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몰래 살려준 두 유대인들, 그 기구한 삶.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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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살려 준 두 유대인 사진>



<덩케르크 OST 中, "End title", 들으시면서 보시면 좋습니다>

<일반인의 짧은 개인적 정리글이므로 가볍게 맥락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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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이 유대인은 모두 가려내 수용소로 보내던 시절, 히틀러가 살려 준 것으로 확인된 유대인은 2명입니다. 이들의 기구한 삶 같이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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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른스트 모리츠 헤스

: = Ernst Moritz Hess (1890. 3. 20 - 1983. 9. 14)

① "히틀러"의 지휘관이었던 "헤스"

"헤스"는 유대인 은행가 집안의 어머니에게서 출생했기에 유대인으로 분류된 사람이었습니다. 나름 엘리트 교육을 받고 성장한 그는, 1차대전이 발발하자 육군 보병 참모로 입대해서 성실히 복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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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의 군 시절 모습(좌), 노년기 모습(우)>

근무지를 옮긴 "해스"는 바이에른 예비 보병 연대 16명의 지휘관이 되는데 그 안에 "히틀러"도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즉, "헤스"는 "히틀러"의 군대상사인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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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부대 근무 시절, 상사 "헤스"와 부하 "히틀러">

"헤스"는 1918년에는 중위로 승진했고, 제대 후에는 독일의 훈장을 받고 심지어 히틀러가 집권을 시작한 초기인 1934년에도 1차대전의 명예 훈장을 받는 등 상당히 유능한 장교였던 것 같네요.

일설에 의하면, "헤스"와 "히틀러"는 같은 시기에 부상을 당해 함께 치료받은 경력이 있다고 합니다.


② 제대 후 판사로 괜찮게 살다가 유대인 탄압으로 궁지에 몰린 "헤스"

그는 제대 후 뒤셀도르프 지역의 판사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적어도 유대인 탄압이 시작되기 전까지는요.

1933년, 유대인은 공직에 있을 수 없다는 법이 통과되었으나 이때만 해도 독일군으로 참전했던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공직에 있을 수는 있었습니다. 소위 "프론트라인 전투원 특권"이라 불리던 제도가 있었지요.

하지만 1936년에는 뉘른베르크 법이 생기면서 그것마저 없애고, 모든 유대인은 차별받게 됩니다. "헤스"는 판사직을 할 수 없게되었으며 심지어 나치 대원들에게 구타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1937년에 이탈리아 북부 사우스 티롤 지역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이사하였습니다. 그는 떠나기 전에 히틀러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그는 어머니만 유대인이었기에 완전한 유대인은 아니며,딸과 자신을 그러한 유대인 분류에서 배제해 달라는 내용이었지요. 또한 그는 "유대인으로 분류되어 독일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는 사망한 것과 다름없다."면서 고통을 호소하였고, 자신은 기독교로 자랐으며 훈장 받은 참전용사이고, 애국심도 투철한 공무원(판사)이었다는 것을 함께 적었다고 합니다.

뒤늦게 거쳐거쳐 편지를 받은 히틀러는 그를 기억했다고 합니다. 평소 그는 "헤스 같은 사람이라면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칭찬했었다고 하네요.

그는 "헤스"에게 좀 더 이동의 자유가 넓은 여권을 발급해주기도 했습니다.

"헤스"는 부하로 복무했던 "히틀러"가 조용한 편이라 그다지 기억에 남는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히틀러"는 모범적인 리더였던 "헤스"와 가깝게 지내준 부대원들을 고맙게 느꼈을 거라고 하네요.

하지만 "헤스"가 살던 이탈리아 북부 지역도 "히틀러"와 "무솔리니" 간 계약하에 이전되면서 "헤스"는 독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남미 국가 등으로 이민을 시도했으나, 좌절된 "헤스"는 결국 돌아가고 마는데, 돌아가면 바로 체포될 위기였지요.

