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여행] 세잔의 수욕도 앞에서

in #kr-art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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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내셔널 갤러리로 직행했다. 너무 많이 걸려 있었고, 너무 많이 봤고, 또 모든 감상을 다 적을 수도 없다. 그 넓은 곳에서 내가 본 단 하나의 그림만 말하고 싶다. 세잔의 <수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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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젤을 메고 밖을 나가다 쓰러져 죽기 전까지 10년 가까이 말년의 세잔이 그리고 그리고 또 고쳐그렸던 그림

얼핏 보면 정말 어설프고 못 그린 그림, 다른 세잔의 그림이 그렇듯 스쳐지나가기 정말 쉬운 그림

지나갔다가 한번 왠지 뒷걸음질치게 되며 자세히 오랜동안 보다가 결국은 빠져버리게 되는 그림

그러나 왜 저 그림에 빠지게 되었는지 스스로 그 원인의 출처를 몰라 그것을 찾으려고 화면 여기저기를 둘러보지만 결국 실패하고야 마는 그런 애매한 그림, 수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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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세잔을 좋아했지만 사실 도판으로 보는 수욕도는 별 느낌이 없었다. 직접 보니 이 그림은 정말 한달 내내 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사실 이 그림은 관객을 감각적으로 사로잡는 것도 아니고, 색채가 화려한 것도 아니며, 전통적으로 잘 그린 그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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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도대체 무엇이?



화가로서 기본적인 해부학조차 공부했는지 의심스러운 저 당황스러운 인체의 형상들, 그리다가 대충 어두운 색으로 묻혀 사라진 손가락들, 심하게 부자연스런 자세로 마치 나무막대기처럼 나란히 등 돌리고 있는 두 명의 뒷모습들, 갑자기 거인세상에 난쟁이라도 출현한 듯 보이는 오른쪽에 어이없이 작게 그려진 인체의 옆모습들, 10년동안 그렸다고 하기엔 저 군상들 중 하나도 제대로 그려진 게 없고 물감으로 대충 뭉개진 각각의 얼굴들..지적을 하려면 정말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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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모를 요소들이 날 여기 붙잡아두고 지속적으로 쳐다보게 만들며 이렇게 글을 쓰게 한다.

확실히 세잔은 저기서 사람을 그린 것이 아니다. 진부한 표현으로는 그저 자연의 일부로 인체를 사용했을 뿐이고, 세잔의 입을 빌리자면 그는 감각을 그린 것이다. 개별 형상들을 자세히 보았다. 파란색 외곽선으로 끊임없이 수정된 개별 형상(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은 그야말로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이 완벽했다. 비록 종아리에서 뜬금없이 발바닥이 나오고 있지만 그 모습조차 하나도 빈틈이 없고 견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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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느낌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해야될지 모르겠다. 빈틈없고 견고하며 마치 가드를 잔뜩 올린 권투선수 앞에서 어딜 공격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처럼 이상하리만큼 그림 앞에서 압도된다.

누군가 이 그림에서 인체비례의 어색함과 고전주의적인 관점으로 완성도의 부족함을 지적한다면 완벽히 잘못된 감상일 것이다. 인체는 사람의 재현이 목적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자연을 이상화시킨 사물에 불과하며, 오히려 세잔이 바라는 건축의 자재로 이용되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릴 듯 하다. 미술관을 올 때마다 이 불친절하고 어려운 화가에게 매번 사로잡히게 된다.




@thelump




화가의 여행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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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그림 진짜 이쁜거 같아요~
런던이라 저도 진짜 가고 싶어하는 곳 중에 한곳인데!!! 부러워요

자세히 보면 참 예쁘기도 합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가보시길요 ^^

영국 내셔널 갤러리는 무료 입장이라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로 좋은 그림이 많은데도 무료라니... 너무 신기했었습니다.

세잔의 그림은 뭉개진 선이 가장 큰 특징인 거 같아요.
그림을 잘 몰라서 감상도 깊이 할 수 없지만, '수욕도'도 그런 뭉개진 선 때문에 세잔다운 느낌을 물씬 주네요.

그림 참 좋네요.

