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 기계와 지능 by 앨런 튜링 (번역 연재 11회)

in #kr7 years ago (edited)

안녕하세요. 아직도 뉴비 @armdown 철학자입니다.

이번 포스팅은 '계산 기계와 지능 by 앨런 튜링' 연재의 11회입니다. 논문 전체의 반을 훨씬 넘었습니다. 호응이 적더라도 그냥 갑니다!

이번 6절은 아주 깁니다. 6절에는 총 9개의 예상 반박과 그에 대한 튜링의 재반론이 전개됩니다. 논문 전체 분량의 2/5정도나 됩니다. 다 읽고 나면, 이후 논의된 내용들 모두가 튜링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6절은 5번에 나누어 포스팅하겠습니다. 6절의 네 번째 포스팅입니다.

1회 2회 3회 4회 5회 6회 7회 8회 9회 10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인데, 인공지능의 논리적, 수학적 개념이 처음 제시된 것은 앨런 튜링의 1950년 논문 “계산 기계와 지능”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논문은 아직 한국어로 된 쓸 만한 번역이 없습니다. 제가 번역을 시작한 배경에 대해서는 연재의 첫 포스팅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분량이 길지는 않지만, 한꺼번에 올리는 것은 번역자나 독자나 모두 부담되는 일일 것 같아서, 나누어 순차적으로 포스팅합니다. 원문이 28쪽 정도 되는데, 한 번에 두세 쪽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다른 주제들을 포스팅하는 것과는 별도로 진행되는 작업입니다.

처음에는 쪼개서 올리지만, 연재가 끝나고 나면 주석을 붙여 하나의 포스팅에 정리할 생각입니다. 연재 중에 오류, 제안, 의견, 질문 등을 댓글로 자유롭게 달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리스팀, 보팅, 팔로는 저에게 힘이 됩니다.)


계산 기계와 지능 (번역 연재 11회)

앨런 튜링

6. 주요 물음에 대한 반대 견해들 (4/5)



(6)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의 반박. 찰스 배비지의 해석기관에 대한 가장 상세한 정보는 러브레이스 백작부인Lady Lovelace의 회고록에서 나온다. 거기에서 그녀는 이렇게 진술한다. “해석기관은 어떤 것을 창안해내려는originate 야망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명령해야 그것이 실행되는지를 알고 있는 모든 것whatever we know how to order it to perform을 할 수 있다.”(원문 강조) 하트리Hartree(p. 70)는 이 진술을 인용하며 이렇게 덧붙인다. “이 말은 ‘스스로 생각할think for itself’ 전기 장비 또는 생물학적 용어로 말하면 ‘학습’의 기초 역할을 하게 될 조건반사를 설정해 놓을 수 있는 전기 장비를 건설하는 게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걸 함축하지 않는다. 최근의 몇몇 발전이 시사하고 있듯이, 원리상 이것이 가능한지 아닌지는 자극적이고 흥분되는 물음이다. 하지만 당시에 건설되거나 기획된 기계가 이런 성질을 갖고 있던 것 같지는 않다.”

이 점에 대해 나는 하트리에게 전적으로 동의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하트리는 해당 기계가 그런 성질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단언하는 건 아니며, 그보다는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이 이용할 수 있던 증거로는 그녀가 해당 기계가 그런 성질을 갖고 있다고 믿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단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당 기계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성질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이산 기계는 그런 성질을 갖고 있다고 추정해 볼 수 있으니 말이다. 해석기관은 보편적 디지털 컴퓨터였다. 그래서 만일 저장 용량과 속도가 적합했다면, 적절히 프로그램함으로써 해당 기계를 모방하도록 만들어질 수 있었으리라. 아마도 이런 논증은 백작부인이나 배비지에게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건 그들에게 주장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장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이 모든 물음은 학습하는 기계라는 제목 아래서 다시 고려될 것이다.

