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rwerq, photo] 비의 촉감

in #kr6 years ago (edited)

Seoul. , Apr. 2018, Nexus 5x


나는 비오는 날의 습기찬 느낌을 좋아한다. 대기에 스며든 물의 촉감에 흡사 폐가 아니라 아가미로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빗방울이 찬찬히 내 숨에 닿으면 나는 천천히 깊게 들이마시게 된다. 내가 태어나서 물고기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물고기가 숨을 쉰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면 좀 더 부유하듯 자연스레 걷게 된다. 바람과 물의 흐름이 느껴진다. 세상은 고요하고 말소리는 잦아든다. 걸음과 걸음 사이에 무수한 호흡들이 채워진다. 호흡은 살아있다는 표시이자 세계가 생의 꿈틀거림으로 채워져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의 호흡은, 호흡의 방식은 중요한 것이다.

각 계절마다 비의 감촉이 있다면, 이 때쯤 내리는 비는 상당히 수줍고 따스하다. 정신이 번쩍들만큼 세차게 세계를 때리는 여름의 비도, 투박한 차가움에 잎을 떠미는 가을의 비와 다르게, 봄에 내리는 비는 땅에 붙박혀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토닥토닥 나린다고 할 정도로 부드럽게 닿는다. 봄비만큼 희망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비가 있을까?


Seoul. , Apr. 2018, Nexus 5x


수줍은 연둣빛 잎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 시기가 왔다. 사실 이제 4월은 얼마 남지 않았고, 5월이 다가온다. 나는 5월을 참 좋아한다. 4월과 같은 꽃의 화려함도, 한여름과 같은 짙은 푸른색의 힘센 건강함도 아니지만, 세상의 연약한 존재들이 기지개를 펴는 느낌이 든다. 땅에서 솟아나온 조막손들이 손짓을 한다. 비의 호흡이 닿을 때, 생경한듯 파르르 떨기도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는다. 우리가 존재와 존재가 가까워진다는 느낌을 가질 때, '닿는다' 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생각해보라. 촉감은 사실 근원적인 것이다. 시각과 청각은 우리에게 '적절한' 거리를 요구하지만, 촉각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각자 세계의 경계를 넘어서, 일순간 닿고 싶을 때, 닿게 될 때, 닿을 수 밖에 없을 때에, 촉감은 비로소 깨어나는 것이다.

오늘은, 비의 촉감이 참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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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가는 비 살짝 맞으며 산행을 했는데, 무척 상쾌 했습니다.

저도 종종 그러한 것을 좋아합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지니고 있는 것에서 좀 더 자유로워져야하더군요. 스마트폰, 시계 이런 것들에서 자유로워지면, 온전히 비를 맞는 것도 즐거운 기분인 것 같습니다.

저도 언제 한번 산행을 다녀와야겠습니다. 아마 덕유산 정도를 다녀오지 않을까 해요.

저도 가고싶습니다..ㅎㅎ

두 번째 사진의 초록이 맘을 시원하게 하네요.
요즘 시 쓰시는 일이 뜸해진 것 같아요. 쓰시는 글이 시 같긴 하지만, 진짜 시도 읽고 싶어지는 걸요.

두번째 사진의 초록과 수줍은 연두빛이 참 마음에 들어서 담게 된 사진입니다. 연둣빛 손들이 인사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제가 시를 적을 때에는 주기를 좀 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시를 적을 때엔 생산한다기 보다는 토로하거나
토해내는 느낌이 들곤 해서, 설익은 감정들의 문장들만 떠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조금 쉬고 있는 주기이기는 한데, 아마 다시 차오르면, 다시 조금씩 적게 될 것 같습니다.

기억해주시고 기다려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제가 시와 비슷한 끄적거림과 끼적거름 사이의 단어의 집합을 적어내려갔던 일이, 결국 닿을 수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은 뭉클해집니다.

이 댓글을 읽고 저도 좀 뭉클해졌어요. 저는 시와 거리가 먼 사람이어서, 심지어는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어서, 시에 좀 더 눈길이 가곤 하는 것 같아요. qrwerq님 시를 다시 읽어 본 적도 있답니다ㅎㅎ

각 계절 비의 감촉을 표현해주셨는데,
겨울은 '눈'이 자리매김하고 있어서인가요?ㅎ
겨울비에 대한 감촉은 어떻게 표현하실지 궁금하네요.^^;

비에 대해서 적을 때, 겨울은 사실 잘 떠오르지가 않았어서, 지금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확실히 눈에 대한
이미지가 강렬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기온이 낮아서일까요, 차갑고 묵직하고 단단한 느낌입니다. 땅이 묵묵히 견디어내는 시간이 떠오릅니다.

