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utopia #5] 강낭콩을 심었다.

in #photokorea6 years ago (edited)


@songvely Apr. 28. 2018.



요즘 우리 반 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강낭콩을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 반은 얼마 전 과학 시간에 각자 강낭콩 두 알씩을 심었다. 즐거움이 만연한 세상이다보니 아이들이 고작 강낭콩에 관심을 가져줄까 걱정을 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말 그대로 관 심 폭 발.


아침 시간, 쉬는 시간, 그리고 점심 시간.. 틈이 날 때마다 학생들은 창문 앞에 다닥 다닥 붙어서서 자신의 화분과 친구들의 화분을 요리 조리 살폈다. 바라보고 있다고 해서 떡잎이 불쑥 하고 얼굴을 내미는 것도 아닌데 바라보고 애태우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기다리다 못한 아이들은 혹시 내 강낭콩이 죽은 건 아닐까, 잘 살아있는지 확인한다는 이유로 흙을 슬쩍 파 보기도 했다. 어떤 학생들은 물을 많이 주면 더 빨리 자랄까 싶은지 아침에 준 물이 아직도 흙을 축축히 적시고 있는데도 점심도 먹기 전에 또 한 번 물을 뿌려댔다. 일주일 뒤, 그렇게 아이들의 애간장을 태우던 강낭콩들이 드디어 싹을 틔웠다.


화분들마다 성장의 속도에는 차이가 있었다. 어떤 화분은 강낭콩이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떡잎이 흙을 비집고 나왔고, 몇 몇 강낭콩들은 여전히 흙 속에 숨어 나올 줄을 몰랐다. 신기한 것은 그 부끄럼 많은 강낭콩의 주인들은 우리 반에서 강낭콩 키우기에 가장 열성적이던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무관심하다며 친구들로부터 핀잔을 받았던 아이의 강낭콩은 벌써 떡잎 사이로 연둣빛 본잎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무심한 흙을 바라보던 아이들이 나에게 와서 시무룩한 얼굴로 물었다.


“왜 제 것만 싹이 안 날까요?”


난 할 말이 없었다.
기다려야 한다는 말 외에는.


사실 그 말만으로는 설득이 되지 않아서 강아지도 자꾸 만지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둥 갖은 비유를 곁들인 뒤에야 아이들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화분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물도 흙이 마르지 않을만큼만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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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낭콩을 심은 지 보름쯤 된 어제, 우리 반의 모든 화분들은 초록빛을 가득 품었다. 싹이 트지 않던 호기심 많은 아이들의 화분에서도 길쭉한 줄기가 올라왔다. 아이들은 죽었던 그린이강냉이(강낭콩들 이름)가 살아났다며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보챈다고 해서, 애태운다고 해서 되는 일은 세상에 많지 않다. 심지어 강낭콩 한 알을 싹 틔우는 간단한 일 조차도 말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걷지 못하는 아이에게 빨리 뛰어보라고 아무리 등을 밀어도 그것은 아이에게 부담과 상처만 남길 뿐 뛸 수 있는 능력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설사 그렇게 해서 뛰게 된다고 해도, 아이는 아마 뛸 때마다 자신을 밀어댔던 손을, 부담감과 스트레스를 기억할 지도 모른다. 오히려 적당한 관심과 충분한 기다림이야말로 가장 큰 양분이고 거름이 되지 않을까.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였던 장 자크 루소는 교육을 ’사람을 키워주는 일’로 생각했다. 그의 자연주의 교육 철학이 잘 드러난 책, ‘에밀’에서 교사는 정원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꽃이나 나무를 키울 때 물을 주고, 가지를 쳐 주듯 알맞은 교육환경을 제공하지만 그 이상의 강제나 강요는 없다. 자신의 역할을 한 뒤에는 그저 지켜보고 기다릴 뿐이다. 나는 지나친 자연주의 교육관은 방임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다른 교육관과의 절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교육에 있어서 ‘기다림’이 최고의 미덕 중 하나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기다림은 아이들에게 편안함을 준다. 상대방이 자신을 믿고 있다는 신뢰감을 준다. 그래서 자신감이 생기고, 자존감이 높아지고, 해내야겠다는 의지가 생긴다. 실수하더라도 다시 시도할 시간과 여유가 있기 때문에 도전이 두렵지 않게 된다.


