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끄끄|| #26 paper

in #kr-book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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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페이퍼’라는 잡지를 아시나요? 어렸을 때 즐겨보던 잡지였는데 여러 작가들이 글이 담겨 있어 매달 구독해보고는 했던 잡지였죠. 에세이가 잔뜩 담긴 잡지랄까. 어쩐지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잡지가 있다.

처음 페이퍼와 인연을 맺은 건 군대에 있을 때다. 내무반에는 심심한 시간을 달래기 위한 책들이 구비되어 있는데 사회에서 나름 유명하다는 소설이나 필독서 같은 책들이었다. 이런 책들 사이로 종종 잡지도 보급이 되었는데 ‘샘터’나 ‘좋은 생각’ 같은 교양이 가득한 책이었다.
사회였다면 들쳐보지도 않았을 책이었지만 군대라는 곳이 워낙에 할 일이 없는 곳이라 샘터 같은 교양잡지도 인기가 좋았다.

모두가 샘터를 읽고 있었을 때 내게 눈에 들어온 한 잡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페이퍼였다. 페이퍼는 군에서 보급되는 책이 아니었기에 누군가 사다 놓고 그냥 전역했던가 아니면 타 내무반에서 빌려왔다가 잊어버리고 남겨진 것 같았다.

크레파스로 적어 놓은 듯한 ‘paper’라는 제목에 끌려 호기심에 읽게 되었는데 꽤 볼만했다. 여러 작가들의 여행기나 사진도 멋들어졌고 무엇보다 일반인들이 보낸 사연을 모아 실어 놓았는데 그 사연들을 읽는 게 재밌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군대라는 곳에 있으면 부쩍 사회에 관심이 많아진다. 물론 정치, 경제 따위가 아닌 사회의 소소한 이야기들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사연이 담긴 글을 읽고 있으면 꼭 내게 온 편지를 읽는 기분이었다.

종종 가슴 뭉클한 사연을 읽을 땐 눈을 흘리지 않기 위해 노력도 해야 했고 재미난 이야기를 읽을 땐 웃음을 감추지 못해 선임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난 페이퍼의 매력에 빠졌고 휴가 나가는 동료가 있으면 꼭 신간을 사다 달라고 부탁해 가며 읽기 시작했다.
김원 작가를 좋아했고, 황경신 작가를 동경했다. 그들처럼 언젠가는 잡지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


술잔을 앞에 두고 그녀가 물었다.

 “어쩌다 기자가 됐어요?”

신기한 질문이었다. 어쩌다 기자가 됐냐니. 대게는 꿈이었느냐? 어떻게 기자가 됐냐? 식의 질문을 하지 않던가. 근데 막상 생각해보니 난 어쩌다 기자가 됐지? 잘 모르겠지만 그럴싸한 대답이 필요했다.

 “페이퍼라는 잡지가 있어요. 잘 모르시겠지만. 이런저런 글이 적힌 잡진데, 그거 보면서 혼자 글도 써보고 하다 잡지사에서 일하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가 페이퍼를 알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를 무시해서 그런게 아니라 여태껏 누군가에게 페이퍼를 아냐는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저 알아요. 페이퍼.”

놀라 작은 눈이 크게 뜨였다.

 “정말요?!”

나는 믿어지지 않아 재차 확인에 확인을 했다.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잡지 맞느냐고. 김원 작가의 사진과 황경신 작가의 글이 실리는 그 페이퍼가 맞느냐고. 정유희 작가의 여행기가 올라오고 김양수 작가의 만화가 있는 그 잡지 맞느냐고. 내가 반복된 질문을 할 때마다 그녀의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좋아해요.”

물론 날 향한 말은 아니다. 내가 말한 잡지 페이퍼에 대해서리라. 그래서 더 두근거렸다. 세상에. 온통 외국인만 있는 곳에서 한국인을 만난 기분이 이러할까. 내가 말하는 걸 알아듣는 것만으로도 놀랍고 반가웠다. 그녀는 페이퍼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척척 알아듣고 대답했다.

