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몽쇄언(述夢瑣言)] 뒤바뀜(轉倒)

in #zzan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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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기 전에 꿈속의 자신을 보지 못한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 꿈속의 자신을 보지 못한다.
태어나기 전에 이 몸이 없었다.
죽은 후에 이 몸이 없다.
그렇다면 몸이란 없는 것이다.
 
꿈을 꾸기 전에도 마음이 있었다.
깨고난 후에도 마음이 있다.
마음이 있으니 꿈을 꿀 수도 있고 깰 수도 있다.
태어나기 전에도 마음이 있었고,
죽은 후에도 마음이 있으니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그러하다면 마음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을 수고롭게 하여 몸을 기르고,
몸을 수련하여 마음을 기르는 것을 알지 못하니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술몽쇄언/전도(轉倒)



정확하게 말하자면 몸도 없고 마음도 없는 것이다. 다만 몸과 마음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과정이 지속될 뿐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



무상(無常)이란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 영원한 ‘있음과 없음’은 한마디로 엉뚱한 상상일 뿐이다. 차라리 이렇게 노래를 부르자.


엉뚱한 상상

그런데 몸과 마음에서 누가 먼저냐고 묻는 꼰대가 있다면,

마음이 먼저라고 말한다면 유심론(唯心論)일 뿐이고 몸이 먼저라고 말한다면 유물론(唯物論)일 것이다. 그렇다면 심물일원론(心物一元論)이라고 적당히 타협해도 될 것 같지만, 일원론(一元論)은 최초의 원인이 있다는 것으로 우리의 사고나 경험과학으로 확실히 증명할 수 없고 대충 얼버무리는 꼴이 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거나 대세를 따라갈 뿐이다. ‘종교 혹은 주의(ism)’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존재 자체, 여여(如如)’ 즉, 그렇고 그러하다는 표현밖에 할 수 없다. 언어란 대상의 전체를 하나의 단어로 고정, 분리하여 온전하게 경험하지 못 하게할 뿐이다. 그런데 누가 뭐뭐 하더라라고 말을 듣는 순간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우선 감정이 일어난다. 온전함의 부분을 표현한 것인데,

불교에서는 우리가 꿈과 전생을 기억하는 이유가 마음이 끊이지 않고 상속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 찰나의 마음은 이전 찰나의 마음과 같지 않기 때문에 이전 찰나의 마음과 똑같다고 할 수 없고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이전 찰나의 마음을 기억한다는 뜻에서 똑같고 그 마음을 통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발생한다는 의미에서 다르다. 그리고 이전 찰나를 ‘기억하지 못함’이 있으므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은 이전 찰나의 마음을 그대로 포섭하되 이전과 다르게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소멸하고 일어나고 소멸함을 되풀이할 뿐이라고 한다. 혹자는 이것을 의식의 진화 혹은 퇴보라고 표현한다.

마음은 끊이지 않고 지속하기 때문에 마음은 없다고 결론 내릴 수도 없다. 하여튼 마음의 ‘있음’과 ‘없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 과정일 뿐이다. 그러나 물질인 ‘몸’의 경우는 이전과 이후의 ‘몸’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으므로 ‘있음’과 ‘없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우리의 5감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방 상좌불교에서는 물질의 생성과 소멸의 속도보다 마음의 생성과 소멸의 속도가 18배 빠르다고 한다. 여기서의 속도라는 개념도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물질이 한 찰나에 일어나고 소멸하는 과정 동안 마음은 18개 찰나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이 물질을 인식하고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조: 눈뜨고 꾸는 꿈

물질과 마음의 수명.png
일묵스님의 아비담마와 반야심경에서

사람들은 마음을 수고롭게 하여 몸을 기르고,
몸을 수련하여 마음을 기르는 것을 알지 못하니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마음이 몸보다 주체적인 것은 확실한데 우리는 몸에 종속되어 살아간다. 몸이 의미하는 바는 ‘나’를 대표하는 정신과 물질의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보자기일 뿐인데, 바로 이 ‘몸’에는 ‘나’를 대표하는 명성, 재물, 권력 등의 규모가 ‘나’의 행동에 의해서 ‘나’에게 시시각각 녹아들어간다. 이러한 것들이 삶의 중심이 되어 그 속의 주체인 ‘마음’을 제멋대로 움직이게 만들고 있다. 마음의 주체도 마음이다. 화가 일어나건 기쁨이 일어나건 그 ‘나’가 마음먹기 나름일 뿐이다. 그런데 그 마음이 일어나거나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바로 이 ‘나’라는 몸에 있다. 어느 순간부터(아주 어릴땐 안 그랬던 거 같다.)

몸의, 몸을 위한, 몸에 의한



몸을 보는 마음이 몸종이 되어버린 삶이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스팀 가격은 왜 안 올라갈까?)



