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in #kr6 years ago (edited)

요 며칠 신경쇠약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들어주는 이는 없었지만). 짧은 새에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일들이 다발적으로 생겼는데, 그중 몇 개는 내가 자초한 것도 있었고,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도 있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악재가 겹친 건진 모르겠지만, 몸도 안 좋아졌고, 그래서 안 좋은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나의 특급 미루기가 발동했다. 해야 하는 모든 일을 (심지어 그것에 대한 생각마저도) 미뤄놓고 누워있거나 우울해하기 일쑤였고, 그래서 우울은 점점 몸집을 키워가고 있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지만, 최근 며칠은 이대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농담처럼 몇 번 했었고, 사라지고 싶은데 사라지지 못하는 사실이 잠깐씩 슬펐다. 누군가 옆에 있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스스로 중심을 다시 잡고서 사람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은 그 우울함, 예민함, 불안함과 같은 감정이 최고점을 돌파했다. 간만에 아주 깊은 무기력과 우울함을 느꼈다. 그 우울함이 저점이었을까? 바닥을 친 내 감정의 그래프는 갑자기 수직상승해 해야 할 일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했고, 그래서 단숨에 많은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끝냈을 땐 기분이 꽤 좋아졌다.


요즘 해묵은 악보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것을 한데 모아보면 피아노의 키도 거뜬히 넘길 정도로 많은 양이다. 반은 버렸고, 반은 이면지로 쓰기 위해 한쪽에 모아뒀다. 갈수록 프린트할 일이 없어지는데, 이 방대한 A4용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고민했지만, 멀쩡한 종이를 버리는 게 마음에 걸려 다시 또 종이 산을 쌓아뒀다.

악보를 정리하다 보니 오래전 끄적였던 습작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곡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 거나, 가끔 영감을 받았을 때 오선지에 적어 놓은 8~16마디 정도의 악보들이었다. 그것은 곡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또 버리자니 마음이 약해져 한데 모아 보면대 위에 올려뒀다.


우울할수록, 몸이 가라앉을수록 피아노를 더 많이 쳤다. 오늘은 보면대 위에 올려놓은 그 악보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앞에 놓인 악보는 8마디의 짧은 멜로디였는데 멜로디와 코드가 괴상했다.

요즘 나는 뉴에이지나 동요에 가까운(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Diatonic Chord의 비중이 높은, Diatonic Scale의 음으로 멜로디를 만드는) 쉬운 곡들을 쓰고 있어 저 곡이 더 괴상하게 들렸다. 굳이 화성학적으로 따지자면 모두 분석도 가능했지만, 정작 연주할 때 손에 감기지 않았고, 듣기도 불편했다. 이런 기괴한 곡을 왜 썼을까?

처음엔 악보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반복해서 치다보니 요즘 내 기분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고, 그래서 곡에 이입하게 되었다. 내 곡을 올리는 것을 무엇보다 창피해하는 나지만, 스팀잇에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대로 프로그램을 켜 녹음 버튼을 누르고 한 시간 동안 짧은 8마디를 반복해 연주했다. 다 들으려고 보니 또 한 시간을 들여야해서 그냥 중간에 있는 테이크를 골랐다. 그리고 프로젝트 저장도 하지 않고 그대로 익스포트했다. 익숙한 파일명 Untitled. 오늘은 제목을 지을 힘도 없고, 저대로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그대로 올려본다.

(똑같은 8마디를 계속 듣는게 익숙해져서 영상에도 똑같은 연주를 두 번 넣었다. 영상을 추출하고 나니 타이밍이 좀 아쉬운데, 귀찮아서 그냥 올린다. 악기도 포맷 후 깔지 않아 기본 가상악기. 죄다 엉망이지만, 요즘은 마음이 편해져 음악 좀 못하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든다.)


