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 연재소설) [PANic Song - Prelude] Blackened

in #kr-writing7 years ago (edited)

그곳의 어둠은 유독 깊은 색을 띠었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걸 집어삼킬 듯 빽빽한 밤의 밀도. 무거운 공기가 똬리 튼 뱀처럼 몸을 휘감았다.

볼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남자는 눈을 떴다. 주위엔 온통 먹칠갑의 어둠뿐이다.
몸속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린다. 그의 몸은 젖은 걸레처럼 내동댕이쳐져 있다. 남자는 한손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건 그의 오랜 손버릇이었다. 편두통에 시달릴 때면, 그는 늘 이렇게 손을 놀려 예기치 못한 통증을 달랬다.

돌덩이에 묶여 바다에 던져진 해적의 몸뚱이가 이럴까. 혀끝 묻어난 흙냄새가 시큼하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게로군. 남자는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기억은 회식 후 귀가하던 골목 모퉁이에 멈췄다. 술에 취해 쓰러진 건가? 그럴 리 없어. 택시에서 내릴 때까지 조금의 취기도 없을 만큼 멀쩡했단 말이다. 이 정도 가벼운 술자리에 정신을 잃었을 리 없다.

남자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덧칠된 현기증 사이로 보이지 않는 벽이 병풍을 친 기분이다.

숨이 막힌다. 아니, 그보다 고통스러운 불꽃이 입가에 아른거린다. 이상하다. 광대뼈는 달군 인두에 닿은 듯 시큰거리는데, 입 주변은 무두질한 짐승가죽처럼 무감각하다. 입가를 더듬은 손에 기분 나쁜 끈적임이 묻어난다. 손톱 밑을 파고든 녹슨 쇠붙이 냄새, 남자는 그제야 콧등에 아른거리는 피비린내를 맡았다.

손가락을 헤집어봐도 맞닿은 입술이 꿈쩍치 않는다. 손끝에 전해지는 건 메마른 피딱지의 바스락거림과 기괴한 눅눅함뿐이다.

「이, 이건?」

북받치는 공포에 남자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입이, 꿰매져 있다. 핏물 먹은 박음질은 투박하지만, 빽빽했다. 찌릿한 충격에 남자는 고개를 떨궜다. 눈가에 번진 물기에서 떫은 소금 맛이 난다.

남자는 감각이 채 돌아오지 않은 아래턱을 실룩거렸다. 하찮은 꿈틀거림이었지만, 그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몸부림이었다.

투두둑.

눈가가 축축해졌다.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봉합 부위 끝 실밥 몇 땀이 터져버렸다. 혀뿌리에 고인 피고름이 입술 사이로 밀려나온다. 구역질이 난다. 하지만 그게 입 안 가득한 약 냄새 때문인지,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한 이 악몽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침내 식도를 타고 오른 토사물이 입술을 밀어낸다. 상처를 비집고 바닥에 쏟긴 체액에서는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남자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일단, 이곳을 빠져 나가야한다. 여기에 계속 있다간 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뭐…뭐야, 저건?」

반대편 벽 끝에서 전해지는 인기척에 남자는 눈을 돌렸다.

누군가 있다. 아니, 누군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저 눈빛은 응시의 반짝거림이라기보다 관찰의 희번덕거림이다.

낯선 공간에 정체 모를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건, 불안한 일이다. 남자는 위협적인 자세로 그림자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봉인된 입은 여전히 꿈쩍치 않았다.

또각또각. 흉흉한 구둣발 소리가 어두운 미궁에 울려 퍼진다. 잔뜩 움츠린 사내에게 그건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심장을 때리는 진동과도 같았다.

그림자가 서서히, 속도를 높인다. 그림자의 발놀림은 바람에 맞서 푸덕이는 맹금류의 날갯짓을 연상케 했다. 그의 동작은 품위에 겨운 우아한 춤이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개전신호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의 호흡, 그 들이쉼과 내쉼의 리듬만큼은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일순간 분 바람에 구름에 몸을 숨겼던 달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미끄러지듯 달려오던 괴한은 어슴푸레 내리쬐는 달빛을 고스란히 맞았다.