 “옛날에는 자주 봤었는데 요즘에는 통 못 봤어요. 근데 아직 나와요?”
 “네. 아직 나와요. 얼마 전에도 사서 봤었거든요.”

나와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것도 우연히 만나 운명처럼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이런 게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그 착각에 신이 나설까. 아니면 술기운이 올라서일까. 페이퍼 이야기를 시작으로 회사 선배 이야기, 친구 녀석 연애 이야기 등의 시시콜콜한 것까지 그녀에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는 회사에서 펜이 없어졌어요. 분명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갔는데 다음날 보니까 없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펜이었는데. 아, 이 얘기가 왜 나왔지….”

어쩌자고 이런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건지. 그래도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작게나마 웃어주었다.

 “저희 회사에 그 펜 많아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갖다 드릴게요.”

우린 비어진 잔에 마지막 술을 채웠다. 밖에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사람이 빠져나간 가게 안은 끓어오르는 오뎅탕 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있었다.

 “그러면 보답으로 제가 밥 살게요.”

공식과도 같은 대답을 끝으로 우리는 가게를 나섰다. 밖은 내린 눈이 어느새 소복이 쌓여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핸드폰이 울었다. 별일 없으면 오늘 술이나 한잔 하자는 친구 녀석의 전화였다. 별다른 약속이 없었기에 그러자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핸드폰을 자세히 보니 짧은 문자가 한통 와있었다.

 [어디예요?]

그녀였다. 방금 온 문자인 줄 알았더니 무려 20분 전에 온 문자였다. 아, 이런…. 나는 부랴부랴 가던 길을 멈추고 핸드폰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제 퇴근하는 길입니다. 죄송해요 문자를 이제야 봐서.]

너무 늦게 문자를 보낸 탓인지 답신은 오지 않았다. 전화를 했어야 했을까. 이제라도 전화를 할까. 이런 고민을 할 게 아니라 지금이라도 전화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한참 저 혼자만의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시간 괜찮으면 오늘 만날래요? 저도 지금 퇴근하는데.]

그녀의 회신에 대한 기쁨도 느낄 새 없이, 그리고 방금 잡은 친구와의 약속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체 답신을 보냈다.

 [네. 괜찮아요. 어디서 볼까요?]
 [저번에 간 곳 괜찮았는데 거기서 보죠.]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면 한 시간 정도 걸릴 거 같아요.]

한 시간이나 걸릴 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제 내린 눈에 도로는 엉망이었다. 거기에 금요일 퇴근시간. 한 시간 안에 도착하면 그나마도 다행이었다. 부랴부랴 차에 올랐다. 그리고 잊지 않고 친구에게 연락해 약속도 미뤘다.

시내에 들어서자 도로는 이미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시간이 꽤 흐른 거 같은데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은 10분 전 그대로였고 거기에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 일이 내 바람대로 혹은 내 생각한 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난 부자가 됐을 테고 회사에 나갈 일도 없으니 퇴근 시간도 없어 약속 시간 10분을 남겨놓고 꽉 막힌 길 위에 있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은 없었을 텐데.
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죄송해요. 조금 늦을 거 같아요. 차가 많이 막혀서...]

진짜 돌아버리겠네. 문자도 늦게 받았는데 약속시간에도 늦어버리면. 무슨 사과를 어찌 해야하는지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괜찮아요. 저 먼저 들어와 있으니까 천천히 오세요.]

먼저 들어와 있다는 건 벌써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다는 소리 아닌가. 그녀의 문자를 보자 마음은 더 초조했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차를 들고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죄송해요. 금방 갈게요.]

난 결국 약속 장소에 20분을 더 넘기고서야 겨우 도착했다. 가게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기 시작해자 창가 쪽에 앉아 있는 그녀가 날 발견하고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난 머리에 쌓인 눈도 털지도 못한 체 그녀가 있는 자리로 향했다.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의 민망함에 자리에 앉자마자 사과부터 시작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그녀가 언짢은 기색 없이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덕분에 저도 여유롭게 올 수 있었어요.”

