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체가 해괴할 수 밖에 없는 이유

in #kr-writing6 years ago


채널을 돌리다 '차이나는 클라스' 유시민 작가님 편을 보게 되었는데,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 최악의 글은 무엇인가를 꼽아보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이런 걸 꼽을 때 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패션 잡지사들의 글이다. 가장 대표적인 패션 잡지인 보그(Vogue)의 이름을 따서 일명 '보그체'라고도 하는 글들. 이 날도 어김없이 보그체가 최악의 글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핵공감하고 극공감하는 바이지만, 패션계에 몸 담았고 아직 완전히 발을 빼지 않은 사람으로서 조금 다른 관점의 이야기도 해보고 싶어서 이런 주제의 글을 쓰게 되었다. 패션업계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사실 업계에서 돌아가는 것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여성복 안에서 컨설팅과 트렌드 쪽으로 선회하여 소비자나 라이프스타일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트렌드를 하면서도 단발적인 트렌드 책 보다는 사회학 책에서 더 깊이 있는 인사이트를 얻는다고 느꼈고,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보그체는 해괴하다.


보그체가 해괴한 건 사실이다. 도대체 누굴 위해 무엇을 위해 이렇게 허세 가득하게 형이상학적인 수식어를 잔뜩 가져다 붙였는지 알 길이 없다. 애초에 외래어가 들어가지 않은 단어는 선택할 마음조차 없었던 글처럼 쓰여져있다. 명품백 하나에, 우스꽝스러운 컨셉 화보 하나에 세상 멋있는 말은 다 주워담아 느낌을 표현한다.

트렌드 주기가 가장 빠른 영역이고, 어쨌든 디자인 영역이다 보니 애초에 문학적으로 맞는 말을 할 이유도 계획도 없다. 미세한 차이의 감성을 설명할 수만 있다면 영어든, 신조어든 중요하지 않다. 다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통용되고 이해받을 수 있다는 것, 그 뿐이다.




그래도 나름 이유는 있다.


나도 보그체를 싫어하고, 패션에 관련된 기사나 글은 왜 이런 식으로 밖에는 나올 수 없는지 의문이었다. 한 때는 패션칼럼을 제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편을 들 생각도 없고 대신 해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패션용어는 애초에 우리나라가 시발점이 아니었다. 용어 뿐 아니라, 패션 자체와 그에 파생된 모든 문화들은 해외에서 시작되었다. 고전적인 개념들은 유럽에서 시작된 것이 대부분이고, 근대에 유행한 것들은 미국의 것들도 상당수이며, 봉제와 같은 기술적인 것들은 일본에서 건너왔다. '오뜨꾸뛰르'는 프랑스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프랑스어가 된 것이다. 기성복이 없던 시절 귀족들의 맞춤복을 위해 시작된 작은 쇼가 차츰 거대해지면서 기성복 영역에서도 런웨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꾸뛰르적'이라는 말은 장인이 손으로 직접 만들었을 법한 미학적인 무언가가 느껴지거나 그러한 디테일이 있을 때 표현하는 수식어이다. 장식성이라는 말로도 느낌이 안오고, 손맛이라고 하기엔 그게 다가 아니다. 꾸뛰르적이라는 말을 대체할 단어는 꾸뛰르적이라는 말 뿐이다.

모든게 이런 식이다. 오뜨꾸뛰르를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 '꾸뛰르적'이라는 말은 해괴망측한 단어일 뿐이다. 어떤 건 심플하다고 표현하고, 어떤 건 미니멀하다고 표현한다. 둘 다 군더더기가 없는 디자인에 사용하는 말이긴 하지만, '미니멀'이란 표현은 어쨌든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는 사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을 말하고자 할 때 사용된다.




언어는 문화에서 파생된다.


