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에세이] 시를 읽는 시간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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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과금을 다 지불했다. 이번 달 쓸 생활비를 다 벌어놓았다. 딸기 한 상자를 사놓았다. 기쁨은 이제 시작된다.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앉아 한 페이지씩 읽을 시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나에게 시를 읽는 시간은 소설을 읽는 시간과 다르다. 책장에서 시집 한 권을 고르는 것은 품이 드는 일이다. 시는 마음을 먹고 억지로 시간을 내어야 읽어진다. 시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을 꼽아보니 일 년에 대 여섯 번 정도인데, 정신적으로 큰 고민이 없고 월말이 되기 전에 몇 달 치 생활비를 다 벌어놓은 풍족한 날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되면 나는 시를 읽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같다. 알고 보니 시 한 페이지는 나 자신에게 바치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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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전히 투자로 먹고 사는 나는 심리적으로 예민한 시기가 주기적으로 닥치는데 그 때는 시를 읽을 정신이 없어지게 된다. 그런데 소설은 오히려 읽힌다. 특히 폭락장에서 전 계좌가 푸른색으로 멍들어갈 때는 어김없이 장편소설을 골라서 읽는다. 왜 그런지 생각해보니, 소설 속의 갈등상황에 푹 빠져있으면 불안한 심리가 같이 녹아내리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시는 친절하지 않다. 시를 읽으려면 내가 적극적으로 행동해야한다. 시인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들이 화음을 만들면서 끝없이 달려오는데 노래는 들리지 않는 기분이다. 그러면 그 노래를 듣기 위해 반물질 형태의 화음을 직접 내 악기로 연주하는 수고를 해야하는 것이다. 연주가 썩 만족스러울 때 느끼는 기쁨은 소설 한편의 감동을 능가할 때도 있다.

 오늘은 모처럼 시집을 꺼내 읽었다. 시 읽는 날이 다시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마음껏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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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 깔려진 시의 단어들을 보며 내가 시를 해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시가 나를 해석의 바다에 던진 것인지 종종 헛갈릴 때가 있습니다. 한 페이지의 시는 한 페이지의 세계, 페이지가 엮이고 엮어 세계를 이룬다면, 한페이지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운일까요.

음.. 이훤 시인의 시는 그래도 상당히 친절하고 오롯한 세계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

한 페이지를 쓸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행운일까요.
시 한 편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이고 시인은 그 세계의 하느님입니다^^

시 읽는 여유를 저도 누려봐야겠습니다. 폭락장에서 장펀소설을 읽는다는 게 대단하네요. 강심장 인정요ㅎ

삼복더위에 매운 낙지볶음을 먹고 싶은 마음과 비슷한 것 같아요^^

시가 주는 여운이 참 길게 남아서 좋긴 한데 해석을 어찌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게 시인지라 ㅎㅎ 오히려 소설을 읽을때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전 시가 더 어려워요 ㅜㅜ

저도 시를 대할때 에너지가 더 필요해요^^

저는 이상하게 levoyant님 글이 시처럼 읽힙니다-
저도 시를 좋아합니다 :) 그런데 요즘 운동이 불쑥 들어와서...
생각난 김에 한 편 읽고 자야겠습니다.

시를 좋아하시는군요. 민엔젤님 글에서도 시의 운율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는데 신기하네요^^

시는 불친절하고 심지어 까칠한 그녀와도 같죠.
전 그런 여자가 좋아요.
나를 사유의 허공으로 밀어버리는 한편의 시처럼-

맞아요^^ 시는 사유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고전도 비슷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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