읽다가 그냥 읽으면 안될 것 같아 음악 틀고 읽었어요. 이 글을 읽으니, 어둑해지는 이 시간의 비도 그리 우울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지금의 계절이 그리 길지 않을테니, 소중하게 시간을 곱씹고싶어지네요. :)

어떤 음악을 들으시면서 글을 읽으셨을지 궁금해지네요. 저는 따스한 어둠을 떠올립니다. 어둠은 모든 것을 감싸안아주기도 하지요. 숨는다는 것은 어쩌면 보호받는다는 것. 언제나 소중한 나날들입니다. :)

우연히 튼 음악이었는데, 나름 봄과 어울렸던 것 같기도 하고요 :)

상당히 마음에 드는데요! 제 느낌에는 봄비의 무심한듯 간지러움이랄까ㅎ

'닿는다'는 측면에서 촉각만이 유일한 감각이고, 나머지 다른 감각도 '닿는다' 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촉각이라는 얘기도 있긴하죠..

폐가 아니라 아가미로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빗방울이 찬찬히 내 숨에 닿으면 나는 천천히 깊게 들이마시게 된다. 내가 태어나서 물고기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물고기가 숨을 쉰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면 좀 더 부유하듯 자연스레 걷게 된다.

이부분의 표현이 멋지네요 :)

이러한 해석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모든 감각의 촉각적인 측면을 느끼는 것. 사실은 우리가 쓰고 있는 표현의 상당수가 이러한 촉각과 관련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부에) 닿는 감각들을 비유해서 쓰는 여러 감정 표현들이 떠오릅니다.

비오는 날은 언제나 숨쉬기가 편해서 마음에 듭니다. (이건 이제는 미세먼지 때문에 더 그렇게 느끼는 걸까요- ㅎ )

이루마의 kiss in the rain 의 가사를 보는듯한 기분입니다. 좋은 글 혹은 시, 잘봤어요~

저도 그곡 참 좋아합니다. 그 곡을 듣고 있으면 대학 시절, 비오는 여름날, 비가 창문을 똑똑 두드리던 나날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오늘 출장 덕에 비 속을 운전하고 비를 맞고 좀 다녔더니 봄비에 대한 감상보다는 당장의 꿉꿉함에 짜증이 묻어있었습니다. 이 글을 보며 그 짜증이 수그러드는 기분이네요. 더불어 TV에서 소지섭씨가 비 속을 걷고 그 소리를 담고 비가 내린 풍경을 찍는 장면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저의 짜증을 누그러트리게 하는 뭔가를 느꼈는데요. 오늘 이래 저래 해서 기분이 좋아진 저녁이 되버렸습니다. 비는 좋지도 바쁘지도 않는데 이 비를 느끼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좋은 비도 되고 나쁜 비도 되나 봅니다.

비가 타닥타닥 하고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는 마음이 좀 편안해지더군요. 세계를 노크하는 소리 같달까요.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챙겨야할 것이 많으면 나쁜 비가 되는 것 같고, 비를 맞아도 될만큼 스스로를 놓아두면 좋은 비가 되는 것 같습니다.

늘 "닿는다"는 표현을 자주 쓰셔서 참 인상적이었어요.

비의 촉감, 느낌 참 좋습니다 ^^

맞습니다. 제가 '닿는다'는 표현을 참 좋아합니다. 드넓은 세계에서, 누군가와 마주한다는 것이 사실 쉬운일은 아니니까요. 닿는다는 것은 존재를 확인하고 느끼고 반응하는 의미들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을, 흐린날 보다 비가 오려는 날을 좋아하다보니, 비에 대해서도 이렇게 닿았나 봅니다. :)

계절에 따라 비의 촉감이 정말 달라지네요. 봄비는 좀더 '서늘한 따뜻함' 을 품고 있는 느낌입니다 :)

상상해보았는데,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얼핏 모순적으로 보이지만 말이에요. 좋은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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