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별을 본다. 외롭지 않으려고. / 011

in #kr-pen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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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the writer










   내가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삶을 시작하기까지는 순탄치 않은 과정이 있었다. 퇴원 후 얼마간은 고향인 새크라멘토에서 통원 치료를 받았다. 집은 그대로였다. 세월이 새것과 다름없던 집을 완전히 헌것으로 만들었다는 점만 빼면. 그에 반해 내 방은 사고 당시의 시간에 멈춰 있었다. 지미가 내 영역을 건드리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한 덕분이었다. 닌텐도와 브라운관 TV와 보드게임과 야구 글러브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창가에 놓인 망원경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감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나는 메마른 남자였고 엄마 역시 긴 세월 동안 감성 지수가 서서히 떨어졌으니 충돌은 예견된 것이었다. 말문이 터졌다는 건 마음껏 말다툼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언제나 험악한 분위기가 집안을 떠돌았다. 싸움의 발단은 늘 엄마에게 있었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엄마는 20여 년간 누워 지낸 내가 마음껏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나를 닦달하고 내몰았다.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다만.”
   엄마는 늘 그렇게 포문을 열었다.

   “지금도 많이 늦었다는 건 알고 있지? 진로도 결정해야 하고, 할 일이 산더미야. 빨리 검정고시부터 마쳐야 뭘 하더라도 하지. 대학원은 갈 거니?”

   이런 성화는 차라리 들을 만했다. 참을 수 없는 건 그 이유였다.

   “지미가 뭘 바라고 한 일은 아니다만, 그래도 네가 잘 되면 더 보람 있지 않겠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녀석 아니었으면 애초에 내가 이렇게 될 일도 없었는데! 인생의 황금기를 그 자식 때문에 병신 같이 날렸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나는 그 길로 독립을 선언하고 짐을 싸서 나섰다. 샌프란시스코행 버스를 타고 무작정 여자친구의 집에 쳐들어갔다.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물으며 수지 큐는 파란 눈동자를 번뜩였다.

   “엄마랑 싸웠어.”
   나는 바닥에 가방을 던져 놓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가출한 거야? 어린애처럼?”

   어린애라. 그래, 가출은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다. 나는 그동안 하지 못한 일을 이런저런 핑계로 다 해 보려는 속셈인가? 아무렴 어떠하랴.

   “어린애가 이런 짓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녀를 잡아끌어 침대에 쓰러뜨리고 바지를 벗겼다. 그렇게 내 인생의 첫 동거가 시작되었다. 우린 매일 맛집을 찾아다니고 영화를 보고 쇼핑을 하고 해변을 산책했다. 그녀가 일하러 간 낮에는 열심히 몸을 만들었다. 전에 없던 자극을 받은 근육은 놀라 비명을 지르며 부풀어 올랐다. 심폐 기능도 날이 갈수록 좋아져서 밤마다 그녀를 점점 더 만족시킬 수 있었다. 심장과 폐에 무리를 주면 안 된다고, 기흉이니 뭐니 위험이 있다고 지미가 경고했다. 거기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잔소리를 매번 덧붙였다. 부러워서 하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어쨌든 결론은 수지 큐에게나 나에게나 만족스러운 일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쭉 거기 있을 생각이 아니었다. 모름지기 남자란 여자에게 빌붙어 사는 추태를 보이느니 산에서 노숙이라도 하는 게 낫다는 내 지론을 따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뭐 능력도 안 되는 상황이었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주와 종말의 무게에 눌려 살던 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들떠 있는 게 어쩐지 지나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건 좋지 않은 징조였다. 우리 앞에 놓인 길에는 끝이 있기 마련인데 그곳을 향해 가속도를 붙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랑과 열정은 장작을 태우는 것과 같다. 장작을 많이 넣으면 더 빨리 더 뜨겁고 더 크게 불꽃을 키울 수 있지만 오래갈 수는 없다. 우리가 손에 쥔 장작은 분명 유한하므로.