< Untitled >

사람들에게도 기괴하게 들리는지, 그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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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나루님 연주 반복해서 듣다가 잠들었는데 눈 뜨자마자 몇 년 전에 인상 깊게 봤던 영상이 생각났어요. 보여주고 싶어서 까먹기 전에 찾아두려고 했는데, 어디서 봤는지 도저히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결국 뒤지고 뒤져서 찾아냈어요.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팬인 스웨덴의 한 애니메이터가 Prima라는 곡에 영감을 받아서 만든 짧은 애니메이션이에요. 기괴하고 무섭기도 해요.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면 정말 좋을 텐데! 사진이라도 찍어볼까 봐요. 글을 쓸까... 나루님 곡 듣고 무슨 생각 했는지 남기고 싶은데. 음. 나루님의 두 번째 곡, 세 번째 곡 더 많이 듣게 되면 꼭 해볼게요.

물속에 가라앉는 공처럼 감정의 바닥 그 끝까지 닿아봐야 다시 퐁 하고 떠오를 수 있다고, 옛날에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 친구 별점이었나, 사주였나 봐주다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그때 옆에서 그걸 심드렁하게 듣고 있었거든요. 나중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어요. 뭐 기분전환을 위해, 우울을 극복하기 위해 이것도 해 봐라, 저것도 해 봐라 그러잖아요. 예쁜 거 보고, 맛난 거 먹고 그런 것들. 그런데 그런 건 방법이 아니더라고요. 제게는 내 마음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어요. 나루님도 바닥을 치고 퐁 떠올랐나 봐요.

댓글이 달린 순서대로 대댓글을 다는데요. 라운디님의 댓글이 제일 마지막에 있어서 좋았어요. '차분히 댓글을 달고, 마지막으로 이 영상을 보면 딱이겠다'라고 생각했거든요.

새벽에 이걸 반복해서 들으셨다니, 또 듣다가 잠드셨다니 '좀 더 잘할 걸'하는 후회가 듭니다. 좋은 꿈은 못 꾸셨을 것 같아 죄송하기도 하고요. 뒤지고 뒤지고 또 뒤져서 찾아낸 영상.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영상들도 찾아보았어요.

기분 탓인지 영상을 보다 보니 서늘해져서 에어컨을 껐습니다. 어제 제가 저 마지막 장면과 비슷했어요. 저렇게 몸을 웅크리고 싶었어요. 저 영상을 보니 어렵사리 끌어올린 기분이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은데, 그것도 나쁘진 않네요.

음울하지만 단정한 느낌이 있군요. 잔인함과 연민이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좀 더 길었으면 좋겠네요. 더 듣고 싶은데 아쉽. 개인적으로 제목을 붙인다면...

돌아갈 수 없는 길

나루님이 아쉽다고 한 점은...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계속 이렇게 올리시면 좋겠어요.

아마도 이것을 업이라 말하는 사람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아쉽다고 한 부분에는 이 곡 하나뿐 아니라, 인생 속의 게으름과 나태함이 함께 포함되어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음악을 통해 카비님이 느껴주신 '어떤' 감정과 계속 올려달라는 말이 그 부끄러움을 상쇄시킬 만큼 저를 행복하게 한답니다. 감사합니다.

음울하지만 단정한 느낌은 왜 그렇게 느끼셨는지 바로 알겠어요. 잔인함과 연민이 함께 느껴지는 부분은 카비님의 감성이라 생각하고 열어 놓았어요. 음악에서 8마디면 이제 좀 말을 꺼내려고 하는 참이지요. 저는 이렇게 만들어 놓고 나면 이 자체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 뒤를 붙이기가 힘드네요.

돌아갈 수 없는 길. 돌이킬 수 없는 길이 아니라 다행이에요:)

제 귀에는 '아 귀찮어..어휴'로 들립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요즘 육체노동하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더군요.
일단 찬바람이나 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귀찮어.. 어휴'라는 것은 아마도 선셋님의 지금 감정이 아닐까요? 저는 '아 귀찮어.. 어휴'라기 보다는 간만에 머리를 비우고 감정에만 집중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육체노동... 저는 육체노동을 하지 못해 음악을 붙들고 있습니다.

요즘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던데요. 지독한 더위도 한풀 가신 것 같아요. 문득 선셋님도 곡하나 들고 찾아 와주세요!

