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네팔 대지진 출장기]8. 어짜리아家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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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shiho입니다. 오늘 쓰려는 이야기는 정말 많은 분들이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연재를 다 지우고 한 회만 남기라고 하면 저는 두말 않고 이번회를 선택하겠습니다. 이 연재를 쓰기 시작한 이유에 해당하는 회차입니다. 그런데 오늘 국회 일정도, 제 몸과 정신 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네요. 오늘 써야 하나 많이 망설였습니다만, 정성을 다해 꾸역꾸역 써 내려가겠습니다.

바데가웅 마을 입구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다. 한 성난 남성이 일행의 맨 앞 차량을 막아선 것이었다. 그는 3~4살 돼 보이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는 끊임없이 칭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마을 사람들과 본인을 돕기 위해 마을로 들어가려는 차량 행렬을 "부녀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먼지를 피워선 안 된다"며 막아선 남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도 그 먼길을 산길에 치여가며 달려왔는데 짜증이 났다. 남성이 가리킨 길가에서, 넓은 접시에 담긴 곡식 같은 걸 손으로 먹던 몇 명의 여성이 식사를 마친 듯 주섬주섬 그릇을 챙기고 일어났다. 남성은 그제서야 길가로 물러섰다.

그런데 나를 짜증나게 했던 이 남성을 다시 만났다. 마을 주민들이 모인 김에 문 선교사를 통해 사연을 취재하던 중 누군가에게서 '특별한' 사연을 듣고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안내해 준 곳에 있었다. 이 남성이 안고 있는 칭얼대던 아이가 바로 기적의 주인공이었다.

나는 이 남성, 크리스나 시그델과 그의 누나 러치미 어짜리아, 러치미의 남편 수다르선 어짜리아, 수다르선의 동생 라전 어짜리아, 마을 주민이자 친척인 파슈파티나트 어짜리아 등을 만나거나 이들 중 수다르선을 제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썼다. 기사엔 약간의 상상력도 동원됐지만 사실에 근거했으며, 진실에 가깝다고 믿는 것만 썼다. 재난 지역에서 '팩트체크'는 상대적으로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들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의지했지만 같은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물어, 교차되는 부분은 팩트로 믿었다. 현장에도 달려가 눈으로 직접 봤다. 지금부터 쓰는 이야기에서 꾸며낸 부분은 단 한 줄도 없다.

2015년 4월 25일 네팔 카트만두 서쪽 람중에 진앙을 둔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신두팔촉의 산골마을 바데가운에서 러치미 어짜리아는 늙은 시부모와 두 딸의 점심 식사를 돕기 위해 집 안팎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문가에 앉아있던 두살 된 작은딸의 입에 밥을 넣어준 뒤, 집 안에서 밥을 먹고 있는 시부모와 세살 된 큰딸 어니샤 어짜리야가 마실 물을 떴다. 집안에 들어가려는데 땅이 요동쳤다. 러치미는 문가에 있는 작은딸을 안아올리며 시부모에게 빨리 집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 순간 집이 무너졌고, 시부모와 어니샤는 매몰됐다.

러치미는 혼자 집 잔해를 파헤쳤는데 땅은 계속 꿈틀거리고 있었다. 러치미의 집은 마을 위쪽 언덕에 있었는데 주민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마을로 뛰어내려갔다. 러치미가 울부짖으며 뛰어다니자 바로 밑 집에 살던 친척 파슈파티나트 어짜리아와 몇 명의 남성이 도와주러 달려갔다. 마을 주민들은 러치미의 집에 젋은 남자가 없다는 걸 알았다. 자신들의 집도 무너졌지만, 그래서 러치미를 먼저 도와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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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가본 러치미의 집, 아니 집이 있던 자리(사진)는 폭격을 받은 것 같았다. 무너지다 남은 벽을 빼면 돌무덤 같았다. 파슈파티나트와 마을 남성들은 맨손으로 돌무더기를 파헤쳤다. 약 3시간 뒤, 돌무더기 속에서 흙을 뒤집어쓴 시신 두 구가 나왔다. 이들은 한몸처럼 부둥켜안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절망하는 찰나,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끌어안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품 안에서 어니샤는 살아남았다. 어니샤는 이마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목숨엔 지장이 없었다.