반대로 재촉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상대방을 조력자가 아닌 감시자나 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빨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내가 실망스럽고,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를 만나게 되면 타인과 나 스스로를 실망시키기 싫어 미리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싹이 트는 속도는 조금씩 달라도, 결국은 줄기가 돋고 잎을 펼치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래서 성격 급한 나는 조금 느린 아이들에게 조급한 마음이 들 때마다 그 아이들이 열매를 맺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오늘도 최선을 다해 기다리자고 다짐한다.


어떤 꽃이든 필 때가 되면,
피어난다고 믿으면,
결국은 피어나게 되니까.










kr-pen 일기 공모전에 보내는 글입니다. 처음부터 공모전을 생각하고 쓴 게 아니어서 일기같지가 않네요. 글도 너무 길고... ^^; 더 줄이고 싶지 않아서 참여에 의의를 두고 보냅니다.(공모전 베이스 깔기 전문ㅋㅋ) 흥미로운 일기들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는 이벤트가 진행중이니 모두들 참여해보세요. :D


쏭블리 Edu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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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학생들도 강낭콩을 심는군요. 교사님의 글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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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을 가르침에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 가장 큰 일이라 생각합니다. 각자의 속력에서 각자의 힘으로 자라날 수 있게 말이죠. 선생님의 기다림에 응원을 보냅니다. 아울러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다림은 아이들에게 자존감과 의지를 준다는 말!!^^ 아이에게 재촉해 본적도 있지만 다시 기다림으로 돌아가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저도 누가 등떠미는거 엄청 싫어했는데 말이죠ㅋㅋ
어릴때 강낭콩 심어놓고 애태우던 제 모습도 오버랩됩니다 히힛

예전에 긴 기다림 끝에 나팔꽃 꽃피는걸 본 기억이 나네요 ㅎㅎㅎ

👨 아이들보다 선생님이 강낭콩 성장에 더 신경이 쓰이시겠어요 ㅎㅎ
누구껀 성장이 더디고 누구껀 잎이 노랗게 변한다던지! 반 학생이 두배로 늘어난 간접 체험이 가능하실 듯 합니다.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길!
아이들도 강낭콩도 : )

저도 씨를 뿌려놓고 그게 궁금해서 흙을 뒤집어 보기도 했던 사람입니다.ㅋ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경험으로 씨를 뿌려놓고는 무관심해야 한다는 진리를 터득했지만요..ㅋ

식물이 결실을 맺을 때까지는 언제나 조바심을 내 듯이, 사람에게도 그런 조바심을 내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songvely 님의 말씀처럼 언젠가는 꽃을 피우고, 열매을 맺을텐데도 말이죠.
그 조바심은 제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마음인 것 같아요.

조바심 내지 않는 주말을 보내봐야겠어요.^^

기다림... 스팀잇의 꽃도 기다린 사람에게 그 화려한 꽃을 보여주겠지요^^
아이들이 잘 자랄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멋진 분이 되시길...

어른이 되어서도 재촉이 참 악영향을 많이 미치더군요 ㅎㅎ

'기다림'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강낭콩의 싹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내신 솜씨에 감탄했어요!

믿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기다림이란 또 인내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쉽지가 않아요ㅠㅠ 그렇지만 기다림 끝에 있을 기쁨을 기대하며 꾸준히 기다려야겠지요.

어쩌면 우리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어떤 자세로, 어떤 시각을 가지느냐가 무척 중요한 건가봐요.

초등학교때 애타게 기다리던 날이 생각나는군요. '사람을 키워주는 일'을 하시는 교육계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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