를 끝까지 듣더니 차가운 말투로 교실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맞을 각오를 하고 갔으므로 나는 이 정도에서 끝나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 다음날부터 진짜 벌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그 날부터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치 없는 사람 대하듯이. 조례나 종례, 혹은 교무실에서 그가 나에게 말할 때는 언제나 시선을 내리깔고 교무수첩을 보며 말했다. 그 때부터 악몽에 시달렸다. 어린 싱클레어처럼.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적을 올려도 다른 학과목 선생님이 나에 대한 칭찬을 해도 담임선생님은 영원히 나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나는 담임선생님이 죽도록 미웠다. 동시에 한없이 강해지고 싶었다.

"네가 그 녀석을 두려워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라는 걸 너도 알지, 그렇지 않아? 두려움이 우리를 망치게 하는 거야. 하루빨리 벗어나야해. 네가 진짜 사나이가 되려면 그 두려움을 벗어던져 내야 해. 알겠지?"


  얼마나 싱클레어에게 이입했는지 소설 속의 데미안이 꿈속에 등장한 적도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시절 사춘기 소녀였으므로 진짜 사나이같은 건 잘 모르겠고, 어쨌든 강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더 책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린 싱클레어, 들어봐! 나는 떠나지 않으면 안돼. 자네는 아마 언젠가 나를 다시 필요로 하겠지. 크로머나 그 밖의 때문에 말이야. 그땐 네가 나를 부른다고 해서 나는 그렇게 쉽게 말이나 기차를 타고 갈 수 없을 거야. 그럴 때 너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 귀를 기울여야 해. 그러면 내가 너의 내부에 있음을 알게될거야."


  데미안의 말대로 나는 내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언어의 형태가 아닌 어떤 의식을 느끼곤 했는데, 그는 나에게 '너는 미래에 기쁨으로 가득찰거야.'라고 말해주었다.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불에 데인듯이 놀랐다. 불행의 정중앙에 있는 나에게 그 메세지는 너무나 사악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악마의 목소리가 아닐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강해지고 싶은 마음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두려워하고 있기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년에 데미안을 다시 읽었다. 물론 마당문고판 데미안은 사라진지 오래고 언젠가 읽으려고 사두었던 초판표지를 그대로 살린 하드커버를 펼쳤다. 그날 데미안을 다시 읽고나니 갑자기 캔들명상을 하고싶었다. 방의 불을 끄고 캔들에 불을 밝힌 후 불꽃 안의 가장 어두운 심지를 보며 포커스하고 있는데, 문득 온몸을 휩싸는 기쁨을 느꼈다. 그 순간 나는 그 불운한 시절의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너는 미래에 기쁨으로 가득찰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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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오늘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levoyant님의 에세이는 언제나 차분하면서도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데미안은 저도 중학교 때 처음 읽었는데 정말 다 읽었는데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계속 반복해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 중학교 때 그 담임선생님 진짜 이상하네요 완전 못됏네요 진짜 훔쳐간사람이 잘못이지ㅠㅠㅠ!!! 와 사랑의 반댓말은 무시라고 하는데 정말 내내 무시를 당했으니 너무 마음이 아프셨겠어요 그 어린나이에......ㅠㅠㅠㅠ마지막 소절 읽고 소름 돋았어요..너는 미래에 기쁨으로 가득찰거야..! levoyant님이 미래에 기쁨으로 가득차서 정말 제가 기분이 좋습니다ㅠㅠ~!

글로 풀어놓으니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저에겐 너무나 감사하게 느껴진답니다^^ 작가에겐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밑천이거든요. 오늘도 읽어주시고 정성스러운 댓글을 달아주셔서 기뻐요! 아이러브비어님도 언제나 기쁨으로 가득차시길 기원합니다.

같은 책을 두고 정반대의 기억이 있다는 게 재밌습니다. 저는 집 책장에 꽂혀 있던 데미안을 보고 '이름이 뭐 저래?' 이러고 무시했거든요. 야간비행이나 죄와 벌도 비슷한 이유로 외면했었죠😂
늘 느끼는 거지만 levoyant님의 문체나 화자의 사유 방식이 정말 매력적입니다. 자주 뵐 수 있어 기쁘네요 :)

kimthewriter님 감사합니다.
글쓰기를 완전히 놓고있다가 스티밋에서 시작한지 얼마안되어 걱정이 앞서곤하는데 매번 격려해주셔서 큰 힘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kimthewriter님은 어떤 책에 이끌렸을까 궁금해집니다^^

저는 모비딕이요. 백경이라는 제목과 함께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 흰고래와 포경선이 얽혀 있는 사실주의적 그림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죠. (물론 그 제목도 당시엔 이게 뭐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은하영웅전설이라는, 라이트노벨의 시조격인 작품을 열정적으로 사 모았습니다 ^^; 대의민주주의 모순을 그 책에서 배웠지요😂

바로 모비딕이었군요. 푹 빠져서 읽은 기억이 있어요. 고등학교때 엄마가 학원세계문학전집을 사주셨는데 '백경'이란 제목이었어요^^ 어린 마음에 허먼 멜빌의 이력을 보고 놀라서 소설을 쓰려면 선원생활도 하고 다양한 직업을 경험해야지, 하고 결심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선생님이 참 못났네요.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은 세계에서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강한 표현이겠지요. 사실 5만원에 영혼을 판 것은 바로 그 선생님일 것입니다. 5만원 짜리 존재인 것이지요.

자기실현적 예언이 행복하게 실현되었길, 앞으로도 그러길 바랍니다. 어린 시절의 자신을 토닥토닥 꼭 안아주세요. 그동안 잘 이겨냈고 잘 버텨왔다고 말이지요. 고생했어요.

맞아요. 그건 자기실현적 예언이었어요.
그 때의 경험으로 사소한 일로 지나치는 사람이라해도 꼭 눈을 보고 얘기를 하게 된답니다^^

방의 불을 끄고 캔들에 불을 밝힌 후 불꽃 안의 가장 어두운 심지를 보며 포커스하고 있는데, 문득 온몸을 휩싸는 기쁨을 느꼈다. 그 순간 나는 그 불운한 시절의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너는 미래에 기쁨으로 가득찰거야."

지금 이 글을 읽자마자 소름이 돋았어요. @levoyant님께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요?! 저도 미래에 기쁨으로 가득 차길 절실하게 소망해요

르바님은 지금 이 순간 기쁨 그 자체입니다^^
미래는 말할 것도 없구요!

어린 학생한테 그런 치사한짓을.. 수준 이하의 어른들 참 많아요ㅠ

나이먹는 것과 철이 드는 것이 전혀 다르다는걸 그때 알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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