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거야

in #kr6 years ago

이른 아침 눈이 저절로 떠졌다. 보통은 다시 잠을 청하지만 얼마간 뒤척이다 이불 밖으로 빠져나왔다. 남은 며칠을 알차게 보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볕이 좋길래 밀린 빨래를 했다. 한국 가서 세탁기에 한꺼번에 넣어버리면 될 일이지만, 엄마가 또 외양간 냄새니 뭐니 할까 봐 주저하지 않고 시작했다. 빨래할 때는 꼭 음악을 듣는데, 오늘은 아비치의 실루엣을 골랐다. 작정하고 놀던 시절에 그의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인트로만 들어도 심장이 뛴다.

아비치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게다가 어렸다. 그래서 천재로 일컬어졌다. 그가 열어젖힌 문으로 따라 들어간 많은 이들이 새로운 음악을 들으며 꿈을 꾸고, 때로는 이루었다. 근대의 천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가진 재능을 헛되이 쓰지 않았고 그 덕에 어린 나이에 성공하여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는 것? 그의 나이 28살, 얼마 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천재의 드라마를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조건을 갖춘 셈인지도 모르겠다.

청바지 두 벌을 짜면서 어찌나 용을 썼는지 어깨가 욱신거렸다. 청바지 빨래는 영 짜내는 맛이 없다. 한다고 했는데도 널어놓은 청바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발코니에 앉아 젖은 청바지를 바라보며 콜라를 마시다가 생각이 났는데.

한국인 여행자에게

"어머. 얼굴도 별로 안 타시고, 맨날 스키니진 입고 다니셔서 여행자 아닌 줄 알았어요."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뉘앙스를 통해 숨은 뜻이 분명하게 전해졌다. 속으로 '인도까지 와서 웬 스키니진?'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이런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들이 노리는 숨은 뜻은 특유의 표정과 톤에서 발견되는데, 좀 더 교묘한 이들은 그마저도 잘 숨긴다.

"인도 여행하면서 꼭 거지꼴로 다닐 필요는 없죠."

하고 싶었지만, 아, 예 하고 자리를 떴다. 싫은 사람과 말을 섞으면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므로 빨리 피하고 싶다. 유럽, 미국이라면 막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있는 힘껏 꾸미고 다닐 사람들이 왜 인도에서는 꼬질꼬질하고 기괴한 차림새를 하고 다니며 그것을 훈장처럼 여기는지.

다시 나의 청바지, 나아가 의복 생활(?)로 돌아와서,

내 차림새는 늘 비슷하다. 언제나 청바지(혹은 블랙진)에 면 티셔츠나 셔츠, 스웨터 따위를 입는다. 기본의 모양에 대부분 흰색 혹은 검은색과 같은 기본의 색이다. 외국에 있어도 큰 변화는 없다. 날씨에 따라 옷감의 두께, 소매나 바지의 길이가 달라진다거나 더 껴입고 덜 껴입을 뿐이다. 내가 가진 옷들은 색깔도 모양도 대체로 비슷해서 옷을 사도 주변 사람들은 그게 새 옷이라는 사실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나 옷 샀어."
"너 똑같은 옷 있잖아..."
"아냐... 약간 달라..."

곧 얼룩말이 될 기세로 한참을 줄무늬에 집착하기도 했다. 하루는 엄마가 옷장을 열어보고는 미쳤냐고 하길래 내가 생각해도 이건 편집증에 가깝다 싶어 어느샌가 억지로 줄무늬를 멀리하고 있다. 하지만 흑백의 줄무늬만 보면 여전히 몸 위에 걸치고 싶어진다. 지난겨울에는 스타일에 변화를 좀 가져 보기 위해 검은 바탕에 꽃무늬가 들어간 원피스를 샀는데, 딱 한 번 입었다. 외출하기 전에 거울 속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역시 안 어울려, 하고 벗어놓은 적이 수십 번이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험하는 일은 거의 없다. 늘 가던 식당에 가서 늘 먹던 걸 먹는다.

입을 때도, 먹을 때도 늘 익숙함을 그리워하면서 2019년에도 지금과 비슷한 봄을 맞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왜 진절머리가 나는 걸까. 하긴 한 달 뒤도 먼 미래처럼 느끼는 주제에 2019년이 웬 말인가 싶다. 올해의 계획 따위를 세우거나, 5년 뒤엔, 10년 뒤엔 하며 기대 혹은 예상되는 내 모습을 떠올려 본 적도 없다. 아득하게 먼 미래. 몇 주 뒤에 있을 만남을 약속한다든가, 한참 남은 생일파티, 돌잔치, 결혼식 날짜 따위를 미리 아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 까먹기 때문이 아니라 느낄 수 있는 시간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주일 뒤 정도는 되어야 그것을 다가올 일이라 몸으로 느끼고, 계획을 세우든 뭐든 할 수 있다. 기억력과는 관련이 없다. 즉흥적이라고 한다면 그 말 또한 맞지만, 충동적이라고 한다면 그 말은 틀리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하... 내 빨래...

