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diary] 유통기한이 지난 차를 마시면서: 일기에 대한 일기

in #kr6 years ago (edited)


찬장에 있는 분말 형태의 스틱이 우연히 눈에 띄었다. 스타벅스에서 나온 가루 형태의 녹차라떼 스틱이었는데, 한동안 즐겨 마시다가 너무 자주마시다보니 질려버려서 이제 스스로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던 것 같다. 오랜만에 우유를 넣고 휘저으면서 마셔보니, 약간의 가루 뭉침은 있었지만 맛과 향은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밀봉은 언제나 중요한 것이다. 특성을 오롯이 보존하게 해주니 말이다.

모든 식품에는 유통기한과 유효기한이 있다. 얼핏 보기에 비슷하게 느껴지는 두 개념은 사실 꽤 다른 편이다. 어떠한 식품이 유통 과정을 거칠 수 있는 기한에 대한 정보를 유통기한이 담고 있다면, 어떠한 식품의 고유 특성 그러니까 괜찮다고 생각될 정도의 기한은 유효기한이 나타내는 것이다. 통조림의 경우에는 특히 유통기한과 유효기한의 차이가 뚜렷한 편이다. 예를 들어 유통기한은 2025년까지라고 하더라도, 유효기한은 개봉 후 3일 정도가 최대로 잡을 수 있는 기한이다. 그렇다면 일기는 어떨까.

일기는 일상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은 생각보다 균일하게 분절적이지는 않아서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 느껴지고 어떤 날은 너무나 많은 것을 이루어 정신없이 빡빡하게 들어차 있을 것이라 본다. 그러니 무조건 하루치를 끊어서 기록하는 것보다 우연히 그날의 사건이나 상념의 흐름을 집중해서 서술하는 편을 선호한다. 의외로 하루하루는 상당히 긴 편이어서 꼭 극적인 경험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반복되는 일상의 변주를 통해 조금씩 걷고 있는 감각과 걸으면서 마주하는 세계를 기술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삶의 경험과 일상은 시선을 통해 잘 조리되어 기록된다. 기록은 결국 저장을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여기, 블록체인에 저장되는 일기라는 것은 결국 일상의 기록이 잘 밀봉된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일기는 남겨질 것이며 수정되거나 삭제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수한 일기를 읽으면서 잘 밀봉된 유리병이 차근차근 저장되는 풍경을 떠올린다. 이 유리병은 언제든 열어서 음미할 수 있고 즐긴 뒤에는 다시 잘 밀봉해서 놓아둘 수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맛과 향은 숙성될 것이다. 미각과 후각은 결국 얼마나 삶의 새로운 맛을 알게 되었는가에 따라 성장한다고 믿기에, 유리병을 틈틈이 열어보고 직접 느끼는 과정은 꾸준히 지속될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일기의 유통기한은 삶을 걸어가는 내내, 유효기한은 매번 열어볼 때 마주하는 삶의 순간을 뜻할지도 모른다. 누구나 유리병을 관찰할 수 있고 직접 열어서 즐길 수 있다. 각자의 삶과 세계에 따라 유효함이 어느 세계든 다양하게 닿을 수 있다는 것은 일기만이 가지는 장점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일기는 모두 소중하다. 그래서 잘 쓰인 일기와 못 쓰인 일기의 구분은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것을 즐기는 데에는 결국 즐기는 자의 취향이 관여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취향은 사람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이 지닌 삶의 궤적과 즐기는 지금의 순간마다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일기가 지금 당장 남들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하여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유통기한의 의미는 "당신이 이것을 기한 내에서 즐긴다면 좋고 심지어 조금 넘겨도 괜찮다"는 뜻이며, 유효기한의 의미는 "당신이 이것을 개봉하는 시기는 언제나 당신에게 최적의 순간이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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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일기의 독자는 다수가 아니라 오롯이 '나'였을 때 가장 좋은 일기가 아닐가 싶어요. 온전히 나 자신에게 나를 솔직하게 내어놓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기가 있을까요.

