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시(詩)에 대한 상념 #2

in #kr-pen7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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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8. 스위스, Nexus 5x


폭포(瀑布)
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楕)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폭포, 김수영, 1959)


아직까지 적어내리는 시(詩)습작은 끄적거림과 끼적거름 사이에서 기웃대고 있지만, 시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내게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시들은 김수영 선생님의 문장들이었다. 나의 짧은 지식과 표현력으로 김수영 선생님께서 써내려간 문장들과 호흡들을 오롯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현실 세상과 괴리되지 않으면서 삶을 추동할 수 있는 의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곧은 소리의 본질은 소리이다. 그 소리는 곧다. 더이상의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는다. 소리는 곧게 뻗어나가는 성질을 지닌다. 하지만 그 소리는 또한 퍼질 것이다.

그래서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하지만 그 '곧음'이 전파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곧은 소리는 그 자체로 '곧음' 과 동시에 곧게 나아가고 다시 소리를 부른다. 이 문장이 한 줄로 쓰여지지 않은 이유이다.

생각 이전의 본질, 자연의 천성. 본성을 거스르지 않지만 세상의 시각을 전복 시킬 수 있는 공명. 이러한 공명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소리의 울림을 통해 마음의 공감을 통해 조금씩 퍼져나갈 것이다. 사실 공감을 얻지 못하더라도 좋다. 언어의 확장이 결국 세계의 확장이라고 믿는 나로서는, 드러나지 않은 영역을 조금씩 넓혀갈 수만 있다고 해도 충분한 것이다. 그림자를 걷어낸다는 느낌으로 조금씩 전진해야한다.

시(詩)는 사실 아무런 힘이 없다. 하지만 그러기에 사상의 세계속에 자유로이 부유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를 가두고 있는 혹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채 우리의 사고나 감정 체계를 억누르고 있는 그물을 하나씩 해체한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사회 체계를, 교육을, 직장 생활을, 언어를, 예의를, 정치를 알아가고 참여하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속박한다. 단지 그물 안에서 나다닐 뿐이다.

그물코는 그물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여백은 단순히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다. 여백은 여백으로서 그 기능을 다하며 존재한다. 그물코에 바짝 눈을 대고 바깥을 본다면, 그물은 절대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물이 그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은 메타적 시선/인지(meta-cognition)의 순간에서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내가 시(詩)를 빙자한 어떤 끄적거림을 토해낼 때에는 그렇다. (여기에서 시에 관한 취향이 드러난다. ) 사실 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노래하는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28차원의 양파 껍질을 벗기는데에 관심이 있지. (가끔 눈물이 나기도 한다. 그건 매워서 흐르는 눈물이다.)

힘은 인간을 억압한다. 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준다.이것이 바로 쓸모없는 문학이 쓸모 있는 이유이다.

(한국문학의 위상, 김현, 1977)

나는 이러한 김현 선생님의 문학론을 지지한다. 문학은 유용성이 없기 때문에 유용성을 획득한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유용하지 않음과 유용함은 인간에 대해서 쌍둥이별이나 마찬가지이다. 서로가 서로를 증명하듯 전체를 이룬다. 이 얼마나 쓸모없는 공간과 시간의 낭비인가. 하지만 세상을 견인하는 추동력은 잉여로부터 나오기도 했다. 잉여는 결국 자유의 징표이기도 할 것이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 김수영, 1956)의 일부분.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침을 한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기침을.
아무짝에 쓸모가 없으니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결국 산문도 아니고 운문도 아닌 뒤섞임이 나왔다.
상념은 원래 의식의 흐름대로 써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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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이었지요
10년쯤은 되었으니요
김수영님의 부인되시는 김현경사모님과 시흥 관곡지에서 데이트를 했더랬지요
정말 여걸이셨어요 연세가 그리 많은신데 지루하다는 느낌이 전혀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댁에 초대를 받았는데 가 뵙질 못 했네요 많은 걸 보여주시마 하셨댔는데

좋은 시간과 더불어, 후에 방문하지 못한 아쉬움이 많이 남으셨겠군요. 어르신들과 대화하는 것은 저도 참 좋아하는 일입니다. 각자 가지고 계시는 소우주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소우주들은 저에게 멀리 있지만, 가깝게 다가올 때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이 있습니다.

저도 종종 선생님들을 찾아뵈어야 하는데, 생업을 핑계로 - 사실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군요 - 자꾸만 유예하고 있습니다. 자꾸만 숨이 가빠집니다.