남자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기괴하게 웃는 괴한의 얼굴이 불에 타다 남은 인형처럼 흉망스럽다. 거기 남은 건 맹렬한 적개심뿐이다. 저 자에게서, 싸늘한 죽음의 냄새가 난다. 등 뒤로 마른땀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남자의 몸속에서 누군가 다시 외친다. 살고 싶으면, 당장 도망치라고.

남자는 곧장 반대편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제멋대로 뒤뚱거렸다. 입술이 부들거리고 다리가 휘청거린다. 분명, 지금의 이 무딘 신체반응은 약 기운 탓만은 아니다.

이건, 공포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죽음에의 공포.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의 실체가 지금 눈앞에서 춤추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언제든 목숨 바칠 각오가 된 사내였다. 하지만 그 역시 이런 죽음을 상상한 적은 없었다. 어딘지도 모를 이 따위 곳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으라니, 이건 전장에서의 최후를 꿈꿔온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어느새 둘의 간격은 꿈틀거리는 표정까지 읽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초조하게 돌아본 사내의 등 뒤로 그르렁거리는 맹수의 이빨이 번쩍인다. 또렷이 드러난 적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남자는 하얗게 질려 버렸다.

저 창백한 얼굴, 낯이 익다.

이런 상황에서 스쳐 지난 이의 얼굴이 떠오를 리는 없다. 그러기에 남자는 그간 너무 많은 젊은이들의 얼굴을 봐 왔다.

저 멀리, 빛이 반짝인다.

드디어 출구인가. 소박한 안도감에 남자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냈다. 하지만 문턱 한 걸음 앞, 추켜 오르는 바람에 그는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어둠 속에 곤두박질칠 뻔했다.

「여긴?」

정신을 추스를 틈도 없이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솟아난다.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손은 순식간에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여린 손이었지만, 상대를 제압하는 그의 손놀림은 거칠고, 단호했다.

이내 허리춤에 낯선 차가움이 파고든다. 남자는 봉인된 입술 사이 세어 나오는 비명을 겨우 삼켰다. 날카로운 고통이 거침없이 몸을 들쑤신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있지만, 남자는 구멍 난 쓰레기 봉지처럼 무기력했다.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넘친다. 하지만 그가 갇힌 미궁에 울리는 건 침묵의 신음소리 뿐이다. 익숙한 따뜻함이 꾸역꾸역 몸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남자는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삶의 마지막 라운드를 알리는 공이 귓가에 울린다.

남자는 사력을 다해 적의 얼굴을 노려봤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드러난 하얀 피부, 틀림없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놈이다.

먹잇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포식자의 손이 꿈틀대며 기어 나온다. 소름 끼치도록 곱고, 하얀 손이었다. 너덜해진 몸이 그림자의 손에 맥없이 밀려난다. 기우뚱, 벼랑 끝에 멈춘 몸뚱이가 중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급격히 빨려 들어간다.
퍽, 둔탁한 소리가 남자의 머리를 때린다. 어둑한 밤하늘이 피눈물에 비쳐 핏빛으로 물들어간다.

낙엽이 채 지지 않은 가을밤이었다. 바람에 걷힌 구름이 몰려오자, 다시 미궁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림자는 서서히 바닥에 꽂힌 먹잇감에게 다가갔다. 사뿐사뿐 내딛는 발걸음은 살인자의 것이라기엔 너무 경쾌했다.

사내는 머리가 깨진 개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그림자는 늙은 들개의 고기를 기다리듯 헐떡이는 남자 주위를 한동안 맴돌았다.

힘없이 세어 나오던 남자의 콧김이 마침내 멈췄다. 차갑게 식은 몸에 더 이상의 온기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림자는 그제야 조용히 품었던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는 죽은 사내의 옷 안주머니에 종이를 찔러 넣고는 조용히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오직 구름 뒤 몸을 가린 달만이 땅 위의 어둠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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