저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블록체인이 되는 이런 곳에 적는다면 그 온전히 자신에게 솔직한 일기를 쓰기가 다소 어렵지 않을까하는 고민이 있답니다. 사실 쓰고 싶은, 진짜 솔직한 일기의 내용은 100인데 블록체인이 되는 곳이다보니 일기를 100에서 모자란 70, 60으로 적게 되니깐요. ^^;

이 부분에는 적극 공감합니다. 그래서 제가 적는 일기 중 상당수는 사실 저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지가 되어있고,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표지는 가급적 떼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원히 남는다는 것에 우리는 언제나 한번쯤 조심해야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댓글로 의견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같은 경우 블록체인이라는 특성상 일기도 다소 달라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의 일기를 작성한다는 것과 블록체인이 되는 이 곳에 일기를 작성한다는 것은 조금 다르게 와닿거든요. 다른 곳에서도 일상 글을 잘 남기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곳보다는 더 편하게 남겼던 것 같습니다. ^^

네 저도 그래서 팩트는 최대한 숨기고, 감정은 은유적으로 많이 담아내려고 해요. 그게 남들도 보는 나의 일기가 가장 솔직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아서요. 물론 그것도 100프로는 아니겠지만요. 그런데 공개적인 곳이라도 일기는 자조적인 부분이 있어서 쓰다보면 토해내버리듯 써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땐 오히려 스스로 자제해야겠다고 느끼죠 ㅎㅎ

그런데 공개적인 곳이라도 일기는 자조적인 부분이 있어서 쓰다보면 토해내버리듯 써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제 일기도 그래서 70이나 60입니다. 어쩌면 사람마다의 성격이랄까 가치관이랄까 뭐라고 말할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가급적 무덤덤하게 살짝 밝게 쓰려고 하거든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감정들이 있는데 이 곳에서는 일부만 쓰려고 노력하고 있답니다. 안그래도 사실 이와 관련된 글을 언젠가 포스팅할까 말까 생각하고는 있던 참이었지요.

네. 맞습니다. 정말로 자신을 위한 일기와 기록이 되어야 하죠. 저는 가끔 잊기 위해서도 기록을 합니다. 언젠가 다시 들여다볼 날을 꿈꾸면서요 :)

일기에 유효기한은 무한대인걸로 생각해도 될까요 ㅎㅎ
제 추억들이 밀봉되어 주르륵 선반에 놓이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누가 좀 열어봐줄진 모르겠지만요

그렇게 보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를 받으면 책장을 살펴보기도 하고 선반을 살짝 살펴보기도 하지요. 유리병이니만큼 오롯이 색깔을 가진채 드러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번쯤 열어보면 더 좋고요 :)

앗 이거슨 심사평!

제가 누군가의 삶의 단편을 심사할 깜냥은 되지 않아서, 제가 느낀 바를 나타내는 감상평 정도일것 같습니다ㅎㅎ

혹여나 누군가 "내 일기는 (상대적으로) 그만큼의 가치가 없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일기를 적어주신 분들은 아무래도 다른 분들이 적으신 일기들도 찬찬히 살펴보실 것 같아, 이러한 시선과 마음도 닿겠지 하는 마음에 적어본 일기입니다 :)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갑자기 일기가 훅 늘었어요. 저도 쓰긴 쓸건데 그전에 다 읽어보진 못할거 같네요ㅠ

글을 읽으며 저도 아무개님과 qrwerq님처럼 풍경 하나를 상상했어요. 높은 천장에 닿을 듯한 선반에 유리병들이 주루룩 늘어서 있는 큰 방, 또는 창고. 유리병 하나를 열면 그 순간의 냄새를 담은 공기와 소리가 흘러나오고, 장면이 홀로그램으로 펼쳐지구요. 제가 생각하는 일기의 기능에 판타지적인 상상력을 더했답니다. :) 그만큼 일기는 순간을 연장시켜주는 소중한 기록입니다. 그래서 이번 일기 공모전도, 스팀잇도, 글을 쓰는 행위도 참 좋습니다.