   약을 받으러 센터에 들렀을 때 지미는 차라리 자기 맨션에서 같이 살자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생각지도 못한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나는 아파트를 얻을 테니 돈을 꿔달라고 역으로 제안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가 걱정하시니 나랑 같이 살자는 건데, 이제 아예 혼자 살겠다고?”

   그래, 그래, 합리적인 지적이군. 하지만 지미는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내게는 마법의 멘트가 있으니까.

   “넌 내게 빚이 있잖아.”

   지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몇 가지 조건을 붙여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검정고시를 준비할 것, 하루에 한 번 이상 엄마에게 전화할 것, 자기가 전화하면 반드시 받을 것. 당연히 마음에 안 드는 조건들이었으나 감수할 가치가 충분했다. 인간에게 자유 외에 달리 맞바꿀 수 있는 가치가 어디 있겠는가. 엄마는 그나마 내가 지미와 같은 도시에 산다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어차피 약을 받으러 센터에 정기적으로 가야 하니 썩 나쁜 결정은 아니었다. 예상외로 화를 낸 건 수지 큐였다. 잠시 빌렸던 서랍장에서 옷을 꺼내 정리할 때였다. 그녀는 문가에 서서 내 뒤통수에 끝도 없는 못마땅한 눈빛을 쏘았다.

   “이해를 못 하겠어. 왜 굳이…….”

   그녀는 이미 한 차례 했던 얘기를 되풀이했다. 지금 좋은데 왜 굳이 상황을 바꾸려고 하느냐, 자기가 싫어진 거냐, 왜 하필 그 동네냐. 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한 귀로 흘려들었다.

   “누가 보면 우리 헤어지는 줄 알겠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난 그 동네 안 갈 거야.”

   그녀는 내가 방을 얻은 곳조차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럼 열쇠는 안 줘도 되겠네?”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거실로 휙 나가 버렸다. 나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가방을 마저 싸는 데 열중했다. 원체 물건이 많지 않아서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거실로 나가니 그녀는 눈도 안 마주치고 소파에 앉아만 있었다.

   “대신 이게 있으니까.”

   나는 수지 큐의 집 열쇠를 흔들어 보였다. 마침내 그녀가 피식 웃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우리는 한 번 더 소파를 더럽혔다. 그녀가 여전히 헐떡이는 숨 사이로 말했다.

   “나도 예언 하나 할까? 넌 다시 돌아올 거야.”

   그 말이 강렬한 데자뷔를 일으켰다. 그녀의 저주를 뒤로하고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가 되었다. 센터에서 퇴원하고 꼭 반년째 되는 날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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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 큐면 그 굉장히 단순한 가사의 옛날 팝송에서 따오신건지...ㅎㅎ 항상 소설 쓰기를 시도해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는데 잘 읽고 갑니다!

에공... 우리의 주인공이 심리적으로 많이 불안한 상태네요... 20년 동안 감금증후군에 빠져 있었으니 그렇다치더라도, 아직까지 지미를 원망하나 보네요... 사고는 음주운전자 때문일텐데... 얍삽하게 지미의 죄책감을 너무 이용해먹는듯. ㅠㅠ
그래도 수지 큐가 주인공을 많이 사랑하나 보네요!
기꺼이 동거도 허락해주고! 그리고 간다니까 서운해하구...
성격이나 뭘로보나 그리 매력적이진 않은 것 같은데.. 얼굴이 무지 잘생겼나?? ㅎㅎㅎ

음... 잘생기긴 했습니다.

오늘 이 글을 발견하고 1회부터 정신없이 읽었어요. 사실 제 전 직장동료가 갑자기 쓰러져서 근 1년간 마비상태에 있다가 회복되었거든요. https://en.wikipedia.org/wiki/Guillain–Barré_syndrome 이라는 병이었어요.

그 동료가 깨어났던 날 적었던 글이에요...

