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네팔 대지진 출장기]7. 신두팔촉, 바데가운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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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shiho입니다. 네팔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을 남겼던 신두팔촉 두번째 방문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이번엔 입구 마을까지가 아니라 산골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산골 마을 '바데가운'에 간 이야기를 적어보겠습니다.*

2015년 5월 2일, 신두팔촉 깊숙한 곳에 있는 산골마을 바데가운으로 들어가는 길에 나는 이런 메모를 휴대전화에 남겼다.

시파갓에서 산을 하나 더 넘어 들어가는 길. 산을 돌아 가는 길은 유실. 넘어가는 길 택해. 구호물자 실은 트럭은 앞서가다 계속 멈춰. 설 때마다 열린 창으로 흙먼지가 뿜어져 들어와. 길을 비포장길이라는 말로 부족. 길 중간에 시냇물이 흐르기도. 군데군데 지진낙석 길 어지럽게

당시 기사를 찾아 확인해 보니 우리가 이동한 거리는 약 105km였다. 카트만두에서 시파갓 마을을 지나 그 유명한 랑탕 트래킹 코스의 관문 격인 멜람치까지 굽이굽이 산을 돌아 65km를 달렸다. 포장 반 비포장 반, 갈라지고 낙석이 놓여있기도 했던 길이었지만 그나마 그 길을 달릴 때가 행복했다는 걸 몇 시간 뒤 깨달았다.

덜컹이던 차가 멈춰 섰다. 선교사와 네팔인 SUV 기사가 네팔 말로 한참 이야기를 했다. 밖을 내다 보니, 우리가 가야할 길이 강이 돼 있었다. 지진으로 물길이 바뀐 것 같았다. 오면서 개울 수준의 물은 4륜구동 차로 그냥 건너갔었는데 이건, 건너가다 떠내려갈까 두려울 정도의 물이었다.

의지가 강한 선교사들은 지난번 시파갓에서처럼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산길로라도 꼭 산간 마을에 들어가자는 쪽으로 결정했다. 나 역시 찬성이었다. 당시 기자들은 '눈물겨운 사연'을 찾아내는 데에 혈안이었다. 참상에 대한 스트레이트 기사는 쓸만큼 썼고, 잔해에 깔렸던 사람들은 대부분 병원에 있었다. 일부 기자들은 통역을 대동하고 병원에 가서 슬픈 사연을 캐냈다. 이에 대해 각자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여기에 그다지 부정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한국 독자를 울리면 한국에서 도움의 손길이 한 건이라도 늘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피해가 크고 아직 구호의 손길이 잘 닿지 않은 신두팔촉에 들어가는 걸 포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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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은 정말 험난했다. 차량 앞을 막을 나무가 없다고 해서 '길'이라 부를 뿐이지 그냥 산을 기어올라가는 거나 다름없었다. 메모에 썼듯, 차는 자주 멈췄고 승객들은 내려서 일부 구간을 걸어 올라가거나, 차를 밀어야 했다. 창문이 열린 틈으로 흙먼지가 뿜어져 들어왔지만 창을 닫으면 정체된 공기가 너무 뜨거워 질식할 것 같았다. 흙먼지와 함께나마 바람을 맞는 편이 나았다. 확인해 보니 우리의 목적지였던 바데가운까지 산길로만 40km를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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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어느 정도 올라왔는지 귀가 먹먹해질 무렵, 피해를 입은 산간 마을들이 보였다. 거기에 살고 있는 것 자체가 묘기와 같았다. 절벽을 깎아 계단처럼 만들고 지은 집들은 차라리 산에 매달린 꼴이었는데, 가가호호 남김없이 박살이 나 있었다. 시파갓 마을만 해도 물러터진 것이나마 벽돌집이 많았는데 여긴 죄다 흙과 돌로 만든 집이었다. 집을 지을 만큼의 벽돌을 싣고 그 산골까지 올라갈 만한 장비와 재력이 그들에겐 없었다. 흙돌집은 벽돌집보다 지진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산에 매달린 마을이 부서진 광경을 멀리서 보면 장난꾸러기 아이가 흙장난을 하며 마구 파헤져 놓은 것 같았다. 저 돌무더기들 속에 누군가는 죽어 누워있을 터였다. 우리는 그런 마을로 들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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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팀은 지나가다 만나는 마을 몇 곳에 들러 구호물자를 풀었고 드디어 바데가운에 도착했다. 외국인들이 탄 차들이 마을 공터에 서자, 힘을 쓸 수 있는 주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대부분 카트만두 등 산 밑 도시에서 일하며 한달에 30만원을 벌어 산 위의 가족들을 먹여살리던 가장들이었다. 지진에 자신의 목숨을 건지자마자, 살아남은 가족들을 건사하러, 죽은 부모를 화장하러 험한 길을 헤치고 달려온 아들, 남편, 아버지였다.