전도된 삶을 즐기고 있을지도,


술몽쇄언(述夢瑣言)


프롤로그
눈뜨고 꾸는 꿈/EMDR(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요법)을 아시나요?
스스로 불러옴(自求)/스팀의 떡락과 나의 자세(나는 낭만적인 선구자다)
징조와 경험(徵驗)/부제: 고요함의 필요성
마음에 물음(問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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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어... 어렵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좋은 포스팅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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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어려운형아로돌아왔구나흐흐흐흐흐

몸을 단련하여 마음을 기르자. ^^
여기서 보니 더 반갑네요.

20대초반에 감명깊게 보았던 중경삼림에서

사실 한 사람을 이해한다 해도 그게 다는 아니
다. 사람은 쉽게 변하니까. 오늘은 파인애플
을 좋아하는 사람이 내일은 다른 걸 좋아하
게 될지도 모른다.

라는 명대사가 나왔죠. 한동안 폰에 적어놓고 자주 들여다본거 같네요. 사람의 생각은 시시각각 변하고 그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움직이는데 그에 비해 나무나 식물들은 참 우직한거 같아요.ㅎㅎ

본문 중에 '생각이 일어나고 소멸한다'고 하셨는데 그 사람이 가지는 신념 같은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걸까요. 자주 변하지 않는 생각들도 있을텐데

신념은 생각의 틀이죠. 변하지 않는게 아니라 변하는 걸 변하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것이죠. 그래서 집착의 에너지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의 예외는 없다라는 거지요. 즉, 고정불변하는 것을 찾아보라는 것이죠.

신념은 자신이 믿고자 집착한다는 그 행동자체이것을 의업(意業)이라고 표현합니다.를 말하는 것이죠. 믿고자 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지이거든요. 그 의지가 카르마(업)인 거지요. 그 신념때문에 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거지요.

예를 들어 수컷인 내가 한암컷을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 당분간(10년이 될수도, 며칠이 될수도) 변하지 않을 수 있지요(사랑의 형태가 변하긴 하지요. 연애시절 집착에서 인생 동지 관계, 예를들어 부부). 그것은 내가 그녀를 집착하려는 의지가 계속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즉, 그녀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죠. 그런데 내가 그녀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끊어버릴 수 있는 선택을 할수도 있잖아요. 신념도 마찬가지인 거지요. 선택의 문제인데 집착으로 고착화되어 업(카르마)이 계속 순환되는 것이지요.

조금 어렵게 쓴 것 같은데,

자주 변하지 않는 생각

이것을 분해하면 결국 의도만 남지요. 그 의도의 근본은 '주시하고 보는 마음'이고 '선택 하고 결정하는 마음'이지요. (그런데 그 마음은 항상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반복된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그 집착하는게 뭔지 또 물어봐야하지요. 그것이 변하지 않는 고정된 것인가?

아마 아닐껄요?

제가 수긍할 만한 반론을 제기한다면 풀보팅 10회(보파가 지금은 줄어 보팅 못하고 내일 오늘 댓글에 대한 감사로다가 풀보팅할께요. 히히)

ps. 번뇌의 요소는 탐욕, 성냄,어리석음인데 집착이 지나치면 탐욕 도하기 성냄 도하기 어리석음 3단 콤보가 되지요. 그래서 사견(邪見) 을 제일 경계하지요. 믿쉽니다! 이런거 때문에 문제 많쵸.

신념을 카르마, 벗어날수 없는 업의 굴레라고 설명하셨네요. 듣고 보면 그 사람의 그 고정된 생각조차도 하나의 업이군요. 이렇게 학문과 사상적으로 다가가서 생각하다보면 인간의 존재에 대한 허무감이 밀려와요.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없는걸까요. 모두가 열반의 반열에 든다면 행복할텐데 어째서 우리는 바보 같이 이러고 살까요. 그놈의 생각을 줄이면 될텐데 머릿속에는 온통 생각뿐이예요.

인간은 매일 하는 생각들도 일어나고 소멸해버리고 육신은 생각이 18번일어나는 동안 서서히 노쇠하게 변해가는 죽어가는 동물이잖아요. 여기서 생각을 멈춘다면, 육신이 노쇠해지지 않게 멈춘다면. 이런 고통을 멈출 방법은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나 혹은 죽음 같은 극단적인 방법밖에는 없는 걸까요.

반론을 제기하라고 하셨지만 반론보다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슬픔밖에는 할 말이 없네요. 아무 생각없이 살다가도 이런 글을 보면 한없이 인간은 작고 그래서 나 자신도 작고 하잖은 것이 되는 거 같아서 그랬나봐요.

생각을 한다는 것이 신념을 가진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그 누구도 말한적 없는데 진정한 고통은 바로 그것이고, 그걸 멈출수 없어서 힘들게 산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우울해지면 죽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흔히들 오버싱킹이라고 하는 건데요. 아주 사소한 슬픔이 죽는다면 어떨까하고 끝이나는 경험을 자주 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생각이 많다. 는 말을 보면 좋은쪽보다는 나쁜쪽으로 먼저 생각이 드나봅니다. (포스팅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18번이라는 생각의 횟수가 제가 보이게는 많아보여서 ㅋㅋ 부정적으로 느낀 듯)

반론은 못했지만 생각이 너무 많을때 하는 저만의 방법은 있어요. ㅋㅋㅋ먹거나, 티비를 보거나, 노래를 들으며 걷는거요. 잠시 빠르게 일어나던 생각이 속도를 늦춥니다.