기괴하다기 보다는 손가락 끝에 짜증이 묻어나는 느낌입니다. 포스팅을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언제 부터인가 이따금씩 에이비7님 글을 밑에서 부터 읽는 버릇이 생겼어요. 따라서 음악부터 들어가면서 왜이리 회낼까? 했는데 첫단락(저에게는 마지막 단락)이 신경쇠약으로 시작했군요.

춤을 춰보아요.

어제 피터님이 올리신 글을 읽고, 글 아래 덧붙여진 링크를 타고선 약손 시리즈를 몰아서 쭉 읽었습니다. 그전에 읽었던 것도 있고, 읽지 못했던 것도 있는데 한 번에 쭉 읽으니 무척 좋았어요.

피터님의 댓글을 보고 놀랐습니다. 실은 저는 곡 자체는 기괴하지만 나름대로 아름답게 쳤다고 생각했거든요. 사람 마음이 감춰지지 않나 봐요. 그대로 드러나는게 무척 신기합니다. 화내는 제 모습을 마주할까 봐 곡은 다시 안 듣고 있어요.

랄라~♪

뭔가 불안한 듯한 심리의 배경음악같기도 합니다.
어딘가 통로를 막 지나쳐 가는...

일반적인 연주곡으로 보면 기괴하지만 어딘가 일그러진 영화의 한 장면과는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왠지 아름다운 풍경에 저 곡을 입혀보고 싶기도 하네요.

아 이 기분 뭔지 알 거 같아요. 진짜 딱 이 음악 이 느낌.. 무기력이 나를 지배할 때 그 느낌 딱이네요.

정말 신기해요. 이 기분을 공감해주고, 이 음악을 듣고 또 그 안에서 어떤 느낌을 찾아내는 그런 것들이요. 제가 글을 덧붙여서일까요? 글이 없어도 그런 감정을 느꼈을까요? 이런 게 무척 재미나요. 오쟁님 딱 이 기분일 때! 연주해주세요.

더 길게 듣고 싶어요, 그러면서 화해의 모티브도 만나고 막 오케스트레이션 들어오고 ^^

실은 저도 곡의 뒷부분을 써보려고 했는데요. 말씀해주신 '화해의 모티브'가 나오더라고요. 근데 괜한 반항심리에 화해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만들어보고는 싶었어요. 현악기가 날카롭게 연주해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네요:)

잔혹동화의 배경음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울함도 섞여있고요... ^^
짧지만 잘 듣고 갑니다.ㅎㅎ

어렸을 때 잔혹동화를 숨죽이며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는 무섭기만 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나름대로 아름다움도 있었던 것 같아요. 키위파이님의 감정도 비슷했길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재생도 못 하고 있어요.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이렇게 불편한 음을 들으면 별로 안좋아하는 취향인데.. 글이랑 함께 보아서 그런지..... 기괴까지는 모르겠고. 고장난 시계가 돌아가고있는 이미지가 보여서 의외로 좋았습니다. ^^ 그냥 좋고 않좋고는 몇번을 다시 들었느냐로 저는 단순히 판단하는데 ㅋㅋㅋ 이걸 열번째 돌리고있네요. ㅋㅋㅋ

확실히 불편하지요? '나에겐 불편하지만 사람들에겐 안 불편할 수도 있어!'라는 마음으로 올렸는데, 역시나 비슷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이렇게 보니 가사가, 또 음악에 덧붙여지는 글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덜렁 이 곡만 올렸으면 어땠을지도 궁금해지네요. 열 번씩이나 들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덜렁 이곡만 올렸으면 반응이 참 다양하고 재미있었을 것 같습니다. 원래 OST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스토리가 있는 가운데 노래가 나오는 경우에 듣는 사람들이 훨씩 이야기에 잘 공감하고 잘 느끼고 감정이입도 잘하더라구요.... 그에 반해 그냥 노래의 경우엔 3~4분내에 저걸 다해야하는 것이니... 굉장히 직관적으로 접근해서 듣고 패스 혹은 듣다가 다음곡 이런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훨씬 어렵고 하이라이트도 굉장히 잘 드러나도록 힘을 주는 것아닐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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