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diary] 예전과 오늘 일기 2 - 가능성의 재방문

in #kr6 years ago (edited)


역시 저번처럼 예전 일기를 꺼내어 본다


201X. 12.

알이 부화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거나, 부화한 것이 결국 새가 아니었다거나. 종종 그 알에 무언가를 적어놓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적힌 문장들이 언제나 그 내용물을 정확히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지시한 것과 각인된 것의 차이에서 불행의 씨앗이 자라나기도 한다. 그 것을 또 다른 불행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기회로 볼 것인지는 나름이겠지만, 대체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측과 엇나간 결과를 놓고 불행으로 해석한다. 이는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의 실패와도 비슷한데, 예정된 대로 어떤 것을 이루었기 때문에 행복해하기보다는 예정된 것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의 고리가 연쇄하여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점을 지닌 사람들은 엇나감을 직면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잠재된 상태로서의 알을 사랑하기도 한다.

젊음도 마찬가지로 가능성으로 치환되곤 한다. 젊음의 과정은 지난하거나 어디론가 갈지 모르는 불안정성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라, 젊음의 결과를 통해 이루어낸 어떤 것을 이미 가정한 상태에서 - 좋은 사람을 만났다거나 괜찮은 인생을 살았다거나 - 젊음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이루어낼 것이라 할지라도 딱히 차이를 보이진 않는다. 가능성의 시간들을 사랑하는 데에, 성취는 상상의 산물과 현재의 상황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루어낸 성취는 더 높은 성취를 기대하고, 이루어냈어야할 성취는 이루지 못했다는 것에 후회를 불러오기도 하므로.


그리고 오늘의 일기


지금도 역시 가능성을 사랑하고 성취 지향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가능성의 기대가 엇나간다고 하더라도 조금 더 즐겁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기대되지 않았던 부분에서 새롭게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작업들이 사실은 가능성을 옭아맸던 경우도 있어서 '되는대로 살자'까지는 아니지만 '그래 그냥 직접 부딪혀서 해보고 그 다음에 살펴보자'와 같은 현재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어차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과 세계가 부여하는 가능성의 범위는 다르므로.)

모든 시점이 새벽에 머물러 있기를, 그래서 새로운 하루의 계획과 벌어질 일들에 대해 새벽에 상상하는 것이 치기 어린 나날의 시점이었다면, 지금은 이제 잠이 들어야할 새벽의 존재도 믿게 된 것 같다. 어떤 새벽은 일찍 잠이 든 결과로서 마음이 부푼 새벽이지만, 또 어떤 새벽은 하루종일 뛰어다닌 결과로서 어제를 찬찬히 돌이켜볼 새벽이기도 한 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카페인을 섭취하면 아예 잠이 깨거나, 잠에 기절해버리거나 조금 극단적인 둘 중 하나의 반응이 나타나는데, 오늘은 묘하게도 둘다 일어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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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기대가 엇나간다고 하더라도 조금 더 즐겁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가능성이 생긴 거라고 볼 수 있을 때도 많죠.

네. 그렇습니다. 예전과 차이가 있다면, 예전에는 가능성의 가짓수와 종류를 저 스스로 통제하고 싶었던 반면, 지금은 오히려 그냥 놓아두었다고 할까요- 세계가 빚어내는 (예상치 못한) 가능성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

10대나 20대 초에 비해 유해졌다고 느낄 때가 가끔은 있는데, 실상은 성격이 변했다기보다 계획대로 안 되었을 때에도 충분히 마음에 드는 가능성이 또 있다고 느낀 경험이 축적된 결과 같더군요.

제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명대사를 정리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스팀잇 글, 특히 @qrwerq님 글을 읽으면서 명문장을 정리해볼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ㅎ
그런데 @qrwerq님 글은 - 특히 일기 - 문장 하나 하나가 다 좋아서.... 너무 많은 거죠~ㅋㅋ

오늘 제가 좋아한 문장은~

어떤 새벽은 일찍 잠이 든 결과로서 마음이 부푼 새벽이지만, 또 어떤 새벽은 하루종일 뛰어다닌 결과로서 어제를 찬찬히 돌이켜볼 새벽이기도 한 것이다.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문장을 살짝 꾹꾹 눌러담아 쓰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다보니 오히려 긴 글을 적는게 좀 부담스럽기도 합니다ㅎ

항상 전자의 새벽만 바라보곤 했는데 요즘엔 후자의 새벽의 느낌이 참 좋더라고요. (점점 외국 시차에 적응하게 되는 듯한 느낌은 함정입니다...)

두 일기 모두 @qrwerq 님에 어울리는 좋은 시이지만 (제눈엔 일기가 아닌 시로 읽혀서..) 오늘의 시에 마음이 더 기웁니다. "조금 더 즐겁게 바라보게 되었다"는 문장이 참 좋아요 :)

고맙습니다. 사실 우리라도 즐겁지 않으면 누가 우리의 삶을 즐겁게 봐줄까 싶기도 합니다ㅎㅎ

후암.. 이런 좋은 글에 참 댓글 달기가 힘들어요..ㅋ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읽으면서 와 좋다 라고 느끼는데..뭐라고 답글을 달아야할지 ㅎㅎㅎ
식상한 표현이지만 진심을 담을 수 있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그냥 잘 닿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댓글도 항상 무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찬찬히 잘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어차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과 세계가 부여하는 가능성의 범위는 다르므로

이 부분이 좋아요. 내가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고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그 결과가 꼭 안 좋은 건 아니라는 "또다른 기대" 를 품게 해서 :)

그 '또다른 기대'가 설레게 하더군요. 우연히 마주하는 기회를 위해서 준비를 하게 되기도 하고요. (언제 써먹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요.) 삶의 모든 기회들이 결정되어 버리면 그것만큼 빡빡하게 재미없는 삶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나이를 먹는 것이 맛있다고 느낄 때는

가능성의 기대가 엇나간다고 하더라도 조금 더 즐겁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기대가 어긋나더라도 즐겁게 혹은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은 어긋남 하나하나에 얼마나 불안해 하고 떨었는지 모를 그 시절을 돌이키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마냥 좋진 않을 거 같네요. 그냥 지금의 제 나이가 좋은 거 같습니다.
근데 카페인 섭취 후 아예 잠이 깨는 것과 잠에 기절하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어떤 것이지요? 아... 혹 동시가 아니라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를 말하는 건가요? 순간 궁금함이...^^;;

저도 지금의 제 나이가 좋습니다만, 가끔은 지금의 지식과 시선을 가지고 돌아가면 또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물론 정말로 그렇게 되면 누구다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겠지요. 허나,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때는 그 때의 최선을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정말로 잠은 잘 안오는데 엄청나게 피곤한 동시가 있기도 하고요, 잠에 완전히 깼다가 기절하면서 나타나는 순차적인 상황도 있습니다. 이게 딱 무자르듯이 저에게 나타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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