대부분 영국소유라 하기 뭣한 것들이 많아서라는 얘기도 있어요..ㅎㅎ

앗! 그 말이 정답이겠네요^^

맞아요. 영국 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거대 박물관은 모두 침략과 침탈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견고함....
사물의 형태를 의심한 첫 현대회화의 거장
그 작품에 다시 발길돌리게 한
그 느낌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걸 제가 직접 본다해도 정말 나도 비슷한 것을 느낄수 있을지
그것도 자신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직접 보지 않고는 알수 없는 것들이 있죠..
문제는 직접 보아도 알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내셔널 갤러리를 가보고 싶네요
겸사겸사 파르테논 마블스도 다시 한번 보고요.

질문이 있어요
마지막에 사진 작게 넎는 마크다운 어떻게 하는 거죠? ^^

안녕하세요 raah님!
마지막에 사진 작게 넣는 것은 마크다운이 아니라 제가 직접 사진을 작게 편집하여 따로 넣은 거예요.
그러니까 노가다입니다 ㅋㅋㅋ^^;;;

오랜만에 놀러와서 댓글 달려다가 우연히 두분 말씀 보게 되어서...
앞으로 노가다 하지 마시고 이거 사용하시라고 링크하나 남겨드려요!
저도 알게 되서 사용해 보니 정말 편하더라고요 :D
@newiz님이 올려주신 [뉴비가이드] #2. 스팀잇 글쓰기, 사진 첨부의 모든 것!! (사이즈 조절 등)

오..꿀팁 감사합니다!!

뉴위즈님이 이런저런 좋은 꿀팁을 많이 알려주세요. 짱짱맨 큐레이터 활동도 하고 계시고요. 가끔 놀러가시면 좋은 정보 찾아내실 수 있을꺼에요 :)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잘모르겠지만.. @thelump님 설명들으며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며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가 너무 빠돌이의 언어로 주절주절 늘어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보는 사람까지 공감하기 힘든 글이긴 해요 제가 봐도요. 이렇게 포스팅거리로 생각하지 않았던, 아주 개인적인 메모였거든요 :)

덕분에 그림을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거 너무 좋아요!!!

이런거 앞으로도 좀 쌓여 있습니다. 조금씩 방출하겠습니다 ㅋ!!

꼭 같이 미술관 가서 설명 듣는 느낌이에요, 이런 글 너무 좋아요 ^^

편향적인 도슨트이긴 하지만.. ㅎㅎ 좋다니 저도 좋네요!

2주 동안 활동을 좀 뜸하게 하느라.. 너무 오랜만에 놀러와 보네요, 오쟁님 ^^ 그간 포스팅이 잔뜩 늘어난걸 보니 잘 지내고 계셨던거 같아요!

지금 런던에 계신것인지, 아님 지난 여행에서 보신것 올려주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수욕도 감상 잘 하고 갑니다. 세잔이 이 작품을 10년 동안 그리고 또 그렸다는 것은 알려주셔 처음 알았네요! 보면서 늘 딱딱한 나무둥걸 같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는데, 오쟁님의 해석을 보면서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보게 됩니다 ^^

그간 경황이 없으셨죠?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질 않길 바랍니다. 여행기는 예전에 갔던 것들을 올리고 있습니다 ^^

네네 감사합니다! 이제는 좀 저도 정신차리고 일상으로 되돌아 와야죠. 2주동안 소란을 피웠더니.. 좀 민망하기도 하고 ㅎㅎㅎㅎ 그랬습니다. 여행기 또 보러 올께요. 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스티밋 kr-인명사전의 @ranesuk 입니다. 항상 진솔하고 감동적인 포스팅을 해주시는 @theluemp 님을 사전에 등록하겠습니다. 혹시 문의가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화이팅
화이팅.png

와우~ 등록되었다니 기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림을 보면 "아무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의 반복인 저에게 너무나 풍부한 감성을 전해주고 계십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가 뭔가를 받아들이기에 가장 좋은 상태이기도 합니다 ㅎㅎ 아참 인명사전 추천 감사드려요 !!

엇 왼손이 한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려고 했는데..ㅋㅋ 감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 이런 감상평 너무 좋아요 !!! 덕분에 정말 많은걸 알아갑니다.
이리 말씀해 주시니 직접 보고싶네요.

에고 감사합니다. 세잔 호불호가 갈리지만.. 저는 이 그림 직접 보니까 참 좋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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