히틀러는 1940년 8월 27일, 부하들이 다 보는 앞에서는 원칙의 예외는 없다고 하고, 뒤로는 개인 보좌관인 비더만을 불러 "해스"를 보호하라는 명령서를 하달합니다. 다행히 "비더만"은 "헤스"와도 친구였던 사이였습니다. 이는 친위대장을 통해 전달되었고, "헤스"는 체포되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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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를 보호하라는 명령서>


③ 보호명령서를 받았던 "헤스", 결국 수용소 가다

1차 대전 때 지휘관과 부하로 만나 기구한 운명을 이어 온 "헤스"와 "히틀러", "히틀러"가 "헤스"를 보호해주었기에, "혜스"는 1941년까지는 돌아온 독일에서도 그런대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밖의 분위기는 난리도 아니었겠죠. 늘 보호명령서를 들고 다녀야 했을 거고, 그럼에도 늘 체포와 구타 위기에 놓여있었을 겁니다.

1942년 들어 전쟁이 격화되고 독일군의 여유가 사라지면서, "헤스" 보호명령서도 유효기간이 지나고, 무효화되고 맙니다. 전쟁이 그토록 길어질 줄은 예측 못했나 보네요. "히틀러"가 그렇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고, "히틀러"의 보좌관이던 "헤스"의 과거 친구 "비더만"이 직위해제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로 가면서, 그 이후에는 신경을 못 써서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네요. "비더만"이 있었다면 갱신을 해 주었을 것 같긴 한데, 워낙 독일군의 입지가 좁아지던 때고, 전쟁이 격화되던 때라 신경써줄 겨를도 없었을 것도 같습니다.

결국 안타깝게도 "헤스"는 뮌헨의 한 수용소로 끌려가 전쟁 끝날때까지 약 4년간이나 배관공 밑에서 강제노동을 하게 됩니다. 판사에서 강제노동으로 떨어지다니 참 기구했겠지요. 그 와중에 그의 여동생은 수용소에서 죽고, 어머니는 탈출하여 브라질도 이주했다고 전해지네요.

"헤스"는 아내가 순수 독일인이다 보니 그나마 강제노동 선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일설도 있습니다. 꽤 일리가 있지요.


④ 판사직을 거부하고, 철도국 의장으로 근무하며 생을 마감

독일의 패망 후, 그는 원래 판사로 일하던 뒤셀도르프에서 다시 판사직에 임명되었으나, 그를 조롱하던 게르만계 독일인들과 다시 일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여 독일연방철도국 의장을 역임하게 됩니다.

그는 1970년 독일연방공화국과 프랑크푸르트 시에서 주는 훈장을 또 받았습니다. 참 성실하게도 살았나 봅니다. 강제노동하고 나면 엇 나갔을 것 같기도 한데 말입니다. 오히려 강제노동 때 익힌 배관 지식 등을 잘 활용한 것 같군요.

그렇게 그는 근면하게 살다가 1983년 94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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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두아르드 블로흐

: = Eduard Bloch, 1872. 1. 30 - 1945. 6. 1)

① 히틀러 어머니의 친절한 주치의

블로흐는 오스트리아의 의료장교로 복무 후 개인병원을 차렸는데요. 마침 "히틀러" 어머니의 친절한 주치의였다고 합니다. 그는 어려운 가정들의 환자를 많이 돌보고 저렴하게 혹은 무료로 치료해주어 인기가 높았다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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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암이었던 "히틀러" 어머니의 경우에도 종종 무료나 저렴하게도 치료를 꾸준히 해주었다고 하네요. 그런 면이 어린 "히틀러"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18세의 "히틀러"는 "블로흐"에게 "영원히 감사할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히틀러"가 그 후 직접 만든 그림 엽서 등을 선물하기도 했다고 하는군요.

나치 독일이 활개를 치던 1937년에도 "히틀러"는 "블로흐"의 안부를 챙기며 그를 "고귀한 유대인"이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어릴 적 "히틀러"가 "블로흐"에게 느낀 감정이 얼마나 우호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블로흐"도 "히틀러"가 그의 어머니를 매우 사랑했고, 긍정적인 아이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다소 폭력적이고 권위적이었다고 알려지는 반면, 어머니는 "히틀러"의 화가의 꿈을 지원하고 응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반면, 역사가 Rudolph Binion의 주장으로는 "블로흐"가 히틀러의 어머니와 가깝게 지내면서 히틀러가 일종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증세가 생기면서 "블로흐"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반유대주의 사상이 생겨났다는 이슈를 제기했지만, 대다수 역사가들은 그 점에는 반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그 주장이 맞다면, "블로흐"를 굳이 "히틀러"가 살려 줄 필요는 없었겠죠.