사람들이 주로 쓰는 언어는 시대를 반영하고, 그 시대 안에는 문화가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떤 우아한 문화가 아니더라도 기존에 없던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게 되면, 그에 맞는 단어가 만들어진다. 몇년 전 한창 유행했던 개념인 '놈코어(Normcore)'라는 신조어도 한국에서 먼저 유행한 것도 생겨난 개념도 아니었다. 전세계적으로 소비자들의 성향과 디자인적 취향이 겉으로는 무색무취인 듯 무난해보이는 것을 더 감각적이라고 느낀다는 이야기들에서 시작된 것이다.

적어도 가까운 과거에 오랫동안은 우리의 문화나 개념이 해외에 영향을 주기보다 해외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시간이었다. 그것들이 때로는 조악한 카피가 되기도 하고, 우리식으로 변형되기도 하면서 나름의 과정을 거쳐서 지금에 이르렀다.

경리단길에서 시작된 골목길 이름은 수 많은 '-리단길'을 만들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이 된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우리식의 표현이니, 무슨 스트리트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색하고 멋 없게 느껴진다. 요즘 스팀잇에서도 많이 쓰고 있는 '가즈아'라는 표현도 우리만의 느낌이 있다. 해외에서도 영어로 가즈아 태그를 다는 외국인들이 많다는데, 알고 쓰는지 모르고 쓰는지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출발은 우리다.

보그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서 먼저 출발된 개념들이 아니었기에 직역으로는 모든 걸 표현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해괴해질 수 밖에는 없었다는 이유를...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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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언어 간에, 그리고 분야와 분야 간에 일 대 일로 완전하게 대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어떠한 단어가 특정 업계에서, 다른 업계 혹은 언어와 구별되는 의미로서 사용되기 시작한다면, 아무래도 의미를 대체할 다른 단어는 존재하기 어렵겠지요. (해당 분야에서 맥락과 뉘앙스를 모두 담게 되면, 아마 그 단어는 다른 단어로 대체 불가능한 유일 무이한 단어가 될 것이라 봅니다. )

저는 개인적으로, 어떠한 업계든 그 업계 내에서 통용되는 표현 양식이 있다면 가급적 존중하자는 입장입니다. 물론, 그 업계를 넘어서 다른 업계 혹은 다른 세계로 침탈(?)하는 경우에는 아무래도 이러한 표현을 살릴 것이냐 하는 논란이 생기게 되겠지요.

여튼 제가 이 글에 대해
@홍보해
가 가장 최선일 것 같군요 :)

수식어들이 마치 고유명사처럼 이미지화 되어버린 경우가 많아요. 실용적인 사용성과 제대로된 문체 사이에 균형감을 잡는 게 중요할텐데 그런 논의나 모습을 보기는 정말 드물어요. 공감해주시고 홍보까지 해주셔서 넘 감사드려요. 출장중에 정말 힘뿜뿜납니다:)

그래도 보그체는 문장 속에 들어간 단어만 번역하면 알아들을만 하네요. 그에 비하면 미술체는.. 비문과 복문 무더기가 없으면 업계에서 글로써 받아주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도 한 듯이 느껴져요..

사실은 보그체가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아요. 수식어나 고유명사처럼 쓰는 단어들 때문에 여기까지 왔을 뿐이죠. 글이 먼저냐 추상적 개념의 표현이 먼저냐..뭔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기도 하네요 ㅎㅎ

사실 저는 패션업계가 아닌 타 업계(?)에서 일하지만... 그 단어, 그 용어로 설명하면 쉽게 상호간에 이해가 되는데... 굳이 한국어로 이야기하면 오해가 생기거나 이해를 잘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자주 쓰는 단어, 용어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해는 합니다. ^^;

덕분에 보그체와 그와 관련된 내용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이렇게 상식이 늘어나고 생각할 거리가 늘어납니다. ^^

ㅎㅎ감사합니다. 업계에서 말로 하는 용어들은 사실 더 심하지만, 바쁘게 일을 진행하며 하는 이야기들까지 바꾸기는 쉽지 않죠. 대중을 상대로 하는 글이라면 좀 바뀌어야할 필요가 있기에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살펴보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한때는 제가 그 역할 한번 해볼 수 있을까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 저의 역량부족과 업계를 떠날 요량으로 무산되었네요..ㅎㅎ;;

보그체가 개선될 수 있었는데... 아쉽네요? ㅎㅎㅎ
그래도 덕분에 스티밋에서 다양한 글드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다른 스티미언들에게는 전화위복인가요? ㅎㅎㅎ

너무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 제가 지원했어도 기회가 없었을 수도....