거짓말이다. 문자에서도 말했다시피 그녀는 이미 약속시간 10분 전에 가게에 도착해 있었다. 단지 내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 거짓말을 했으리라. 부끄러움일까, 추위 때문일까. 붉게 달아오른 볼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배고프시죠? 오늘은 마음껏 드세요. 제가 다 내겠습니다.”

난 메뉴판을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우리는 지난번처럼 오뎅탕과 소주를 시켰다. 음식이 나오고 첫 번째 소주를 비워내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물었다. 날이 추웠는데 감기에는 안 걸렸는지. 회사의 일은 어땠는지 따위의 얘기들.

 “사실 오늘 드릴 게 있어 만나자고 했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에 놓아둔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근데 내가 그녀에게 받을 게 있던가.
그녀가 내게 내민 건 다름 아닌 페이퍼였다. 그리고 그 페이퍼 위로 노란색 고무줄로 고이 묶여 있는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뭔가 봤더니 내가 잃어버렸다고 말했던 볼펜 다발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조금 늦었지만.”

나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그녀가 앞에 있다는 사실도 잊고 페이퍼부터 들춰봤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페이퍼에는 여전히 다양하고 일상적인 글들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그녀가 내게 연하장을 대신해 적은 편지가 적혀있었다. 편지를 읽는 동안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기다려줬다.

나와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그것도 우연히 만나 운명처럼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이런 게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자리에 내가 좋아하는 게 하나 더 늘었다는 것과 그건 절대 착각이 아니라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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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끄끄 | paper
wirtten by @chocolate1st




||북끄끄 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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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터랑 좋은 생각 그리고 페이퍼를 기억하면 왠지 옛사람같네요^^

You received 4.57 % upvote as a reward From round 2 on 2018.09.14. Congrats!

감사합니다. :)

Paper 잡지 학창시절 보물처럼 아껴서 봤었는데... 디자인도 글도 정말 신선한 잡지였죠. 저도 김원 황경신작가 동경했어요. 어쩌면 그렇게 글을 잘쓰는지...ㅎㅎ

키위파이님도 페이퍼 좋아하셨군요. :) 스팀잇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페이퍼를 알고 계시더라고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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꺜!!!!>_< !!!!!! 당장 잡아야한당!!!!!

잡았을까요? 못잡았을까요? ㅋㅋ

읽는 내내 제가 다 설레이고 두근거리네요..
출근길이 너무 행복해 졌습니다^^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으실 거 같아요. 꽁냥꽁냥 하던 그런.
출근길이 되셨기를. :)

아 설레라.

초코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공감되기에
이글 저에겐 엄청난 로맨스네요.

사실 이 글은 기린님이 페이퍼를 아신다고해서 생각나서 쓴 글이어요. :)
옛날에 페이퍼를 아는 사람 만났을 때가 생각나서. ㅎㅎ

제 책상서랍에 모나미볼펜도 한박스 있습니다.
초코님이 원하신다면야 얼마든지 내어드리지요 :)

그럼 전 공식처럼 밥을 사들겠습니다. :)

와 설레고 여기 내려와보니 또 설렘... > <♥

페이퍼잡지보다 하루를 망치는 방법이라는 글이 보고 싶네요.

참 다양하게 하루를 탕진하는 방법들이 나와있었죠. ㅎㅎ 아직 페이퍼는 나오니 나중에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읽어보셔요. :)

언제 어디서 접했던건진 이제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저도 한동안 PAPER를 재밌게 읽었어요. 여타 잡지와 달리 읽을거리가 많아서 좋아했던듯요.
아래 이야기 읽는 동안 사케집(?)에 얽힌 기억이 떠올라 참 좋았어요 :)

한 동안 페이퍼가 안 보여서 폐간 된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아직 나오고 있더라고요. 예전처럼 월간은 아니고 계간으로 해서 그 명맥만 이어가고 있는 거 같아요. ㅠ

사람들이 많이 보길래 관심 가져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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