IMG_3098.JPG

아비치의 실루엣에 이런 가사가 있다.

We will never look back at the faded silhouettes.

그래, 이미 젖은 빨래 더 젖으면 어때. 시원하고 좋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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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같은 모양의 옷을 2~3벌 챙겨서 여행을 가요. 스타일도 밝은 옷 어두운 옷 딱 두가지에요. 선택하는 고민을 줄이기 위함이기도 하고 미니멀리즘을 지향하기도 해서인데 친구들은 옷도 안빨아입냐고 놀리죠 ㅎㅎ

여행을 가면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데 자신의 편견이나 취향을 상대방에게 유독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같아요. 여행의 좋은 점은 그런 사람을 멀리할 수 있다는거죠. 이야기하다 아니다 싶으면 연락을 안하거든요.

빨래는 어떻게 되셨으려나요 ㅎㅎㅎ

ㅘ핳하하핳 저도 옷 안 빨아입냐고 놀림 받기 딱 좋은 스타일! 애나님 말대로 여행하면서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까 처음 몇 마디 대화로 좋다 별로다 대번에 파악이 되는데 이게 좋은 건지 가끔 고민해요. 좋은 사람과 보내는 시간도 늘 부족해요. 빨래는 다시 다 했지요! :-)

Simple roundyround so cool! :)


ps. 나는 구닥다리. 버디도 요절했어요.ㅠㅠ

피터님 댓글 속 선곡이 매번 너무 적절하여 앞으로 포스팅할 때마다 기대하게 될 것 같습니다. :-) 비가 오고 난 후라 밤공기가 아주 상쾌해요. 빨래는 다시 해야 할 것 같지만요. 흙흙.

흙흙크크, PEN공모전에 참여하셨군요. 저는 이런게 있는지도 몰랐어요. 김작가님 리스트업을 장인이 한땀한땀 옷만들듯이 처음부터 정주행 하고 읽는데 둥글게둥글게님 글이 22번째에 심어져 있네요. 그냥 스킵하려다가 제가 조아라하는 동그라미님생각에 다시한번 읽고 족적을 남깁니다. 히히히. 손빨래하느라고 용쓰느라 몸살은 나았는가요?

ps. 한국오면 보약한재먹고 얼렁 기운내세요. 그래야 다시 때굴때굴 때구르르.ㅋㅋㅋㅋㅋ

피터님! 저 무시히 한국에 잘 도착했답니다. :-) 아 진짜 오는 길에 고생한 이야기는 포스팅 한바닥 감이에요. 그나저나 피터님 스팀챗 하시나요? 드릴 말씀이!

접속해보니까 되네요. 그런데 동글이님께서는 invisible(안보임)이라고 뜨는데요. 메시지는 남겼는데 맞는건지 모르겠네요

앗! 저도 한 때 단가라중독증이었어요.
항상 금단현상을 느끼죠^^

역시 보얀님도 그 아름다움을 아시는군요! (와락) 여름은 또 단가라의 계절이잖아요! 한동안 쉬었으니 이제 신나게 입어야겠어요. :-)

저도 인도 가보진 않았지만 인도 여행자들의 유니폼이 뭔지는 잘 알고 있어요 ㅎㅎㅎ

아시는군요! 인도에는 맨발로 다니는 여행자들도 많아요. 사실 누가 뭘 입고 다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다만 제 차림을 비꼬는 뉘앙스가 영혼의 안식처 인도에까지 와서 속세의 입을 거리를 버리지 못했다니! 이런 느낌이었어서 영 맘에 안 들었달까요! 흐흐.

아아. 어깨가 욱신거릴 정도로 짰는데 비가 ㅜㅜ 그런데 사진을 보니 여기까지 시원해지고 정말 좋은걸요 :) 그리고 인도에서도 스키진이 뭐 어때서요! 전 한국에서도 거지꼴입니닷 ㅋㅋㅋ

입을 때도, 먹을 때도 늘 익숙함을 그리워하면서 2019년에도 지금과 비슷한 봄을 맞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왜 진절머리가 나는 걸까. 하긴 한 달 뒤도 먼 미래처럼 느끼는 주제에 2019년이 웬 말인가 싶다. 올해의 계획 따위를 세우거나, 5년 뒤엔, 10년 뒤엔 하며 기대 혹은 예상되는 내 모습을 떠올려 본 적도 없다.

너무 공감해서 할 말이 없네요 ㅜㅜ 동그리님(라운디님이라 불렀다, 동글이님이라 불렀다...) 글 너무 좋아요 엉엉. 왜 자주 안올려줘요 엉엉.

