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과 학생

in #kr6 years ago (edited)

나는 작곡 입시 강사다. 올해는 레슨을 많이 줄였지만, 작년까진 꽤 바빴다. 올해 새내기가 된 학생 A가 공강이라며 케이크를 들고 찾아왔다.

대학에 처음 들어가면 입시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난다. 나도 그랬고, A도 그랬을 것이다. 밥을 먹으면서 밀린 회포를 푼다. 수업은 안 빠지는지, 합주는 잘하고 있는지 물어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잔소리를 한가득 늘어놓는다. 나도 지키지 않으면서 말로 뱉기는 참 쉽다.

A는 삼수생인데 원하는 대학을 가진 못했다. 이 상태로는 더 입시를 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어 아쉬운 대로 원치 않는 대학에 들어갔다. 처음 입학할 때만 해도 자퇴를 하겠다느니, 반수를 하겠다느니 의지를 불태웠지만, 오늘 모습을 보니 학교 사람들과 꽤 친해진 모양이다.


A가 재수를 할 시절, A의 소개로 B가 내게 레슨을 받은 적이 있다. B는 다른 전공이었고, 이미 '좋은' 학교에 합격한 상태였다. 대학에 합격은 했지만, 입학 전 화성학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전공 레슨도 아니고, 이미 원하는 대학에 붙은 때라 비교적 편한 마음으로 수업할 수 있었다. 아마 B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B는 연락 없이 늦거나, 안 오는 날이 많았다. 오더라도 과제를 해오지 않았고, 나는 가끔은 그러려니 하다가, 가끔은 화가 나기도 했다.

두 달의 짧은 레슨 동안 B는 빠지거나 늦는 날이 더 많았고, 마지막 레슨 땐 오지도 않았다. 그 후로 아무 연락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내심 B를 미워하고 있었다.


A와 밥을 먹고 카페에 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A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B 기억나시죠? B가 몇 주 전 자살했어요."


A의 입에서 나오는 B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 이름과 얼굴이 쉽게 겹쳐지지 않았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기도 했고, A가 한 말이 쉽게 이해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A는 멍한 표정으로 B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최근까지도 잘 지냈는데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담담하게 둘이 동갑이었냐 물었고, A는 B가 동생이라며 98년생이라고 했다. 98년생. 그때부터 모든 게 실감나기 시작했다. 98년생이 왜 세상을 떠나야 하지? 잠깐 눈물이 날 것도 같았지만, 우리가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비겁하게도 내가 B를 미워하는 티를 냈는지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따뜻한 말을 건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나와 레슨을 할 때도 힘들었을까? 수업에 자주 늦고, 연락 없이 오지 않았던 것도 그 이유와 관련이 있었을까? 왜 나는 몰랐지? 전공 선생님은 알았을까?

A와 그 이후로도 길게 대화를 나눴지만 나는 B의 생각뿐이었고, 집에 돌아와 B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부음을 읽었다. 기분 탓인가. B의 눈이 무척 슬퍼 보였다. 이미 장례까지 끝난 마당에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B가 대학에 들어간 이후, B와 한 번 연락 할 일이 있었다. 음악하는 곳은 좁으니까, 어쩌다 보니 만나게 됐다. B는 연락 없이 마지막 수업에 안 온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제일 먼저 그 얘기를 꺼냈다. 죄송하다고. 이제 와 다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그때 내가 웃었던가, 웃지 않았던가. 괜찮다고 했던가, 뭐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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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죽음의 맥락을 모조리 이해할만큼 우리가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주어진 거리만큼, 역할대로만 충실했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둘 사이에 주어진 거리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더 다가가지 못한 건 후회로 남네요. 다가가지 않았더라도 따뜻한 말 한마디 정도는 해줄 수도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래도 우리가 완벽할 수 없다는 말이 참 감사합니다. 위로가 되네요.