제 옆자리 동료 John이 어느날 작은 전자 온도계를 들고 왔습니다. 그 온도계에는 외부 온도를 잴 수 있는 긴 probe가 달려 있었지요. 그는 자기 자리에 온도계를 놓고, 큐비클 벽 넘어 제 자리에 probe를 놓고서 매일 아침 제게 "현재 온도를 맞춰보라"고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 John이 회사를 떠나기로 결정하고나서는 그 온도계를 제자리에 두고 probe를 그의 자리에 놓은 뒤 제가 아침마다 "현재 온도를 맞춰보라"고 농담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John이 쓰러졌지요.
응급실에서 아직 코마에 빠져있는 John을 방문했을 때, 그가 들을 수 있는지도 모르는채 저는, "어서 일어나서 현재 온도를 맞춰보라"고 얘기를 하고 돌아왔었습니다.

방금 John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현재 온도는 화씨 74.9도 아니냐?"고 합니다. 현재 온도는 화씨 75도 였으니 거의 맞췄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증상을 보니 무서운 병이군요. 그런데 기적 같은 일화와 함께 깨어나셨다니...! 현실의 기적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을 때가 있습니다. 정주행과 해피엔딩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멋진 소설 감사합니다!

아....... 저까지 안도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네, 이게 벌써 2012년의 일이네요...

현실에서도 이런일이!!
게도님의 동료분도 세상을 다시 살고 계시는군요.
정말 소설같은 일이라 글로만 읽고있는 제게도 말못할 감동의 느낌이 몰려옵니다.

갑자기 John이 보고 싶네요, 내일 연락해봐야겠어요 ^^

읽으면서 소름 돋고, 울컥 했어요. 정말 이런 일이 있다니 너무 놀라워요.

네, 이런 기적같은 일도 겪어보네요.

저는 그래서 이 소설이 더 확 다가와요 ㅎㅎ

다행입니다. 이런 일이 현실에..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사고인데, 제 동료의 경우는 갑자기 걸렸어요. 감기 걸린 것 같다고 해서 제가 병원에 데려다 줬거든요...

정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군요. 부디 그 동료분이 건강하셨으면하네요.

이젠 많이 좋아졌어요. 다음 주에 만나기로 했어요 ㅎㅎ

남동생이 대학때 자취방 얻고 싶어할때가 생각나는군요.
자유를 얻기위해서는 독립이 가장 절실한걸까 . 그러고보니 결혼 전 독립은 자유를 향한 첫번째 발걸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내 신혼부부들이 겪는 문제 중에 결혼 전 독립 생활이 없어서 비롯되는 것들이 꽤 있더군요. 자신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기 위해서도 독립은 한 번쯤 경험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굿모닝 입니다
ㅎㅎ재미있게 읽었습니다
19금까지는 아니어도 ㅎ 므 흥미진진합니다
다음을 기대합니다^^

19금은 결정적일 때를 위해 아껴둬야죠 :)

부지런하신 김작가님 ㅎㅎ

더 부지런해야 하는데 말이죠...

너무 재미있어요~~ 꼭 조너선 프랜즌의 [인생수정]의 ‘칩’ 캐릭터가 떠오르기도 하고, 참 참.. 1회 읽을 때는 꼭 하루키소설 도입부 같기도 했어요! 멋있다는... 오늘은 야사시한 분위기로... 아침부터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칩도 불평불만이 많은 인물인가 보네요ㅋㅋ 재미있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뵈어요 :)

사지에서 돌아오니 현실이 기다리는군요..ㅋ
자존심이 강한 친구라 뭔가 해볼것 같지만 수지큐의 말처럼
한번 쓴맛 보고 돌아올것도 같네요 ㅎㅎ

역시 쓴맛을 봐야 하는 걸까요ㅋㅋ

김작가님 다음회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침 나왔어요ㅋㅋ

ㅎㅎㅎ 흥미진진한 전개네요ㅎㅎㅎ
너무 좋고 재밌습니다 :D
벌써 1회가 끝나다니요
읽는데 금새 다 읽고, 더 없어서 아쉬운 글이네요 ㅎ

tip!

다음 회 올렸습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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