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여행] 미술관이 미술품을 압도할 때 : 덴버 미술관
우리가 미술관에 간다고 했을 때 보는 것은 작품만이 아니다. 우리는 작품을 보여주는 공간, 미술관의 공간 디자인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언제나 '감상'이란 그 공간에서 느끼는 총체적인 감각이다. 오픈 시간보다 덴버미술관에 일찍 도착했다. 잠시 멍하니 미술관을 바라봤다. 덴버 미술관의 외형은 요즘 현대건축이 그러하듯 변화무쌍하고 비정형적이며 여기저기 구조물을 갖다 붙여놓은듯 날렵하고 뾰족했다.
나는 잠시 건축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과연 좋은 건축이란 어떤 것일까? 나는 건축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눈 앞의 화려한 경관이 나빠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건축이 얄팍한 감각으로 내 눈을 현혹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유기적으로 잘 디자인 된 건물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만약 건축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면, 내가 그림에 대해 호불호가 확실한 것처럼 그렇게 취향이 확실해지겠지? 문득 건축의 세계가 궁금해졌다.
미술관은 정말 끝내줬다. 시카고, 보스턴 미술관에 비해 백배정도 좋았다. 전시된 소장품들도 내 취향인 것이 많았고 정말 좋은 그림들이 많았다. 하물며 미술관의 화려한 외관만큼이나 내부의 인테리어 역시 너무 마음에 들었다. 미술관 안의 구조는 네모보다는 차라리 세모로 된 유기적인 구조가 많았고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지루할 여지를 주지 않고 작품을 감상하게 만들었다.
미술관 속 어떤 공간들은 그 자체가 예술품이었고, 소장품들을 단숨에 들러리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인테리어와 맞물려 디스플레이 역시 수준급이었다. 사실 난 디스플레이에 둔감한 편인데도 이렇게까지 느낄 정도라면 이것은 정말 수준높은 건축가와 큐레이터의 콜라보레이션이 틀림없을 것이다.
보통 전시를 한 곳에서 2시간 이상 보면 다리가 풀리고 눈이 과부하되어 더이상 관람이 불가능한데, 덴버미술관은 오전10시 개관시간 때 들어가 오후5시 폐관할 때 나왔다. 솔직히 다 보지도 못했고 시간이 부족했을 정도.
미술관에 대해 칭찬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곳곳에서 정말 관객을 배려하고 어린이들에 대해 친근하며, 미술관 안에서 같이 놀 수 있는 워크샵이 정말 많았다. 중간중간 아주 편안한 의자도 많고 화보집도 많고 비단 전시뿐만 아니라 관객이 놀 거리 볼 거리가 추가적으로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미술관의 소장품을 운운하기 이전에 이렇게 관객을 배려하는 공간과 시설 그 자체만으로도 이 도시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다. 서울 그 어디 미술관이 이러하던가?
금상첨화로, 안에 전시되어 있던 그림들도 너무 마음에 드는 것이 많았다. 내가 몰랐던 20세기 초반 미국에 Victor Higgins같 은 몇몇 훌륭한 화가들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고, 특히 컨템포러리 작품 중에는 독일작가 David Schnell의 페인팅이 아주 강렬했다. 그림의 텍스쳐라든지 화면 공간의 운용방식이 너무 마음에 들어 텍스트 읽기에 도전했으나 역시나 이 지랄맞은 영어실력땜에 포기. 다른 미술관에서 봤으면 그냥 스쳐갔을 법한 나머지 그저그런 작품들도 워낙 훌륭한 공간과 디스플레이 덕에 모두 중간 이상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내가 해외에 가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마크 로스코!! 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게 웬 떡! 역시나 그의 그림은 대단했다. 194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그의 그림은 화면 속에서 강렬하게 공간들이 색에 의해 구축이 되고 있었고 50년대를 넘어가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그런 로스코의 대표작들이 출현한다. 색들은 각각의 고유한 영역을 무게있게 지키면서도 다른 색들과 끊임없이 수축,이완하고 있었다. 공간이 여기저기서 태어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덴버미술관도 여느 대형미술관답게 각국의 컬렉션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 인도, 동남아, 서아시아, 중동의 고대예술품 등등등..물론 각각의 고대예술품들에 대해 난 감동했지만 한편으론 이런 식으로 고대의 예술품들이 쉽게 소비되는 방식이 너무 안타까웠다. 고대의 예술품은 개인을 넘어 그 민족의 시대와 우주관까지 대변하고 있는 것들인데 이렇게 관람의 편의에 의해 포획되고 수집되어 새장에 갇힌 꼴이 못마땅스러웠다.