장면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셨군요! 조금 더 또렷하게 다가옵니다. 순간을 그 순간에 그치게 하지 않고 계속해서 찾아갈 수 있도록 연장시켜주는 작업이라는 것에 동감합니다. 정말로 여러 일기들을 엿볼 수 있어서,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참 즐거운 것 같습니다.

잘 쓴 글과 덜 잘 쓴 글의 차이는
가슴이 말해 주더라구요
그렇지만 그것조차도 개인차와 개인의 취향이 있으니 뭐라 할 수 없음이 맞는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가슴이 말해준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저는 어떠한 일기든 그 글이 닿을 마음들이 있다는 것을 믿기에, 각자의 글이 잘 닿기를 바랄 뿐입니다. 언제 어떻게 닿을지 곰곰히 생각해보게 됩니다. :)

일기라는 형식이 상당히 개인적인 것이고 그 개인에게 의미가 크다면 어떤 글이든 일기로서는 훌륭한 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도 생각의 흐름 잘 느끼고 가요 ^^ qrwerq님의 일기도 기대되네요 ^^

저도 각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기록이든, 이를 기록한 본래의 삶이 존재할 테니까요. 저는 언제나 그러한 경험을 나누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

언제나 잘 살펴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타임 캡슐 같은 존재죠. 몇년이 지난 일기들은 지금 읽어도 그때의 추억들을 어제의 껏 같이 기억이 나네요. 내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좀 이상한 취미지만 예전에 쓴 제 글들을 한꺼번에 몰아서 정주행 할 때가 있습니다. 몇시간이 걸리기도 하는 작업이지만 입수가 끝나고 수면으로 올라오면 참 많은 것들이 떠오르죠 ㅎㅎ 스팀잇에서의 글도 몇년 뒤에 정주행을 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네요.

저는 초심이 떠오릅니다. 처음 어떠한 길을 택했을 때의 번민과 고민들, 결정을 내린 순간들이 오롯이 일기에 담겨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초심이라는 것은, 그 때 당시가 아니면 상상하기 어려운 것, 조금씩 바래갈 수 있는 것, 어쩌면 잊고 사는 것이라는 생각에, 저도 가끔 예전에 적었던 글을 들추어보곤 합니다.

저는 글과 댓글들 모두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습니다. 저는 글을 언제나 dialogue로 보고 있고, 던진 화두에 대한 응답, 그에 대한 생각들을 적어두다 보면, 글 하나에 건축물 하나를 짓는듯한 느낌을 가지곤 하거든요. 아마도 세계를 조망하는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말씀처럼 취향이 다른, 다양한 일기들이 유통기한 없는 유효한 순간들을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일기들이 지금 당장 유효하진 않더라도, 언젠가 즐기게 될 날을 꿈꾸어봅니다. 일기의 숙성기간은 모두 다른 것 같습니다. 그 것은 오로지 쓰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읽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모두의 합이 잘 맞아야하겠지요 :)

블록체인은 획기적인 기록 밀봉 기술이었네요. ㅎㅎㅎ 음식의 유통기한과 유효기한, 그리고 일상의 기록까지 나아간 관점이 깊이 있고 참 감미롭습니다 :-))

무엇을 놓아둘지는 우리에게 달려있고 잘 보관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쳐가는 경험과 상념들을 붙잡아두기에 참 좋다고 생각해요 :)

그렇네요. 글에도 유통과 유효.. 서로 다른 기준이 존재하겠습니다.

글의 '시의적절함'과 '각자에게 닿는 의미'가 결국 유통과 유효의 뜻이 아닐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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