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끄끄|| #22 무라카미 하루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in #kr-book6 years ago (edited)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jpg


바다표범 오일이란 거 아십니까? 문자 그대로 바다표범의 지방으로 만든 건강보조제. 북극권의 에스키모들은 채소를 먹지 않고 동물성 식품만 먹는 데도 동맥경화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조사해보니 그 이유가 그들이 날마다 먹는 바다표범 고기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 포함된 오메가3 지방산이 혈액을 맑게 해서 심장을 튼튼하게 하고 관절을 유연하게 지키는 효과를 낳았던 것이다.

바다표범 오일은 일본에서도 손에 넣을 수 있지만, 비교적 고가여서 오슬로에 갔을 때 현지에서 구입했다. 건강보조제 가게에서 캡슐에 든 것을 사려 하니, 계산대 아주머니가 “캡슐보다 생기름으로 먹는 편이 훨씬 효과 있어요. 그런데 냄새가 좀 나서…….”라고 했다. ‘외국인에게는 무리일지도’ 같은 뉘앙스를 읽고 ‘좋아 한번 사보자’ 이렇게 돼서 생기름을 사왔다. 기름이 캡슐보다 훨씬 쌌던 것도 이유의 하나였지만.

그런데 실제로는 냄새가 ‘좀’ 나는 정도가 아니었다. 농담이 아니고 엄청나게 비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 위로 커다란 바다표범 한 마리가 올라와서 어떻게든 해서든지 밀어제쳐 억지로 입을 벌리고 뜨뜻미지근한 입김과 함께 축축한 혀를 입안으로 쑥 밀어넣은’ 것처럼 비렸다. 결코 그런 일은 당하고 싶지 않겠지만. _본문 바다표범의 키스에서



하루키의 소설은 잘 못 읽지만 그의 에세이는 자주 읽는다. 하루키의 소설 속 세상은 차갑고 복잡해 이해하기 어렵지만 에세이 속 그의 일상은 따뜻하고 단순한 것들뿐이다. 내가 그의 소설은 안 읽어도 에세이는 읽는 이유다.

일전 하루키의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에세이를 읽은 적 있다. 워낙 하루키와 성향이 맞질 않아(사놓고 쳐 박아 둔 게 한 두 권이 아니다) 그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이해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읽었던 에세이였다.
읽고 난 후 하루키의 생각과 사고방식을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그의 에세이는 소설과 달리 소소한 재미가 있었다. 이후 무라카미 라디오라는 에세이가 있다는 걸 알고 세트로 전 권(이라고 해봐야 모두 세 권이다)을 구입했다.
이 책은 두 번째 무라카미 라디오다. 첫 번째를 건너뛰고 두 번째부터 읽은 게 된 건 순서가 있는지 모르고 대충 골라 읽었는데 그게 하필 두 번째 권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 ‘독후감을 어떻게 쓰지?’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책 내용 중 기억나는 건 거의 없다. 책 내용이 시시콜콜하고 가벼우며 매우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커피 주문하는 사람 이야기, 장어집 고양이가 어떻게 자는지, 호텔방에 있던 금붕어의 안부 같은 시시한 이야기들뿐. 에세이가 보통의 일상을 담는 글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물론 내용이 가벼워 재미가 없었다는 건 아니다. 하루키가 갖고 있는 생각과 그의 투박한 단어를 읽는 재미는 쏠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기발한 표현들을 읽고 있으면 존경심이 저절로 생긴다. 누가 바다표범 오일을 먹으며 바다표범과의 키스를 상상하겠는가. 이밖에 타인의 섹스에 관한 이야기도 매우 흥미로웠다.

역시 작가는 사소한 것이라도 재밌게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난 여전히 그의 소설은 못 읽겠다.

맺음말2.jpg

||북끄끄 책장||


#15 최은영, 그 여름
#16 릴리 프랭키, 도쿄 타워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17 김보통,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18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19 김영하, 오직 두 사람
#20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21 정유정, 7년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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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읽지 않은 소설 중에 상실의 시대를 참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제가 사람이 우울해서 그런가봐요.ㅎㅎ
제가 아는 초코선생님은 사소한 걸 참 재밌게 의미있게 쓰시는 분인데 ^^
저두 처음 보다가 어 초코님이 에스키모라는 단어를 쓰실 분이 아닌데? 라고 생각했다능.ㅋㅋ

저도 상실의 시대는 재밌게 봤어요(물론 내용은 이제 잘 기억 안나지만). :) 근데 그때는 군대에 있을 때라서 그 마저도 재밌게 읽었는지도 모르고요. ㅋㅋ