저 오늘 오전에 빨래 다시 했잖아요... 저도 스프링님 글 읽을 때 '으잉? 이거 내 일기 아님?' 할 정도로 공감한 적 진짜 많아요. 이웃들 글 읽으면서 같이 슬퍼졌다가, 같이 즐거워졌다가 이거 뭔가 스팀잇에서 정서 공동체를 이루어가고 있는 듯...? 그나저나 저도 이제 곧 한국에 가요! 남은 시간 알차게 보내기로 해놓고 여전히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하루를 만들고 있는 토요일 오후입니당. 한국에 가면 오늘, 이 토요일 오후의 공기가 얼마나 그리울까요. 이 기분 누구보다 잘 아시죠? :-)

라운디님 오랜만이에요. 반가워요.

아비치는 잘 몰랐어요. 이번에 뉴스로 접한 게ㅡ처음이었습니다. 한번 들어봐야겠어요.

제 옷장도 온통 무채색이랍니다. 청바지 빼곤 거의 다요. 허용되는 색은 네이비, 그리고 아주 드물게 올리브, 카키 이정도네요.

칼님, 제가 춤추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데요. 제 댄스 라이프가 아비치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의 음악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어요! 크... 그 감동 사운드... 들어보시면 아아아 이거! 하실 거예요. :-)

그나저나 제 친구가 어제오늘 이틀 연속으로 코엑스 주류 박람회 가서 환희에 가득 찬 메시지들을 보내오는데 제일 먼저 칼님 생각이...

아아 주류 박람회. 그런 곳에서 술의 깊은 맛을 느끼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모름지기 술이란 뜻이 맞는 동지와 함께하거나, 아니면 조용한 곳이서 혼자 마실 때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 아닙니까!(실은 가고 싶은데 애 보느라 못 가서 이러는 것임)

둥글게둥글 님께서는 시간도 둥근 시간으로 느끼시는걸까요. 거대한 원을 따라 시간이 걸어가고, 우리는 시간의 한 바퀴를 보통 상상할 뿐, 시간의 몇 바퀴 뒤를 느끼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롯이 하나의 한 바퀴에 집중할 뿐이지요 :)

q님! 맞아요! 아무리 궁리해도 명확해지지 않아서 설명하기가 좀 어렵지만, 저는 이 세계가 무수한 원형의 띠가 얽히고설킨 모양으로 생겼다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대로 시간의 바퀴예요. 시공간의 바퀴라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바퀴를 갈아타며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저는 사실 종교가 없어서 종교적 믿음과는 거리가 멀고 그냥 기호에 가까워요. 그렇게 생긴 세계라면 두려움 없이 나를 오롯이 간직하며 살 수 있겠다, 그런 생각 해요. 그래서 다중우주니 평행우주니 하는 과학적 용어들이 그냥 직관적으로 와닿아요. 그 안에 담긴 이론과 개념들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요.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것 같은 마음마저 생겨요. :-)
생각할 시간 없이 살 때는 빈 종이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이 궁리를 했었는데, 시간이 남는 요즘은 어떤 일에서든 궁리라는 것을 잘 안 하네요. q님 댓글 덕분에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

저도 늘 비슷한 옷을 삽니다ㅋ 늘 쓰는 펜만 쓰듯, 옷도 계속 손이가는 게 있잖아요ㅎㅎ 누구나 다 다양한 옷을 입을 필욘없다고 생각해여!

느낌적인 느낌으로 경아님도 어쩐지 그럴 것 같았어요. :-) 지난겨울에 산 꽃무늬 원피스는 다시 입게 될 것 같지 않아서 이번 여름에는 그보다는 덜 화려한 놈으로 하나 골라 입어보려고요. 히히.

같아보여도 다 다른 청바지 다른티, 다른 줄무늬죠!ㅋㅋ 전 약간 '블루'에 집착해요. 네이비도 아닌 톤다운된 블루를 보면 저도 모르게 손을 대고 있는;;ㅋㅋ

네! 명백하게 다른 옷이죠! 무늬의 두께와 간격이 조금만 달라져도 완전히 다른 옷이 되잖아요! 이모셔널님이 집착하는 블루는 프사의 저 블루인가요? 그러고 보니 글에서 중요한 것을 깜빡했는데, 제가 집착하는 색은 핑크예요. 무채색을 옷의 색으로 좋아한다면 핑크는 그 색깔 자체를 사랑하는 거예요. 오드리햅번이 I love in pink 라고 했던 것처럼요. 흐흐흐.

저는 신발에 집착을.... 사람들은 다 똑같은 모양이라고 하는데, 제 눈에는 분명 힐 모양이랑 떨어지는 라인이 확연히 다른게 보이거든요 ㅠㅠㅠ 하아, 우린 매우 섬세하고 세심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섬세한 사람 좋아합니다.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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