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 연재소설) [PANic Song -chapter 3] Vertigo(1)

in #kr-writing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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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lude - Blackened
Chapter 1 - Dog King(1)
Chapter 1 - Dog King(2)
Chapter 1 - Dog King(3)
Chapetr 2 - HERO(1)
Chapetr 2 - HERO(2)
Chapetr 2 - HERO(3)
Chapetr 2 - HERO(4)

애도의 상실감과 씁쓸한 반가움이 충돌하는 곳. 상갓집은 늘 버거운 공간이다. 한 대령의 빈소는 침울한 가운데 활기가 넘쳤으나, 식장 가득 내린 소슬함은 조문객들의 발목을 무겁게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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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줘서 고맙네. 좋은 소식으로 연락했으면 좋았을 텐데.”

김 소령은 예의 그 딱딱한 말투로 신일을 맞았다. 그는 움푹 패인 눈으로 상주와 가족을 대신해 자리를 지켰다. 피곤함을 감추며 신일을 안내하는 그의 몸에서 묵은 담배냄새가 난다.

“저쪽에 자리를 따로 마련해 두었네.”

위패를 모신 빈실(殯室)은 익숙한 향냄새로 가득했다. 신일은 식장 한 구석, 퉁퉁 부은 눈으로 주저앉은 중년여성에게 차마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신일은 알지 못했다.

영정 속 한 대령은 신일이 기억하는 넉넉한 웃음으로 옛 동료를 반겼다. 상주에게 절을 올리고 나올 때까지도 신일은 그의 죽음을 실감할 수 없었다.

집 떠나 고생하는 젊은이들에게 이곳에서만큼은 내가 애비 역할을 해줘야 하지 않겠나. 한 대령은 가끔 술기운에 기대 신일에게 그런 말을 했다. 사적인 자리에서만큼은 신일을 동생처럼 살갑게 대하던 그였다. 신일은 그런 한 대령을 곧잘 따랐고, 한 대령은 그런 신일을 제법 신임했다.

금방이라도 한 대령의 목소리가 들릴 것 같다. 울컥한 기분에 신일은 식장 밖을 나서며 시큰한 눈물을 훔쳤다.

“나 중위님 아니십니까?”

신일이 그리던 목소리는 아니지만, 거기엔 식장의 침울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정겨움이 묻어있었다.

“인태야!”

선임분대장으로 일하던 주인태 하사다. 예전 까까머리는 한결 정돈됐지만, 그의 볼은 검붉은 여드름이 여전히 솟아 있었다.

“이게 얼마만이냐. 반갑다.”

“그러게요. 이것 참, 이런 일로 이런 곳에서 뵙게 됐습니다.”

오랜만의 재회가 쑥스러운 듯 그는 짧은 머리를 긁적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좋은 일로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러게요. 나 중위님은… 잘 지내십니까?”

“뭐, 그럭저럭. 넌 어때?”

“저야 뭐, 군 생활이라는 게 원체 다 비슷비슷하지 않습니까.”

“다른 분들은 많이 오셨어? 그때 같이 일하던 분들이랑은 다 연락하고 지내나?”

“예, 그래도 대부분 연락하고 지내는 편입니다. 김상원 소령님이야 뭐 같은 부대에 계속 있으니까 워낙 자주 뵙는 편이고…”

신일은 그제야 찬찬히 식장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과연, 자리 곳곳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띤다. 그는 그렇게 얼마간 펼쳐진 테이블의 평행선을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찬찬히 시선을 돌리며 사람들을 관찰했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객들은 북적이는 상갓집에 제 식대로 녹아들었다.

무방비 상태의 인간에게서 드러나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읽어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그들은 가식 없는 표정으로 왁자지껄 떠들거나, 침울하게 잔을 꺾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고인을 추모했다.

그렇게 한참을 떠돌던 신일의 시선이 마침내 식장 건너편에 멈췄다. 도드라지게 튀어 나온 광대뼈에 사납게 삐쳐 오른 눈썹, 야무지게 다문 입술이 반갑기까지 하다. 빳빳하게 다린 전투복을 입고 있었지만, 헐렁한 군복으로도 선명히 잡힌 그의 팔 근육을 가릴 순 없었다.