고대의 예술품은 커다란 대부분 어떤 장소나 건축의 일부였기 때문에 애초부터 갤러리 디스플레이 방식으로는 너무나 안어울리고 쌩뚱맞기 마련이다. 물론 이렇게라도 보질 않으면 내가 언제 그 많은 문명의 예술품을 일일히 찾아다니며 볼 건데? 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예술품은 내가 평생을 못 보고 죽는다 할지라도 이렇게 간단히 미술관에서 소비해버리는 것 보다는 나을 듯 싶었다. 괜시리 미안했다.
@thelump
화가의 여행 시리즈
여기도 가봐야겠네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
공간과 디스플레이가 작품을 더 살린다라는것에 공감이 가네요. 어릴땐 미술관 소형갤러리를 제집 드나들듯 다녔는데 요즘은 어찌된게 조금 움직이는것도 어렵네요. 덕분에 잘 둘러봤어요. 감사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한 번 나가면 계획이 없던 곳도 여기저기 둘러보고 왔는데,... 요즘에는 거의 안 나갑니다. ㅎㅎ
생김새부터가 특이한게 시선을 확 사로잡네요...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을 듯 합니다 ㅎㅎ
외관만 으리으리하고 내부는 별로인 곳이 많은데 여기는 내-외부 모두 훌륭했습니다.
전 미술관가면 전시만큼이나 공간에 대해 더 주의깊게 보는 편이에요. 공간 구성이랄지 창의 크기나 방향으로 인한 채광이 전시나 작품을 감상하는 경험에 주는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해요. 더구나, 빽빽한 거리 보다는 도심 안이라도 한 켠 떨어진 공간에 위치하는 미술관의 경우는 주변 혹은 자연과의 어울림이 좋으면공간 그 자체로 휴식을 느끼거든요. :)
맞아요 채광과 조명도 같은 공간이라도 완전히 다르게 느끼게 하죠. 저는 자연광으로 보는것이 가장 좋더라구요.
덕분에 호강합니다.
^^. 좋은 하루 보내세요!
저는 우연히 가게 된 아키타현립미술관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때 처음 건축에 대해 생각해보고, 건축도 하나의 예술이라는 걸 느끼게 됐어요. 여행 내내 그곳만 갔었는데 알고보니 안도 타다오가 지은 건물이더라고요. 덴버 미술관도 꼭 한번 들러보고 싶네요. 서양의 미술관은 가보질 못해 궁금합니다. 마크 로스코는 한국 전시를 가봤는데 너무 기대가 컸던 탓인지 오히려 아쉬움이 컸어요.(너무 시끄럽고 사람이 많기도 했구요) 나중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미술관이네요. 감사합니다.
검색해봤습니다. 참 다다오다운 건축이네요. 저도 급 가보고 싶어지네요!!
공간자체가 눈길이 가네요. 감상하며 봤어요. 조은 포스팅 감사해요
들어오는 햇살조차 작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건축 센스에 감탄했지요.
미술관의 공간적인 면이 더 시선을 끄네요~ 이렇게 다양한 매력을 가진 미술관은 더 즐겁게 작품을 관람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맞아요. 우리나라에서는 김환기 미술관과 아라리오 '공간' 이 엄청 멋지더라구요.
아직 안가본 곳인데 주말에 시간내서 한번 가봐야겠네요:)ㅎㅎ
스팀 가즈아!
우와, 미술관 중간중간에 있는 있는 휴식 공간 진짜 끝내주네요!
MOMA보다 더 좋은거 아닌가요 저정도면 +=+
FANCY해서 부담스러운게 아니라 그냥 거실 쇼파에서 편하게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처럼 아늑하고,특별하지 않은듯한
분위기가...
감동적이네요////////
뭐든 몸도 마음도 편해야 깊이 새겨볼 수 있는것 같아요.
배려가 마음에 드는 공간입니다.
이런 휴게실이 곳곳마다 있었어요. 모마는 안가봤지만.. 제가 가본 곳 중 최고였습니다. 하루종일 있어도 될 만큼의 편의시설 짱이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