같은시각, 카트만두에서 전기기사로 일하고 있던 수다르선 어짜리아도 지진 속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는 이 일을 해서 한달에 1만루피(약 10만 5500원)를 벌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수다르선 뿐 아니라 신두팔촉의 많은
젊은 남성들이 그렇게 살았다. 산꼭대기 마을에서는 자급자족과 물물교환으로 생활이 가능했지만, 돈을 벌 수는 없었다. 수다르선도 다른 네팔의 젊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돈을 모아 카트만두에서 자식을 가르치고 싶어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신두팔촉의 가족이 걱정됐다. 곧 아내의 전화로 부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수다르선은 그날 바로 짐을 쌌다. 힌두교인들은 큰아들이 부모의 시신에 직접 불을 붙여야 부모가 편안하게 다음 생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도 시신이 발견된 지 만 하루가 되기 전에 화장을 해야 한다. 수다르선은 남은 가족들이 먹을 쌀과 천막으로 쓸 비닐 등을 챙겨서 출발했다.

수다르선의 '귀성길'은 전쟁과 흡사했다. 그와 같은 수많은 청년들이 고향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귀성길에 뛰어들었다. 수다르선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은 이날 우리가 온 길과 똑같았다. 카트만두에서 시파갓, 멜람치를 거쳐 산길을 오르는 100여 km의 여정이었다. 물론 그는 4륜구동 차량을 타고 온 우리보다 훨씬 힘들게 왔다. 버스를 타려는데 100루피면 살 수 있었던 승차권 값이 200루피로 올라 있었다. 그 돈이라도 내고 몇 시간을 버스에 매달려서라도 탈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그는 버스로 4시간을 달려 멜람치까지 갔고 그 뒤엔 남의 차를 얻어 타거나 걸어서 산길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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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데가운 마을은 해발 고도 1000m에서 1800m 사이에 걸쳐 있었다. 수다르선의 부모 시신은 집 뒤쪽 높은 곳에 있는 뜰에 있었다. 딸 어니샤는 사고 당시 충격에 깨물었는지 혀가 세로로 3분의 1쯤 잘라졌다. 산 밑 병원에 갈 수 없어서 동네 할머니가 마취도 안하고 아이의 혀를 꿰맸다. 외삼촌이 칭얼거리는 아이의 입을 열어 보여줬다. 까만 실로 아무렇게나 꿰매져 있었다. 아이는 정신적 충격으로 말을 잃었고 어른이 안아서 땅에서 떨어져 있지 않으면 자지러지게 울었다. 외삼촌 품에 안겨서도 울지 않을 뿐 항상 찡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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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을 지하수가 나오는 곳에서 수다르선(사진) 형제를 만났다. 흰 천을 머리와 하반신에 두르고 상의는 입지 않고 있었다. 상반신엔 대각선으로 끈을 두르고 있었는데 명주실 7가닥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런 복장은 네팔 카스트제도의 상위 계층을 나타내는 표시라고 선교사가 설명했다. 수다르선은 가난했지만 체트리라는 계층에 속해 있었다. 수다르선은 우리와 대화도 자제해야 했다. 그것도 체트리의 장례 풍습이라고 했다. 우리는 매제인 크리스나에게서 이야기를 주로 들었다.

수다르선 형제는 부모의 시신을 메고 다시 2~3시간을 걸어서 인드라와띠 강까지 내려갔다. 나는 문 선교사의 도움으로 체트리의 장례 풍습을 조금 찾아봤다. 체트리는 힌두교 장례 의식에 따라 머리를 정수리 쪽에 꽁지만 남긴 채 박박 민다. 머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미는 것은 제사장 계층만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13일 간의 장례 기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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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장례에 참여할 수 없다. 아들들은 자르거나 깁지 않은 흰 천만을 몸에 두를 수 있다. 아들들은 13일 간 매일 한번씩 강가에서 목욕재계를 한 뒤 노란 염료와 참깨, 볏단을 섞은 것을 바치며 제사를 지낸다. 이들 형제가 우리를 만난 때가 그날 제사 직후였다.

이들은 이 기간 하루에 한번만 식사를 할 수 있다. 소금, 기름, 계란, 고기, 생선은 먹을 수 없다. 우유에서 나온 '기우'라는 기름만 밥에 섞어 먹는다. 이건 며느리도 마찬가지다. 이날 크리스나가 우리 일행의 차를 가로막은 것도 누나 러치미의 하루 한 번 뿐인 식사이자 중요한 의식이 방해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들들은 13일 간 다리 네 개 달린 가구를 사용할 수 없고 방에 불도 켜지 못한다. 이 기간 살아있는 어떤 것과도 닿아선 안 된다. 수다르선이 나를 만났을 때 입을 가린 채 자꾸 뒤로 물러나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앞서 말한 적이 있듯 힌두교인들은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크리스나는 매형의 가족에게 생긴 일에 관해 "부모님이 어니샤를 구한 것도, 그들이 숨진 것도 모두 신의 뜻으로 받아들일 뿐"이라고 말했다.