꾸뛰르적인 을 대체할 한국어가 없을듯하네요ㅋㅋ “특별하면서도 실험적이고 값비싼 파티복을 대변하는 뭐 그런 느낌” 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ㅋㅋ 해괴한 언어라 할지라도 쓰는 사람들의 소통에 도움을 주면 그 또한 언어고 문화겠네요ㅎㅎ

사용하는 모든 언어를 부정하면 그 업계자체를 부정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사실 영어라고 해도 마찬가지에요. 컬렉션분석은 구글번역기도 못당해낸답니다;;ㅎㅎ

밸런스가 살아있는 emotionalp님의 라이팅은 포인트가 디테일하게 살아있어 닉네임과 비슷한 아트적인 필링을 느끼게 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잘했죠?ㅋㅋㅋ

저는 홈쇼핑쪽을 연구했는데요, 심의때문에 완화된 표현을 찾다보니 해괴한 표현들로 대체된 경우도 많아요. 글 진짜 좋아요^_^)b

ㅋㅋㅋㅋㅋㅋ@feeltong님 그뤠잇드립니다 ㅎㅎ

아... 너무 공감합니다. 어떤 단어가 가진 대체불가능한 존재감이요. 의미, 역사와 맥락, 분위기 그 모든 것을 포함한 그 존재감이요. 저는 패션업계와 관련이 없지만, 가끔 패션과 관련된 글을 써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이모셔널님이 써주신 보그체에 대한 다른 관점을 이해하게 됩니다.

너무빠르게 변하는 업계라서 가십거리가 아닌 길게 보는 깊이있는 글을 쓰기가 어려워요. 또 그런 글을 보려고 패션잡지를 사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러다보니 SNS에서도 채워줄 수 있는 소식을 보기 위해 보그나 바자를 예전만큼 보는 사람이 없죠 이제는 ㅎㅎ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아~~~ 보그체라고 하는군요. ^^

네 상징적으로 그렇게들 부르더라구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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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쪽 디자이너들은 유학한 사람들이 많다보니 더한 것 같습니다. 우리말 보다 영어가 더 편한 사람들도 많아서 그런지 핵심 단어는 전부 외래어를 사용하는 것..같아요.ㅎㅎ

그런것도있고 새로 생겨난 스타일이나 개념인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어떤 단어가 유행하면 그에 대한 이미지가 생기잖아요.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불리기 시작하면 다른 단어로 직역해서 쓰거나 하기는 힘들게되죠. ㅎㅎ

그렇군요.. 해괴하다고 표현하기에는.. 오히려 느낌을 잃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표현의 방식이 존중되어야 겠네요.. 표준의 언어, 어법에 맞는 언어라는 것도 어쨌거나 새로운 개념에 바로바로 대응할 수 없으니 심지어 정서 자체가 다르면 더욱 그렇겠죠. 시큼털털하다.. 뽀샤시하다.. 이런 걸 외국인이 자기들 말로 백날 만들어봐야 느낌이 잘 전달되지 않겠죠.. 문화의 존중이란 차원에서 새로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최악'으로 꼽히기도 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말하려다보니 해괴하다는 표현을 썼어요. ㅎㅎ 그런걸 꼽는 사람들은 대부분 패션쪽에 관심 1도 없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아요. 관심있고 그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이나 새롭게 시도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더 괜찮은 걸 보여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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