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 기계와 지능 by 앨런 튜링 (번역 연재 8회)

in #kr6 years ago (edited)

안녕하세요. 아직도 뉴비 @armdown 철학자입니다.

이번 포스팅은 '계산 기계와 지능 by 앨런 튜링' 연재의 8회입니다. 논문 전체의 2/5 약간 넘게 번역했는데, 분량이 200자 원고지 78매네요. 호응이 적더라도 그냥 갑니다! (가즈아!)

이번 6절은 아주 깁니다. 6절에는 총 9개의 예상 반박과 그에 대한 튜링의 재반론이 전개됩니다. 논문 전체 분량의 2/5정도나 됩니다. 다 읽고 나면, 이후 논의된 내용들 모두가 튜링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6절은 5번에 나누어 포스팅하겠습니다.

1회 2회 3회 4회 5회 6회 7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인데, 인공지능의 논리적, 수학적 개념이 처음 제시된 것은 앨런 튜링의 1950년 논문 “계산 기계와 지능”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논문은 아직 한국어로 된 쓸 만한 번역이 없습니다. 제가 번역을 시작한 배경에 대해서는 연재의 첫 포스팅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분량이 길지는 않지만, 한꺼번에 올리는 것은 번역자나 독자나 모두 부담되는 일일 것 같아서, 나누어 순차적으로 포스팅합니다. 원문이 28쪽 정도 되는데, 한 번에 두세 쪽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다른 주제들을 포스팅하는 것과는 별도로 진행되는 작업입니다.

처음에는 쪼개서 올리지만, 연재가 끝나고 나면 주석을 붙여 하나의 포스팅에 정리할 생각입니다. 연재 중에 오류, 제안, 의견, 질문 등을 댓글로 자유롭게 달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리스팀, 보팅, 팔로는 저에게 힘이 됩니다.)


계산 기계와 지능 (번역 연재 8회)

앨런 튜링

6. 주요 물음에 대한 반대 견해들 (1/5)

이제 우리는 정지작업이 끝났다고 볼 수 있고, 우리의 물음인 ‘기계가 생각할 수 있을까?’ 및 앞 절 끝에서 인용된 그 물음의 변종에 대한 토론에 착수할 준비가 되었다. 우리는 문제의 원래 형식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체의 적합성과 관련해서 의견이 서로 다를 테고, 적어도 우리는 이 연결에 대해 이야기되어야만 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해당 사안에 대한 내 믿음을 설명한다면, 독자에게 사안이 단순해질 것이다. 먼저 물의의 더 정교한 형식을 고려해 보자. 대략 50년이 지나면, 평균적인 심문자가 5분간 질의응답하고 나서 바르게 식별할 기회가 70%를 넘지 않을 정도로 컴퓨터가 흉내 게임을 잘하도록 10⁹의 용량을 갖춘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원래 물음인 ‘기계가 생각할 수 있을까?’는 너무 무의미해서 논의할 가치도 없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금세기 말에는 낱말의 용법과 일반 교양인의 의견이 아주 많이 바뀔 것이고, 기계가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모순될 거라는 우려 없이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아가 이 믿음들을 감추는 것은 유용한 목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과학자들은 증명되지 않은 추측에 전혀 영향 받지 않으면서 잘 입증된 사실에서 잘 입증된 사실로 거침없이 나아간다는 대중의 견해는 큰 오해이다. 어떤 것이 증명된 사실이고 어떤 것이 추측인지 분명해진다면, 그 어떤 해로움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추측은 유용한 연구 노선을 제안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이제 내 자신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들을 고려해 볼 차례이다.