그래서 저는 해마다 스승님 생신날 꼭 찾아 뵈어요 바로 오늘이지요 혼자서는 힘들어서 다섯명이 맘 뭉쳐 벌써 10년 하고 있어요 김현경사모님두 스승님께서 소개 시켜주셨구요 제 스승님은 시와 산문 발행인이시고 고조병화시인의 애제자이신 이충이시인이세요

다들 그리 살고 있어요
님만 그런 건 아녜요
날이 많이 춥네요
목화이불 간절해요

오늘 마음의 결이 맞는 사람들과 행복하고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제게 시의 길을 보여주신 분은 함기석 선생님이십니다. 제가 무심하고 못되고 못난 제자라, 용기는 맥없이 사라지곤 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숨통이 조금 트이는대로, 소식이나 한번 전해드려야겠습니다.

아무래도 태백이 좀 더 많이 춥겠지요. 추위에 잠식당하시지 않도록 따뜻함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함기석시인의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시집을 좋아하지요

그 시집을 좋아하시는군요- 재미있는 시집이지요. 사실 그 시집은 과학을 알면 조금 더 재미있어지는 시집이긴 합니다 :)

스위스 너무 가보고싶은곳!! 언제봐도 멋있네요 !!

저도 다시 한번 방문하고 싶은 곳입니다. 그립네요. 그 여름이.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많이 배웁니다. 저는 일상의 디테일을 묘사하는데에는 정말로 재주가 없습니다.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세세한 일상이 모여 잔잔한 흐름의 삶을 이룰 거라 믿습니다. :)

좋은 시를 보게 해 준 것 좋은 글을 보게 해준 것도 감사합니다.

시는 참 좋은데 제 글이 못따라가서 참 걱정입니다. 일상의 여러 조합을 즐겁게 적고 계신만큼, 저도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이 소재가 어떻게 이렇게 섞이지? 하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개취입니다만 맨 아래 시가 제일 좋네요

쿨럭쿨럭 쿨럭콜록 콜록콜록 (...)
마스크를 끼기엔 아직 제가 나름 젊은가 봅니다.

오.. 참고서보는 듯 한 느낌이 살짝 듭니다. 시 해설을 전문적으로 해보셔서 저같은 대중들의 눈높이를 올려줘 보시는 건 어떠할지... 가즈앗!!!

제가 시해설을 하게 되면, 이걸 참고하시는 분들은 아마 언어영역 반타작도 힘들거에요. 제가 좀 꼬아보는 습성이 있어서 (...) 제멋대로 시해석은 종종 올려보겠습니다. (하지만 점수는 보장 못한다는... 고등학생들은 절대 따라하지 마시오 이런걸 붙여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를 봐야 하는지 보는 눈을 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가즈앗!!

👨 어렵네요! 어려워서 쉽게 댓글 달기가 쉽지 않지만 응원합니다. 양파껍질 다 벗기고 어떤 글이 나올지 기대됩니다.

제가 문장을 잘쓰지도 못하면서 심지어 어렵게까지 쓰는 기이한 재주가 있습니다. (...) 오늘도 한땀 한땀 양파를 벗깁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속박되었기에 더 자유롭다고 했다는 누군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는 글을 최근에 스팀잇에서 보았습니다. 28차원의 양파 껍질을 벗길 때 흐르는 눈물이 내는 소리도 들어보고 싶군요 :)

아마 엉엉 이지 않을까요? 농담입니다.

갇혀 있음을 통해서 보호받는 자유라면 그러한 자유도 아마 의미가 있지 싶습니다. 우리는 사회 체계의 그물망 안에서 권리라는 이름 하에 자유로우니까요. 체계를 벗어나면 도덕과 법의 응징이 뒤따르지만요. 문학은 다행히 그러한 체계를 지면으로써 일탈하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요.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글입니다. 이런 훌륭한 글에 14보팅이나 있는데 금액은 3달러 뿐이라니... 스팀잇에서는 역시 블록체인 내용이 아니면 돈이 안되는 걸까요.ㅠㅠ

제 취향이 스팀잇과 잘 맞지 않을 뿐입니다. 대중을 겨냥하고 글을 쓰려면 아마 말랑말랑 힐링힐링 같은 글을 적거나,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는 글, 혹은 오피니언 리더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야할텐데, 제 성향이 그리하지 못하네요. 그래도 알아봐주시는 분들이 있기에 그냥 나아갈 뿐입니다. :)

시를 공부하시는 분이군요. 어쩐지 남다르다 했어요. 몇 편 읽지는 못했지만 @qrwerg 남의 글에서 저역시 색다른 무엇인가를 읽었던 것 같아요. Just keep it up...

제가 아마 운문 스타일의 산문을 좋아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시(詩)를 잘쓰진 못하지만 좋아라는 합니다. 색다른 무언가로 봐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결국 정진 또 정진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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