러브레이스 백작부인의 반박의 변종은 기계는 ‘결코 진짜로 새로운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잠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속담으로 받아넘길 수 있으리라. 자기가 만든 ‘독창적인 작품original work’이 교육을 통해 자기에게 심어진 씨앗이 성장한 것만은 아니라고, 또는 잘 알려진 일반 원리를 따른 결과만은 아니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으랴? 그 반박의 더 나은 변종은 기계는 ‘결코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진술은 보다 직접적인 도전이며 즉각 상대할 수 있다. 기계는 아주 자주 날 놀라게 한다. 이렇게 되는 주된 이유는, 내가 기계가 무엇을 할지 예상하기 위한 계산을 충분히 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내가 계산을 하더라도 대충 서둘러서 잘 되든 안 되든 계산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혼잣말을 할 수도 있겠다. ‘여기 전압이 저기 전압과 같을 것이 분명해. 아무튼 그렇다고 해 보자.’ 당연히 나는 종종 틀린다. 실험이 행해질 때쯤엔 이 가정도 잊어버렸기 때문에 결과는 나에게 놀랍다. 이렇게 인정하고 나면 내 불완전한 방식을 주제로 잔소리가 이어지겠지만, 내가 경험한 놀라움을 증언할 때 내 증언의 신뢰성에 의심을 던지지는 않기 바란다.

이 답변이 비평가들을 침묵시킬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비평가는 그 놀라움은 내 쪽에서의 어떤 창조적인 정신 작용 때문에 생겨난 거라고 말하면서, 기계의 공은 전혀 반영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다시 의식에 바탕을 둔 논증으로 도로 데려가며, 놀라움이라는 논점과는 거리가 멀다. 이건 우리가 이미 종결되었다고 여겨야 하는 논증의 선상에 있다. 하지만 놀라운 사건을 일으킨 것이 인간이건, 책이건, 기계건, 다른 무엇이건 간에 어떤 것을 놀랍다고 평가하는 것이 상당량의 ‘창조적인 정신 작용’을 요구한다는 점은 아마도 지적해 둘 가치가 있다.

나는 기계가 놀라움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는 견해는 특히 철학자들과 수학자들이 휘둘리기 쉬운 오류 때문에 생겨난다고 믿는다. 이것은 어떤 사실이 마음에 제시되자마자 그 사실의 모든 귀결이 즉시 마음에 솟아난다는 추정이다. 그건 많은 상황에서 아주 유용한 추정이지만, 그게 틀렸다는 걸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잊는다. 이러다 보면 자연히, 자료나 일반 원리에서 도출된 귀결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은 아무 장점이 없다고 추정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

(7) 신경계의 연속성에 바탕을 둔 논증. 신경계는 분명히 이산 상태 기계가 아니다. 뉴런 하나에 가해지는 신경 자극의 크기에 대한 정보의 작은 오류라도 출력 자극의 크기에 큰 차이를 일으킬 수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산 상태 기계로 신경계의 행동을 모방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다고 논증될 수 있으리라.

이산 상태 기계가 분명히 연속 기계와 다르다는 건 맞다. 하지만 우리가 흉내 게임의 조건을 고수한다면, 심문자는 이 차이에서 어떤 이점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다른 더 단순한 연속 기계를 고려한다면, 상황은 더 분명해질 수 있다. 미분 해석기differential analyser라면 아주 좋겠다. (미분 해석기는 어떤 종류의 계산을 위해 사용되는 이산 상태 유형의 기계 종류가 아니다.) 이 중 몇몇은 타자 형식으로 답을 내놓으며, 따라서 게임에 참가하기에 적절하다. 미분 해석기가 문제에 대해 어떤 답을 낼지 디지털 컴퓨터가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지만, 올바른 종류의 답을 내는 것은 잘 해낼 수 있으리라. 가령 π 값(실제로 약 3.1416)을 내라고 한다면, (말하자면) 0.05, 0.15, 0.55, 0.19, 0.06의 확률로 3.13, 3.13, 3.14, 3.15, 3.16이라는 값 중에서 무작위로 고르는 건 합리적이리라. 이런 상황에서, 심문자가 미분 분석기와 디지털 컴퓨터를 구별하기는 아주 어려우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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