사람들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하나같이 사슴 같은 눈망울이었다. 아이들은 외국인이 신기했다. 경계를 풀지 않으면서도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어떤 아이가 물 좀 줄 수 있느냐고 물어 왔다. 나는 가방 속에 있던 생수를 다 줘 버렸다. 차 안에 또 남은 게 있었다. 아이들은 받은 물을 저들끼리 한모금씩 돌려 마셨다. 반쯤 남은 물통도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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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제까지 보통 사람의 감수성으로 거기에 있을 수는 없었다. 기자는 일을 해야 했다. 문 선교사를 통해 모인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 "이 중에 가족을 잃은 사람이 있느냐"는 잔인한 질문을 먼저 해야 했다. 문 선교사의 뒤에 비겁하게 숨은 느낌이었다. 신두팔촉 사람들은 기자에게 말을 하면 반드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하지만 조금 더 들어보면 기사에 쓰기엔 너무 짧고 비슷한 이야기들이었다.

집이 무너져 돌무더기가 돼 버리고 쌓아 뒀던 곡식, 과일 들은 돌덩이들 밑에 흩어졌다. 그걸 꺼내 먹을 수 있었던 건 돌틈 사이로 손을 넣을 수 있는 원숭이들이었다. 산에서 식량을 원숭이들에게 빼앗긴 사람들은 산 밑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모든 걸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들처럼 신념이 강하지 않은 국제 구조팀들에게 산골 깊숙이 들어오는 길은 너무나 험난했다.

산 밑으로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다쳤는데 병원엘 못 가서 죽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시신은 산골마을에서도 높은 곳에 있는 땅에 모아뒀다. 장남이 직접 시신에 불을 당겨야 죽은 부모가 내세에 좋은 곳에서 태어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시신이 발견돼도 큰아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산에서 그나마 집을 지울 수 있는 곳을 찾아 지어야 했기 때문에 마을이라곤 해도 각 가구들은 툭툭 떨어져 있었다.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가려면 언덕을 넘고 덤불을 헤쳐야 할 때도 있었다. 어떤 집은 홀로 뚝 떨어져 있는데 지진으로 길이 다 막혀서 그 집 사람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조차 없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신두팔촉의 피해상황 보고는 늘 부정확했다. 어떤 숫자를 쓰든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있었다.

마을에 수돗가처럼 물이 나오는 곳이 있다고 해서 문 선교사의 오프로드 바이크 뒤에 타고 그리로 갔다. 땀과 흙먼지에 범벅이 된 얼굴과 목을 좀 씻고 싶었다.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는데 누가 등을 톡톡 두드렸다. 열 댓살 쯤 돼 보이는 여자 아이가 흰 이를 보이며 뭘 삐쭉 내밀었다. 비닐인지 종이인지 뭔가로 꼬깃꼬깃 소중하게 싸여 있는 걸 열어봤더니 엄지 손톱만한 조각 비누가 나왔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곤 급히 돌아섰다.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얼굴을 계속 씻었다.

그리고 공터로 돌아가서 한 남성을 만났다. 문 선교사는 그의 말을 "이 사람 누나의 늙은 부모가 집이 무너질 때 어린 손녀를 감싸안아 살려내고 죽었다고 한다"고 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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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거기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참담함과 미안함, 그리고 신에 대한 원망...모든 감정들이 순간순간 고개를 쳐밀고 나와 마음이 몸보다 더 힘드셨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치네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누가 툭 건드리면 울음이 터질 만한 상태가 됐던 것 같아요. 비누가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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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 You - @blueorgy

참상이지만 알려야 도움의 손길이라도 받을 수 있겠지요.

그걸로 불편한 마음의 위안을 삼았죠

선무님 고맙습니다

좋은 일 하고 오셨네요!! 감사합니다 ^^ 저도 이렇게 선행을 베풀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저야 뭐 밥벌이 한 거죠. 팔로우했습니다. 뉴비님!

시호님 글을 읽으면 장면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져요. 이번 편도 가슴이 저릿저릿하네요 ㅠㅠ

나중에 한 번 그려주세요.. 오늘은 가장 극적인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국회가 조용했으면 좋겠어요.

참담하네요.
거기서 기사를 써야하니
그 소재를 찾아야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비누조각도... ㅠㅠ

모든걸 다 잃은 아이가 자기 것이라고 남아있는 게 뭐가 있었을까요.. 다음회엔 저 마지막 사연의 주인공을 쓰려고 합니다.

아... 글쓰며 회상을 하시는 것도 또다른 느낌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글이라는게 참 많은 힘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요즘 스티밋하면서 느끼고 있습니다.

예전 취재 자료를 찾아보면 잊었던 기억이 살아나네요. 아무래도 기억에 많이 의존하다 보니 혹시 틀리게 쓴 게 있을까 조심스럽기도 해요.

저런 힘든 상황일 줄은 몰랐네요.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드셨겠어요.

다음날 온 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는데 다시 일어나 일을 해야 했다는..

아... 그냥 살아간다는 것도 정말 쉬운 일이 아닌거군요..

네.. 저기에 어떻게 지었을까 싶은 집들이 산에 다닥다닥 매달려 있었어요.

시호님 반갑습니다. 값진 경험 나눠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자주 소통하고 싶네요^^

저도 반갑습니다. 다재다능하신 창균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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