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끄끄|| #15 최은영, 그 여름

in #kr-book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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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은 그때 수이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한다.
우린 서로 너무 다른 사람들이 되었어. 너도 느끼고 있었겠지. 서울에 올라온 이후로 모든 게 다 변해버렸잖아. 넌 네 얘기를 나에게 하지 않잖아. 네가 날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 내가 너에게 가장 좋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널 위해서 따로 뭘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넌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해. 네 잘못은 없어. 다 나 때문이야.
그 위선적인 말들을 이경은 기억한다.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이에게 이경은 괜찮으냐고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수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니까…… 다들 이렇게 사는 거니까…… 그러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분노도, 슬픔도,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수이는 말했다. 무엇이 수이를 체념에 익숙한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이경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했다. 걱정하지 말라니, 그것이 버림받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일까. _본문에서

_최은영, 그 여름



소설집 ‘쇼코의 미소’ 최은영 작가의 단편 소설이다. 쇼코의 미소를 읽고 난 후 감정이 살아있는 문체와 감성이 좋아 그녀의 다른 책을 찾던 중 만나게 된 작품이다. 2016년 ‘21세기 문학’ 겨울호에 실렸던 소설을 단행본으로 옮긴 책이다.

이야기는 고등학생 이경과 수이의 첫 만남으로 시작한다. 하굣길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이경은 날아온 공에 맞아 다치게 된다. 안경이 부러지고 코피까지 날 정도의 부상이었다. 공을 찬 사람은 축구부의 이수. 이수는 서둘러 이경을 양호실에 데려가기도 안경점에 함께 간다. 이것을 인연으로 둘은 가깝게 지내게 되고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몇 번의 만남 후 둘은 어느새 연인사이가 됐다.
영원할 것만 같던 두 사람의 사랑. 이별의 조짐은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천천히 다가왔다.

이경은 자신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수이가 불만이었다. 조금은 자신에게 기대길 바랐지만 수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모든 것을 감추며 스스로 해결해 나갈 뿐이었다. 이런 수이의 태도는 이경을 점점 힘들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경 앞에 나타난 은지. 매력적인 은지의 모습에 이경은 점차 마음이 흔들리게 되고 결국, 이경은 수이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처음에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수의 모습이 이경은 멋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속마음까지 들여다보는 건 불가능하다. 이경은 이수의 그런 모습에 서서히 지쳐갔을 것이다.
사랑은 표현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거 같다. 이수가 조금 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면, 힘들다고 이경에게 잠시 기대왔다면 둘의 사랑은 계속 됐을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것도 모른다. 그것이 사랑이든 아님 다른 무엇이든.
그래서일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은지에게 끌렸던 이경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이경은 이수를 사랑한다. 이수도 이경을 사랑한다. 그렇지만 이경은 이수에게 묻는다. 날 사랑해? 어쩌면 당연한 걸 묻는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랑이란 게 그런 거 아닐까.

책의 아쉬운 점은 분량이 매우 적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쌌다. 전체 페이지가 150장은 됐지만 그마저도 한쪽은 영어로 번역되어 있어 실상 내가 볼 수 있는 건 1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이었다.

영어 그 여름.JPG



쇼코의 미소에서도 보여줬지만 작가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 관계가 안고 있는 여러 사회문제에 대해 문학적으로 잘 표현한다. 이 작품 역시 두 사람의 사랑과 갈등을 숨김없이 잘 보여준 책이다. 그리고 이미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이 소설에 남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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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홍보하는 프로젝트에서 나왔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립니다.하루만 더 지나면 주말이군요 ^^!

항상 감사합니다. :)

Cheer Up!

  • from Clean STEEM activity supporter

오! 이런반전이!
축구부의 수이와 공을 맞는 이경이라는 이름으로
저도 모르게 누가 남학생이고 누가 여학생일지 상상하면서
다시 스크롤을 올려가면서까지 읽었는데...
갑자기 너무 부끄러워집니다 ㅠ ㅠ

작가는 그들의 사랑도 별반 다르지 않으며 모든 사랑은 소중하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기도 하고요. :)

내용을 읽고 나니 읽고 싶어지네요 왠지 지금 읽기 딱 인것 같아요

내용도 짧아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보면 좋은 책인 거 같아요. :)

저도 쇼코의 미소를 읽고 나서 최은영 작가가 좋아졌어요.
영어로 옮겨보고 싶은 문체인데... 역시나 선점됐군요. ㅠ.ㅠ

저도 쇼코의 미소 읽고 작가의 다른 책들도 보고 싶더라고요. 문체도 너무 좋고 감성도 너무 좋아서. :)

작가의 말을 보니까 번역이 된 건 이 책이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쇼코의 미소는 아마도 번역되지 않은 거 같아요. :)

그렇군요. 탐이 나긴 하는데.. 욕심을 부려도 될지..

번역 계약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진 모르지만 브리님은 충분히 욕심 내보셔도 될 거 같은데요. :)

일단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애정도 있으시니까요. ^-^

책소개가 참 좋다 라고 생각하다
위 girina님 글처럼 엥? 했습니다^^

다행이에요. 조금 재밌게 써보고 싶었거든요. :)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어렸을때 첫사랑을 생각하며 긁을 읽다가...마지막에 남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에 읭??????했답니다 ㅎㅎㅎㅎ

리뷰도 조금 재밌게 써보고 싶어서 반전 같이 한 번 써 봤는데 ㅎㅎㅎ 다행이네요. :)

아?
남성이 나오지 않는 소설도 있나요?
세상에나.. 우찌 이야기를 만드는지 넘 궁금해요 >_<

소설은 어떤 것이든 가능하죠. :) 모두의 사랑은 소중한 거니까요.

악! 속았다!!
축구부 이수가 남자인줄 알았는데 갑자기 이경이 은지를 만난다고 해서 그럼 이경이 남자였나?? 축구부에 여자라니 신기하네 하며 봤더니 남자는 없었다!!!!!
이런 식스센스 반전이!!!!ㅋㅋㅋㅋ

나름의 편견이랄까요. 한국에서 연애는 남녀사이에서 일어난다고 많이들 생각하니까요. 물론 저도 그렇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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