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

in #kr-art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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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젯소칠이 끝난 캔버스 위에 최초로 붓이 화면과 만난다. 그림의 시작부터 완성까지의 과정 중 가장 짜릿한 순간이다. 그리고 내 붓질로 하얀 평면 위에 새로운 세계가 점점 구축되기 시작한다. 나는 이렇게도 그릴 수 있고 저렇게도 그릴 수 있다. 물론 그림이 항상 내 의도대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은 내 눈과 손의 판단으로 만들어진다. 비록 그림 속 작은 세상일 뿐이지만 나는 그 세상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언제라도 수정할 수 있다.


잠시 창밖을 내다본다. 희뿌연 하늘 아래 거대한 북한산 자락이 보인다. 시선을 낮추면 갈색 지붕의 빌라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고, 박스형의 빌딩들은 근경을 차지하고 있다. 집 밖을 나가 버스에 오른다. 버스가 부암동 언덕을 내려갈 때면 빽빽한 빌딩들로 가득한 서울의 전경이 보인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내가 바라보는 것에 대한 감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답답한 회색빛 도시라든지 혹은 멋있는 대도시의 전경이라든지….


하지만 막상 도심 속 광화문이나 종로 한 가운데에 서 있을 때에는 내 존재가 한순간 보잘것 없어지고 도시에 대한 판단이 불가능하다. 이 모든 것은 내가 판단하기에는 너무 방대한 것이며, 마치 북한산을 볼 때처럼 이 수많은 빌딩들은 마치 태초부터 있어온 것 같은, '주어진 것' 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모든 도시 계획과 건축물들은 분명히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디자인된 것임을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 바로 '사회'다. 도시에 존재하지만 그림이나 건축과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무슨 사연 때문인지 사람들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울다가 웃는다. 화를 내며 크게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비웃음과 조롱으로 타인을 냉소하거나 무관심으로 응대하기도 한다. 한쪽에서는 권력투쟁이, 한쪽에서는 시민단체의 분주한 움직임이, 한쪽에서는 이어폰을 낀 채 횡단보도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캔버스 앞에서는 전지전능했던 내 입지가, 도시 한복판의 광경들 사이에서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은 마치 단단히 굳어 있는 '주어진 것들' 투성이다. 세상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거대하며, 하물며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수정하기에는 너무 강력해 보인다. 그림을 바꾸는 행위가 곧 사회를 바꾸는 행위라면 나에겐 가장 쉽고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와 유리된 채 그림만을 바꾸는 사람이라면 나는 불행할 것이다.




이 글을 2014년에 썼던 걸로 기억한다. 광화문 광장을 구경꾼처럼 자주 기웃거렸던 시기다. 마지막 문장을 언제나 마음에 품고 실천하려고 하지만 실은 자주 까먹는다. 나는 언제나 다짐하고 언제나 잘 잊는 사람이다. 이렇게라도 스팀잇에 박제해서 상기시켜보고 싶다.




@thelump




최근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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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예술가시군요!!!!!!!!!!!!!!!!!

ㅎㅎㅎ 너무 거창한 표현이십니다.

잘 읽고 보고 갑니다. 정말 혼이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숲과 나무를 좋아하시나봐요. 저도 글에선 저만의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존재여서 글 쓰는 것이 좋습니다. 느끼는 바가 많네요.

특히 햇빛 강한 날의 숲과 나무에 비춰지는 그림자를 좋아합니다. 시린님도 글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계시죠! 그게 어떻게 사회와 소통할 것인지.. 생각하는 것은 모든 창작자의 고민이기도 하구요.

그림과 그림 밖의 붓자국, 물감이 남은 팔레트. 이 조화가 참 아름다워요. 박제된 화가의 사유도 잘 읽었습니다:-)

그림보다 옆에 남은 벽의 흔적이, 그것보다는 팔레트가 더 좋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또 박제된 제 생각이 부끄러워지지 않도록 살아야겠습니다.

오쟁님의 포스팅은 글과 그림이 경쟁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 포스팅은 글이 완전히 압도하여 그림이 글의 들러리를 서고 있네요. 예술가의 심연에서 제조된 두 악기가 항시 경쟁하듯 우열을 가리는 이중주에, 가난한 관중은 다만 감탄하며 지납니다.

비밥님 글이 훨씬 더 깊은 울림을 주네요. 가끔 정확하게 제 생각을 꿰뚫어보시는 분들에겐 발가벗겨진 느낌이 듭니다. 저는 제 작품이 결국에는 뭔가의 들러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졸라 멋지고 간지나는 작품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항상 작품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작품은.. 촌스럽다고 생각하거든요.

속에 있는 말을 자꾸 꺼내보고 외치고 다니면 결국은 이뤄지는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아요! ㅎㅎ

말이 씨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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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바꾸는 행위가 사회를 바꿀 수 있지 않을 까요? 예전에 히어로즈라는 미드에서 화가가 그린대로 역사가 바뀌는 장면을 본 기억이 나네요. 그린대로 바뀌는 건지.. 바뀔 세상을 그릴 건지.. 그건 화가의 선택.. ^^

그정도로 화가의 이미지가 막강한 시대였으면(혹은 제가!) 좋겠습니다. 제 선택으로 뭔가 바뀔 수 있다면요. 조그마한 균열이라도 가할 수 있다면 지금은 그걸로 만족합니다. ^^

예전에 제가 적었던 글 중에서, 김현 선생님께서 적으셨던 유명한 문장을 다시 인용합니다.

힘은 인간을 억압한다. 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준다.이것이 바로 쓸모없는 문학이 쓸모 있는 이유이다.

저는 이러한 '문학'을 단지 문학이 아니라 예술로 치환하여 바라봅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맞습니다. 쓸모를 찾는 순간 예술은 보잘것없어지죠. 쓸모가 확실하게 있는 작품은 하나의 방향만을 가르키기도 하구요. 그런데 어떤 때는.. 촌스럽고 보잘것없어도 좋으니 제발 어떤 곳이라도 쓸모있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자주 왔다리갔다리 해요.

'캔버스 앞에서는 전지전능했던 내 입지가, 도시 한복판의 광경들 사이에서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몇 번이고 곱씹어 읽어보게 되네요.
그래도 한편으로는 온전히 자유롭고 전지전능해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부럽습니다

전지전능..취소하겠습니다 ㅎㅎ 사실 전혀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컨트롤이 어느정도까지는 가능하다 - 표현이 더 적당한 것 같네요 ^^;;

사회를 바꾸는 행위가 곧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스팀잇도 하나의 캔버스입니다.

잿소칠해서 첨부터 다시 그릴순 없지만
오늘도 붓질한번 하고 갑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붓질하다 보면
멋진 그림 그려져 있겠지요.

아름다운 글입니다.
풀봇과 리스팀 해봅니다.

멋있는 표현이네요.. 소중한 붓질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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