....가슴이 너무 무거워졌어요... 저 너무 힘들꺼같아요 갑자기 예고도 없이 그렇게 가버리면...하...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제 글로 @song1님을 힘들게 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드네요. 연락도 하지 않았고, 본 지도 오래된 터라 또 금방 괜찮아졌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네요. 저는 아직도 반은 믿고, 반은 믿지 못하는 얼떨떨한 상태인 것도 같습니다. 저도 그 친구 가는 길에 뒤늦게나마 명복을 빌어야겠습니다.

주변에서 사람이 떠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그런 것 같아요. 잘해준 것보다는 못해준 것들이 떠오르죠. 별로 친하지 않았어도 그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은 별로 없었어도 말이죠...

그러게요. 별로 친하지 않았어도, 좋은 기억은 별로 없었어도... 하지만 돌아보면 함께 몇 번은 웃었던 것도 같고요.

지금 만나는 사람이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어제는 아무도 모르고 지나간다는게, 그 안타까움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살아나는 진실이지요... 안타깝네요.

아직 시작도 안해본 아이가 또 이렇게 세상을 떠나네요. 그리고 또 남은 사람은 하루를 살아가지요. 제가 편하려고, 핑계 거리를 찾는 것 같습니다.

98년생... 안타깝네요. 많이 힘들었겠죠. 나루님은 마지막에 B를 만났을 때 죄송하다는 B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신경쓰지 말라고 웃어줬을겁니다.

결국 떠난 이와는 전혀 관계도 없는 자기 위안이지만, 그런 위안이라도 받아야지요. 이상하리만큼 마지막 만남이 기억나질 않네요. 공백처럼 비워져있어요.

어쩌면 공백이 @ab7b13님에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어쩌면요.

어머... 안타까워라. 죽음앞에선 누구나 관계에 대한 의심을 할수 밖에 없더라고요. 마지막 문장 충분히 이해가 가네요. 그렇다고 너무 생각은 많이 하지 마시고요. ㅜㅜ

저보다 어린 이의 부고를 처음 들어서 더욱 그랬던 것도 같습니다. 저와는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요 뭐. 그냥 살면서 몇 번 돌아보게 되겠지요. 슬픔에도 거리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감사합니다:)

어이쿠야.. 이런 내용일 줄은 몰랐어요 ㅜ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98년생이면.. 정말 꽃다운 나이인데..
안타깝네요

그러게요. 이런 일이 다른 곳에서도 비일비재하겠지요. 관계를 맺는데서 오는 아픔이겠지요. 때가 너무 이르고, 잘못됐다는 생각은 듭니다.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는 한 누구도 그 심정을 이해 못할 것 같아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우린 힘내자구요!

맞아요. 당사자가 아닌 이상은 아무도 그 슬픔의 깊이나 무게를 가늠할 수도, 느껴볼 수도 없지요. 피지도 못하고 져버린 그 아이의 삶이 한동안 먹먹했습니다.

슬프고 무섭네요~

답답한 마음에 끄적인 글이 @sj3589님에게 또다른 부담이 되진 않았나 걱정 됩니다. 잘 지내시죠? 요즘 바쁘신가봐요. 가끔은 소식 전해주세요.

예기치 못한 이별은 언제나 후회만을 남기는 것 같아요.. 뭐라 더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그저 제가 이 글을 읽고 함께 마음 아파했다는 말 하고 싶어요.

잠깐이나마 그 친구를 생각해주신거겠죠? 저는 그 친구의 아픔이 무엇이었을지 곱씹어 봤습니다. 도통 알 수가 없더라고요. 원래 그런건 눈에 보이거나, 드러나는 게 아니니까요. 예기치 못한 이별은 후회를 남기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잊겠죠. 그래도 살면서 몇 번은 돌아보고 싶네요. 좋았던 기억들을 많이 생각하려고요. 감사합니다.

아, 98년생이 왜...
한창 행복할 나이에...

너무 속상하네요...

그러게요. 행복만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일텐데... 저희가 그 슬픔의 깊이나 무게를 알 순 없겠지요. 그냥 멀리서 추측해 볼 뿐. 그간 그렇게 힘들었다면, 떠난 곳에선 좀 더 편히 지내길 바라는 마음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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