신두팔촉 사람들은 마을을 세울 때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듯, 지진 피해 복구도 스스로 해야 했다. 우리가 방문하기 전날인 5월 1일 각국 구조대들은 주요 활동 거점을 카트만두 지역에서 신두팔촉으로 옮겼지만 하루 만에 "더 이상 구조 수요가 없다"며 다시 카트만두로 돌아갔다. 이들이 산비탈에 매달린 75개 마을과 그 속에 띄엄 띄엄 들어있는 부락들을 일일이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신두팔촉은 코앞에 다 부서진 흙집이 보여도 거기까지 갈 수 없는 경우도 있는 곳이다. 그래서 "구조 수요가 없다"는 말은 맞다. 더 이상 잔해 속에서 구조를 기다릴 만한 생존자가 있을리 만무한 때였다. 죽을 사람은 다 죽었고, 당장 꺼내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시신은 다 재가 돼 강에 떠내려 갔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썼다.

지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왔지만 감당해야 할 무게는 평등하지 않았다. 바데 가운을 비롯한 수백 개의 신두팔촉 산간 부락은 온전히 자신들의 손으로 사람을 구하고, 시신을 수습해 강가에서 떠나보냈다. 시그델은 “이 마을을 세울 때처럼 다시 일으키는 것도 어차피 우리 손으로 해야 한다”며 힘주어 말했다.
덜컹거리는 도로를 타고 마을을 나왔다. 카트만두로 향하는 큰길에 접어들었을 때 빗방울이 떨어졌다. 바데 가운이 자리잡은 산 위로 천둥번개가 떨어졌다. 시커먼 산에 점점이 박힌 불빛이 번개 빛에 눌려 깜빡거렸다. 4신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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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함께 이야기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Translate using Goole.Sorry if there is any mistake

I'm writing about Nepal earthquake.

Yes I thought. I am very sad

This comment has received a 0.71 % upvote from @booster thanks to: @steemshiro.

너무나 다른 환경속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살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떠나질 않습니다
얼마나 다른 생각을 하고 살아갈까요
그런 모습들을 또한 직접 보면 더욱 감회가 남다르겠죠
그런 접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만 보면 환경이 사람들의 생각을 그렇게 만든 것 같기도 해요. 네팔의 경우엔 고온다습한 기후라 시신을 빨리 화장하지 않으면 전염병 같은 게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24시간 안에 화장을 해야 내세에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종교적 생각이 나온 것 같아요.

너무 가슴아프네요... 할머니 할아버지가 부디 편안한 곳에서 쉬시길 바랍니다. 어짜리아 가가 행복하게 살기를..

행복하게 살거라고 믿어요.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들이니까.

삶이 어찌... 이렇게 잔혹한 것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종교적인 신념이죠. 다음 생에 좋은 곳에서 만날 테니 슬퍼하되 통곡하지 않는...

먹먹하네요.먹먹합니다.

이제 조금 희망적이고 비교적 밝은 이야기들만 남았어요. 편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안타깝네요.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관심을 기울여야겠습니다.

그러네요. 저도 돌아와서 사실 크게 관심을 쏟진 못했고, 당시 많이 도와주셨던 선교사들 통해서 단편적인 소식만 들어 왔습니다.

기회가된다면 저런곳의 봉사활동에 참여해보는것도 좋을것같네요

맞습니다. 가보면 마음이 많이 따뜻해질 거예요.

상황을 받아드리는 자세가
많이 다르네요...

다시 일을키는 것도 어짜피 우리 손으로 해야 한다...

이멘트가 기억에 남는 포스트 입니다!!
바쁘신데 내일을 위해 멋진 글을 남겨주셨으니 푹 쉬세요!

인용한 기사에서 시그델은 러치미의 동생인 크리스나 시그델입니다. 기사에선 성을 쓰거든요. 그 사람이 첨에 길 막아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기사에 쓰기 좋은 말을 많이 해주더라구요.

그렇군요.
이름이 참 기억하기 힘들게 어렵네요 ^^

보이지 않는 곳 아니 정확히는 보기 힘든곳이 더 처참하군요. 사실 더 처참하다는 말이 저 곳 저 장소에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이제서야 고인들의 명복을 빌어봅니다.

저 갔을 때만 해도 신두팔촉 사망자가 1300여명 정도라고 집계됐었는데 나중에 보니 전체 사망자의 40%가 여기서 발생했다고 하네요.

아 남에 일 같지가 않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필리핀에 거주하면서 2년전에 마닐라 대지진이 온다는 설이 많이 퍼져서 불안감에 쌓인 적도 있었거든요.. 재난이 정말 무섭다는 걸 알면서도 저 역시 안전불감증에 빠져 살고 있는 거 같네요. 생생한 기사 너무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는 아니지만 좋게 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 사람의 안전의식으로 재난의 파괴력은 막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네 맞는 말씀입니다. 거대 재앙 앞에는 너무 나약한 개인일 뿐인게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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