길성우 원사는 여전히 강건한 무인(武人)의 기백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신일은 선뜻 그에게 먼저 다가갈 수 없었다. 저 충혈 된 눈, 길 원사의 저런 눈을 전에도 본 적이 있던가?

“나 중위님, 혹시 누구랑 같이 오셨습니까?”

여전히 둥글둥글한 성품이 묻어나는 눈웃음이다. 발랄한 주 하사의 질문에 신일은 시선을 겨우 원점으로 되돌렸다.

“아, 아니… 나는 전역하고 따로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이 없어서. 김상원 소령 말고 다른 장교 분들은 아직 안 왔어?”

“다른 분들은 대부분 어젯밤에 왔다 가셨습니다. 오늘은 아마 일과 끝난 다음에나 오실 것 같습니다.”

“그래? 간만에 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어차피 나 중위님 계실 때 있던 분들은 거의 다 전역하거나 부대를 옮기셨지 말입니다. 류준 대위님만 그렇게 되시고….”

“류 대위? 왜? 준이한테 무슨 일 있어?”

건성으로 답하는 신일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아… 그 나 중위님은 따로… 연락 못 받으셨던가?”

“응, 나야 뭐. 알잖아? 우리 사이 별로 안 좋았던 거…”

주 하사가 주춤거리며 말을 아끼는 중에도 신일은 공공연히 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 보였다.

류 대위는 부대 내 보급업무를 담당하던 선임 장교였다. 신일보다 두어 살이나 어렸지만, 그는 20대의 나이를 무색케 할 만큼 권위적인 성품으로 악명 높았다.
군인정신의 본질을 명령에의 무조건적인 복종으로 이해하던 그에게 신일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볶아대는 통에 신일은 습관처럼 신물을 토하며 그에 대한 저주의 말을 곱씹곤 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류 대위님 때는 나 중위님을 못 뵈었던 것 같기도…”

“무슨 소리야? 그 때라니?”

“저기 그 류 대위님 말입니다. 얼마 전에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그래? 얼마나 다쳤는데? 크게 다친 거야?”

“음, 그게… 아, 나 중위님은 정말 모르고 계셨구나.”

“무슨 얘기야? 난 당최 무슨 얘기인지….”

“류 대위님,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뭐?”

“낚시 갔다가 돌아오는 새벽길에 사고가 났습니다. 부대 인근에서 뺑소니차에 치였는데 현장에서 즉사하셨다고….”

신일은 두 손을 들어 벌겋게 달은 볼을 눌렀다. 누군가의 상갓집에서 또 다른 이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고인에게 해묵은 심술을 부렸다는 죄책감 때문일까. 잠시 잠잠했던 울렁증이 다시 도지고 있다.

“오랜만…이외다.”

뒤에서 들린 귀 익은 인사에 신일은 반사적으로 옷깃을 여몄다.

“그간 무고하셨소?”

힘없이 악수를 건네는 남자의 손바닥에 하얀 빗금이 쳐졌다. 그가 내민 손가락 끝에는 해묵은 니코틴의 흔적이 묻어났다.

“길 원사님…”

“어쩌다 이런 곳에서 인사를 하게 되었소이다.”

그는 여전히 조선시대에나 썼을 법한 하오체 말투를 썼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의 괴팍한 억양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신일은 노병(老兵)의 얼굴에 핀 마른버짐을 찬찬히 훑었다. 어색한 안부인사 뒤로 젖은 소주 냄새가 밀려왔다.

“불과 며칠 전에 연락 드렸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여쭈셨는데…”

주 하사가 느릿한 걸음으로 자리를 피한다. 조심스레 몸을 비키면서도 그는 신일에게 눈짓으로 꾸벅, 인사를 건넸다.
신일 역시 고개를 끄덕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선배의 헝클어진 모습을 굳이 목격하지 않으려는 그의 마음 씀씀이를 잘 아는 신일이었다.

“이렇게… 이렇게 돌아가실 분이 아니었는데….”

전에 들어본 적 없는 물기 섞인 목소리다. 이럴 때는 무슨 말로 상대를 달래야 하는지, 신일은 알지 못했다. 다시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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