무슨 말을 이렇게 두서없이 적었나 모르겠네요. 피터님 최근에 여행을 다녀오신듯 한데 ㅎㅎㅎ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ㅎㅎ 저는 부러울 따름입니다. ^^

찡여사님,

해탈은 말이죠. 번뇌(탐욕, 분노, 어리석음)가 완죤히 소멸되는 거지 다른데 있는게 아닙니당. 그런데 나는 소멸됬다고 하는 그새끼는 정신병자에요.

고통은 당연한 거(모든 것이 변하니까 고통일수밖에 없죠)구요. 그래서 죽는다면 업에 따라서 다시 출생하지요. 쉽게 말해서, 모든 것이 변한다는 원칙이 확실하다면,

죽음도 변하면 다시 출생하는 것이지요. 죽음의 죽음은 출생이니까,


그리고, 신념을 가져선 안되는 것이 아니라, 의도가 카르마를 생성시키는 거라는 것이지요. 의도가 좀 지나치면 신념이 되는데, 그것이 미래의 카르마를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번뇌는 보리라고 말하지요. 번뇌를 없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관찰하려고 하고 번뇌에 메어있지 않는 연습만 하면 됩니다. 생각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생각에 메어있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래서

놓아버려

라고 하잖아요. 찡여사뿐만 특별한 것(생각이 과하게 많은것)이 아닙니다.


신념을 가지고 지금부터 불러들이는 카르마(당장이 아니라 내생이 될지도 모르니 승질나긴 하죠. 결과가 꼭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를 디자인한다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찡과 찡동생을 키우는 것만해도 대단하고 위대한 카르마지요. 거기다가 그들이 앞으로 멋있는 인간이 되면 더더욱 위대한 카르마가 되는 것이구요.

저는 대단한 사람이군요 ㅋㅋㅋ 잘 새겨듣고 갑니다.

  • 사람이 멍 때린다는 말이 있잖아요. 생각을 안하고 있는 그 순간은 혹시 어떻게 보시나요.

  • 과학자들은 컴퓨터가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을 연구중입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환자들 중에 뇌는 죽어있지만 육신만 살아있는 경우는 어떻게 해석하시나요.

질문: 사람이 멍 때린다는 말이 있잖아요. 생각을 안하고 있는 그 순간은 혹시 어떻게 보시나요.


답변: 그것은 번뇌 중 무지(어리석음)에 빠진 것으로 여김, 따라서 불교에서는 졸라 깨어있으라고 하잖아요. 자각함을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생각을 놓아버리는 것은 멍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 과학자들은 컴퓨터가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을 연구중입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답변: 인공지능이 인간이 만들었다고 착각하는 것이 문제지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그 '마음'은 조건이 발생하면 일어나는 법입니다. 인공지능이 감정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그 '마음'이 형성되는 조건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고로 감정은 마음의 보조적인 요소일 뿐입니다. 불교의 유식사상이 그러한 기조에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연구를 졸라해서 인공지능이 감정을 가지게 된다면 '마음' 일어나는 조건이 형성되어져서 새로운 생명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인간(과학자)은 그 출현의 조건을 만들어준 셈이겠지요. 이러한 생각은 불교의 입태경이나 티벳사자의 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느정도 수긍할수 있습니다.


질문: 환자들 중에 뇌는 죽어있지만 육신만 살아있는 경우는 어떻게 해석하시나요.


답변: 유식사상이나 남방불교의 아비담마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마음'의 구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에는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이 있는데, 심층의식중에서 '아뢰야식(유식사상)' 혹은 바왕가(남방불교/생명지속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심층의식은 표층의식과 달리 외부와 소통하지 못하지요. 그러나 외부와 소통하지 못하는 것인지 우리는 모르긴 하지요. 식물인간을 보고 우리는 그가 의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가 의식이 없는지 확인할수는 없지요. 즉, 식물인간과 정상인의 표층의식과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가 뇌사상태이지요. 그러나 심장은 살아있지요. 그래서 고대인들은 심장을 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것 같습니다. 심층의식은 표층의식과 연결되어 있지만 표층의식이 심층의식에 접근하기는 졸라힘들지요. 그래서 요가수행자들이 겁나 수행을 통해 거기에 접근하고 나아가서는 심층의식을 청정하게 만들어 부처를 이룬다고 표현하지요.

세번째 질문의 그 아프신 분은 생각이 없다고 하는게 아니라 또 다르게 해석하시는군용. 잘보구 갑니다.

@banguri님의 jcar토큰 보팅 선물입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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