② 유대인 탄압 강화로 궁지에 몰렸으나 보호명령서를 받음

1930년대 후반이되자, 나치대원들이 돌아다니며 유대인들을 색출하고 괴롭혔기 때문에, "블로흐"도 의료행위도 하지 못하고 집에서 꼼짝 못하고 있게 됩니다.

하지만 "블로흐"는 "히틀러"가 가장 보호한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실상 독일인이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권리(재산권 등)를 가지고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다만 그는 1940년 자녀들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해 버립니다. 아무리 히틀러가 보호해주었다고는 해도 당시 수많은 순수 독일인들의 눈에 유대인으로 보이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었을 겁니다.

만약 그때 이주하지 않았다면, 1942년부터 강제노동을 당했던 "헤스"처럼 "블로흐"도 어쩌면 유대인 탄압 광풍 속에 희생되었을 여지도 없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블로흐"는 미국에서 무난하게 살다가, "히틀러"가 죽고 난 다음 달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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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히틀러" 어머니를 꾸준히 저렴하게 치료하고 "히틀러"의 보호명령서를 받았던 유대인인 "블로흐", 그는 1940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1942년 경의 유대인 탄압 광풍은 피했기에,

1942년부터 결국 4년을 강제노동하고 여동생을 수용소에서 잃었던 "히틀러"의 군대 상사인 "헤스"가 좀 더 기구한 운명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하지만 "히틀러"가 몰래 살려 준 유대인들 마저, 이민/이주를 할 정도였고 심지어 한 명은 강제노동을 하게될 정도였으니, 당시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과 차별 분위기가 독일에서 어느 정도였는지 조금은 짐작이 가는군요.

감사합니다. 더위에 건강 잘 챙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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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이군요.
유대인의 삶은 참 기구했지요.
지금도 어찌 보면 기구하다고 할 수 있고요.
중동 문제가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는데 어렵겠죠?

네 공감합니다. 입추가 지나서인지 조금은 더위가 꺾여가는 느낌은 있네요.
감사합니다^^

업무상 유대인들과 하루에도 몇번씩 연락하고 지내기에 더욱 공감가는 이야기네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와우 실제적인 느낌을 잘 아시겠군요.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흥미진진한 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나치 정권하의 유대인 이야기는 무궁무진한 거 같네요.

네 계속 발굴중이라고 하네요.
감사합니다. 무더위에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서프라이즈에 나올만한 소재인거 같아요🤩
그리고 둘다 성실하게 산.분들이네요

네 기존 역사 관련 글들과 달리 요건 조금 그렇지요.
하지만 제가 이곳저곳서 대부분 팩트임을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재밌게 잘 봤습니다ㅎㅎ 지식을 축적하고 갑니다!

네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예외도 있었군요~ 놀랍네요^^

네 저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어요.유대인 분류도 급이 다 다르더라구요. 하지만 2차대전 막판으로 갈수록 예외고 뭐고 아비규환으로 흘렀던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가슴 아픈 슬픈 얘기네요..

네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죠. 히틀러와 더불어, 자국민 수천만명을 숙청과 아사로 몰아간 중국 모택동, 그리고 소련 스탈린의 만행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유럽의 근대는 늘 전쟁으로 얼룩져왔기에, 겁을 먹고 유럽연합을 탄생시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흔히 차별을 하는 사람들은 차별의 대상이 차별 당할만한 짓을 했다고 하며 자신의 차별을 정당화시키는데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건지 말해주는 사례인 것 같습니다. 시혜적인 관점과 개인의 친절함에만 의존하는 한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정성어린 의견 감사합니다.

흥미로운 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네 감사합니다. 건강 유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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