사소한 걸 재밌게 쓰고 싶은데 요즘 영 재미 없게 살고 있어서 그런지 잘 안 써지네요. ㅋㅋ

반가워서 댓글 남겨요. 저 요즘 이 책 읽고 있거든요. "작가는 사소한 것이라도 재밌게 쓸 수 있어야 한다."란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그의 소설은 못 읽겠다."라는 말에도 조금 공감이 가요. 어렸을 적(?)엔 하루키 덕분에 소설을 좋아하게 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모르게 가볍게 느껴지기도 했었거든요. 그래서 한동안 읽지 않다가 요즘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읽고 있어요. 글이 참 맛깔나고, 말미의 추신 같은 것도 신나서 읽게 돼요.

안녕하세요 애플 포스트님. :) 저도 말미에 작게 적힌 글이 더 재밌어서 꼼꼼히 읽었던 거 같아요. ㅎㅎ 본문은 본문대로 읽고 추신 같은 것도 나름대로 다른 글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니 재밌더라고요. :)

헉 표현이너무생생해요ㅜㅜ 바다표범이....차마표현못하겠네요 하하 어쩜이리생생하게표현하시는지 책이궁금해집니다

한 번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하루키 에세이에서는 소설에서 볼 수 없는 많은 면을 볼 수 있는 거 같아요. 바다표범의 키스 같은 묘사도 보면 소설에서는 이런 엉뚱한(?) 상상을 본 적 없거든요. ㅎㅎ

저도 그의 소설은
손이 잘 가질 않습니다.....
ㅋㅋ....ㅡ_ㅡ..하아...ㅋㅋ

마흔이 되면 전 다시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서른이 넘어 그의 에세이를 읽을 수 있게 되으니 마흔이 되면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ㅎㅎ

그 향기?는 정말 짜릿합니다. 하루키를 생각하면 아직도 20년 전의 노르웨이 숲이 훅 다가오는 듯합니다.

그 향기를 경험하셨다니. ㅎㅎ 저는 워낙에 비린내를 싫어해도 평생가도 못 먹을 거 같아요. :)

하루키의 소설 속 표현력에 감탄할 때가 많았죠.. 특히 야한 부분 읽을때... ㅎ_ㅎ;;)

하루키야 워낙에 기승전섹스로 유명하신 양반이라서. ㅎㅎ 처음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때의 충격이. ㅋㅋ
근데 에세이를 읽고 나서 안 건데 하루키 본연이 그냥 야한 걸 좋아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

제목부터 끌리는 책이네요. 라오스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전 하루키 소설위주로 읽어서 어떤 내용일지 상상이 안가네요 ㅎㅎ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책을 많이 읽어보셨다면 정말 다른 하루키를 경험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ㅎㅎ
소설과는 너무나 상반대는 분위기거든요. :)

많은 작품을 읽지는...않았지만, 기껏해야 네 작품이네요. ㅎㅎㅎ
저는 하루키의 소설이 주는 우울이 좋던데요. 근데 라디오 세권도 사두었지만 먼지만 쌓여가고 있네요.

네 작품이면 많이 읽으셨네요. ㅎㅎ 저는 완독한 건 한 권 뿐이고 나머지는 앞 부분만 읽다가 다 못 읽은 책들 뿐이거든요. ㅠ
이터널님도 무라카미 라디오 가지고 계시군요. ㅋㅋ 무엇가 가볍게 보고 싶다 하실 때 읽어보셔요. 나름 에세만의 재미가 있더라고요. :)

아래 읽기 전에는 바다표범 직접 힘들게 드시는 줄 알았습니다 ^^
소설이군요 ~.
바다표범이 올라왔다는 표현이 재미납니다.
그리고 키스로 빗대는 것도 특이하고요.

전 아마 절대로 먹지 못할 거예요. 비린내를 죽도록 싫어하거든요. ㅋㅋ

바다표범 키스를 생각하는 건 정말 하루키 밖엔 못할 상상인 거 같아요. :)

하루키 에세이는 안 읽어봤는데 올 여름 한국 가면 꼭 사와야겠어요. 근데 전 하루키 소설 좋아한답니다. ㅋ

저도 소설을 싫어하는 건 아니데 이상하게 못 읽겠더라고요. 정확하게는 흥미를 못 느낀다고 할까요? 그래도 읽다가도 다른 책이 읽고 싶어서 나중에 읽어야지 하고 안 읽게 되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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