(1) 신학적 반박. 생각은 인간의 불멸하는 영혼의 기능이다. 신은 모든 남녀에게 불멸의 영혼을 주었지만, 다른 동물이나 기계에게는 주지 않았다. 따라서 그 어떤 동물이나 기계도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이 주장argument의 어떤 부분도 받아들일 수 없지만, 신학적 용어로 답해 보려 한다. 나는 동물이 인간과 같이 분류되었다면 이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었으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는 전형적인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가 인간과 다른 동물의 차이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만일 정통파 견해가 다른 종교 공동체의 성원에게 어떻게 비칠지 고려해 보면, 그런 견해의 자의적 성격은 더 분명해진다. 여자가 영혼이 없다는 무슬림의 견해를 기독교인은 어떻게 여길 텐가? 하지만 이 점은 논외로 하고 주된 주장으로 돌아가자. 내가 보기에, 위에서 인용한 주장은 전능한 신the Almighty의 전능성omnipotence에 대한 심각한 제약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를 둘과 같게 만드는 일처럼 전능한 신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건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보시기에 적절하다면 전능한 신이 코끼리에게 영혼을 수여할 자유가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될까? 전능한 신은 코끼리에게 적절히 개선된 뇌를 부여해서 이 영혼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돌연변이와 엮어서 이 권능을 행사하리라고 예상해 볼 수 있으리라. 기계의 경우에도 정확히 유사한 형식의 주장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 주장은 “받아넘기기swallow”가 더 어렵기 때문에 달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능한 신이 영혼을 수여하기에 적합한 정황circumstances을 고려한다는 게 별로 그럴듯하지 않다고 우리가 생각고 있음을 뜻할 뿐이다. 해당 정황은 이 논문의 나머지에서 논의될 것이다. 그런 기계를 건설하려고 시도한다고 해서 우리가 영혼을 창조하는 전능한 신의 권능을 불손하게 찬탈하는 게 아니다. 그건 우리가 자식을 낳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전능한 신이 창조하는 영혼을 위한 저택을 제공하는 전능한 신의 의지의 도구이다.

(튜링의 주석: 아마도 이 견해는 이단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Bertrand Russell의 책 480쪽에서 인용에 따라,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에서) 진술하기를, 신은 인간이 영혼을 갖지 못하게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신의 권능에 대한 진정한 제약은 아니고, 인간의 영혼이 불멸이라는, 따라서 파괴 불가능하다는 사실의 결과일 뿐이리라. [역주: 원본에 어느 대목을 지칭하는지 표시되어 있지 않음.])

그렇지만 이것은 사변에 불과하다. 신학적 주장이 어떤 것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될는지 몰라도 나는 신학적 주장에 별 감흥이 없다. 종종 그런 주장은 과거에 불만족스럽다고 밝혀졌다. 갈릴레오 시절에 “태양이 머물고 ...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여호수아, 10장 13절)와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시편, 104편 5절) 같은 텍스트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대한 적합한 논박이었다고 주장되었다. 현재 우리의 지식으로는 그런 주장은 부질없는 것 같다. 그 지식을 이용할 수 없었을 땐 그 주장은 꽤나 다른 인상을 주었다.

(2) ‘현실 도피성Heads in the Sand’ 반박. “기계가 생각한다는 것의 귀결은 너무 끔찍하다. 기계가 생각할 수 없다고 바라고, 또 그렇게 믿자.”

이 주장이 위의 형식으로 공공연히 표현되는 일은 꽤 드물다. 하지만 이 주장은 기계가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려 하면 우리 대부분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인간이 뭔가 미묘한 방식으로 나머지 피조물보다 우월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인간이 필연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그리 되면 인간이 명령하는 지위를 잃을 위험이 없으니 말이다. 신학적 주장의 대중성은 이 느낌과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느낌은 지적인 사람들에게 아주 강한 것 같은데, 왜냐하면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사고력power of thinking을 더 높게 쳐주고, 사고력을 인간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의 근거로 삼으려는 경향이 더 크기 때문이다.

나는 이 주장이 반박할 필요가 있을 만큼 충분히 실질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로가 더 적합하리라. 그렇지만 아마 이 위로는 영혼의 윤회 속에서 찾아야만 하리라.

(3) 수학적 반박.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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